치워라
作 와우산 · 2026-10-24
등불이 행랑 마당을 다 지나가고 나서야 스무 개가 조금 가라앉았다. 가라앉았을 뿐 눕지는 않았다. 별채 쪽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였다.
막삼은 엎드린 채로 소완의 그림을 끌어당겼다. 쌀알 스무 알이 안채 동쪽 건물 위에 모여 있었다. 그 옆에 숯으로 그린 동그라미.
“별채에 가 봐야겠다.”
소완이 두부를 갈던 손을 멈췄다.
“안채 문 넘으면 사내는 맞아 죽어요.”
“맞는 건 내 일이다.”
“공짜로 맞으면요?”
막삼은 대답이 막혔다. 소완은 웃지 않았다. 정말로 묻고 있었다.
“……그건 손해지.”
“그럼 왜 가요?”
막삼은 쌀알을 손끝으로 굴렸다.
쌀알은 별채에 소가주가 산다는 것까지만 말해 주었다. 그믐밤에 소가주가 무엇을 했는지는 매가 가리켜 주지 못했다.
갈 영감이 받은 스무 대가 정말로 무엇 값인지 모르고서는, 돌려줄 때 얼마를 보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몸은 이미 예순넷을 지고 있었다. 무거워질수록 막삼이 고를 수 있는 길은 줄어들었다.
“모르는 매를 들고 다니면 무겁다.”
소완은 한참 막삼을 보다가 숯 막대를 집었다. 그림 위, 마구간에서 우물까지 선을 그었다.
“마구간 뒷문이 후원으로 나 있어요. 우물 바로 옆이에요. 그믐 뒤로 갈 영감이 밤마다 빗장을 걸고 또 걸어요. 안쪽에서요.”
“안쪽이면 못 연다.”
“제가 열어요. 밤 북이 두 번 울릴 때요. 하녀는 후원에 다녀도 돼요.”
소완은 그 말을 하면서도 막삼을 보지 않았다. 그림 위 우물 동그라미만 보았다.
붙잡히면 맞는다. 누구 이름도 아닌 매를. 그런 매는 몸에 남지 않으니 백으로 차오를 걱정은 없었다.
대신 그냥 아프고, 그냥 다치고, 운이 나쁘면 그냥 죽는다. 막삼은 그 생각을 오래 하지 않았다. 오래 하면 안 가게 될 생각이었다.
막삼은 엎드린 채 두 번째 밤 북을 기다렸다. 짚신 끈을 풀었다가 다시 단단히 맸다. 맞으러 가는 길에는 신을 매지 않는다. 맞고 나서 걸어 나올 때 신이 벗겨지지 않게 매는 것이다. 오늘은 걸어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
두 번째 북이 울리자 막삼은 마구간으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말들이 콧김을 뿜고 여물 냄새에 말똥 냄새가 섞여 드는데, 다락에서는 갈 영감이 코를 골고 있었다. 막삼은 발끝으로 여물통을 지나 마구간 안쪽 벽에 붙었다.
맨 끝 칸의 흰 말이 고개를 돌려 막삼을 보았다. 막삼은 숨을 멈췄다. 말이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다락의 코 고는 소리가 끊겼다.
다락 난간 위로 하얀 머리가 내밀어졌다. 어둠 속에서 늙은 마부의 눈이 막삼을 찾았다. 둘은 한참 서로를 보았다.
갈 영감은 머리를 도로 거두고 돌아눕는 소리를 냈다. 조금 뒤 코 고는 소리가 다시 났다. 아까보다 조금 일부러 낸 소리였다.
막삼은 마구간 안쪽 벽을 더듬어 나갔다. 낮은 문이 보였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빗장이 벗겨져 있었다.
문을 밀자 후원이었다.
달이 밝았고, 대숲이 바람에 쓸렸다. 대숲 사이 오솔길 끝에 돌로 쌓은 둥근 우물이 있었다. 새 두레박줄이 하얗게 감겨 있었다.
원래 있던 줄은 걸려 있지 않았다. 우물 옆에는 새로 켠 널판 덮개가 세워져 있었다. 아직 덮지 않은 덮개였다.
막삼은 우물가로 다가가 안을 내려다보았다. 깊었다. 달빛이 중간쯤에서 끊기고, 그 아래로는 차고 비린 물 냄새만 올라왔다.
우물 돌 테두리는 사람 허리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발을 헛디뎌서 넘어갈 높이가 아니었다. 물을 무서워하던 아이가 이 테두리에 혼자 기대섰을 리도 없었다.
우물 뒤 대숲 그늘에 헌 줄이 둘둘 말려 버려져 있었다. 막삼은 그 끝을 들어 보았다. 끝이 닳고 닳아 끊어져 있었다. 무거운 것을 끌어올리다 끊어진 줄이었다. 갈 영감의 손바닥이 떠올랐다.
스물이 우물을 지나 그 너머 담장 쪽으로 기울었다. 담장 너머 별채 창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우물에서 별채 뒷담까지는 서른 걸음이 안 되었다.
우물 돌 테두리에 이끼가 길게 벗겨진 데가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돌 위를 쓸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막삼은 무릎을 꿇고 그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돌과 돌 틈에 무엇이 끼어 있었다. 손톱으로 파냈다.
달빛에 비춰 보니 손톱만 한 금붙이였다. 새 깃털 모양으로 가늘게 두들겨 편 금, 끝이 꺾인 조각. 막삼은 금을 만질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게 하녀 머리에 꽂힐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막삼은 금 조각을 허리춤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때 별채 담 너머에서 낮고 고른 목소리가 들렸다.
“우물에 덮개를 씌워라. 혼례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물을 긷지 않게 해.”
“예, 소가주님.”
목소리가 멀어지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스물이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가, 문이 닫히자 담벼락에 이마를 박듯 멈췄다.
막삼은 담에 몸을 붙이고 별채 뒷담까지 갔다. 담 아래 기와가 하나 빠진 틈이 있었다. 눈을 대자 별채 뒷마루와 창호지가 보였다.
창호지에 그림자가 비쳤다. 등잔 앞에 앉은 그림자가 오른손을 펴서 불빛에 비춰 보고, 천으로 감았다가, 다시 풀어 들여다보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그 손바닥을 놓지 못했다.
스물이 그 그림자 쪽으로 당겼다. 막삼은 틈에서 눈을 떼고 별채 쪽으로 몇 걸음 더 갔다.
몇 걸음 가지 못했다.
목덜미가 뒤에서 잡혔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없었다. 막삼의 몸이 땅에서 뜨더니 담벼락에 등부터 붙었다.
엉덩이가 담에 닿아 눈앞이 하얬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소리 안 지르는 일로 먹고산 덕이었다.
달빛 아래 석철의 얼굴이 보였다. 서른 줄의 그 얼굴은 장작을 패러 나온 사람처럼 덤덤했다.
막삼의 오른손이 저절로 석철의 손목을 잡았다. 버릇이었다. 손바닥에 사내의 맨살이 닿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순넷 가운데 어느 것도 석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스물은 여전히 별채를 보았고, 스물넷은 안채를 보았고, 행랑 몫은 행랑 여기저기를 보았다. 석철의 손목을 쥔 막삼의 손에서는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 사내에게 갈 매는 없었다. 오늘 밤 맞아야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 그 손이군.”
석철이 내려다보았다. 목덜미를 쥔 손은 처음 쥔 그대로였다.
“관아 의문 앞에서, 쪽문에서, 지금.”
“버릇입니다.”
“공자님 손목은 왜 잡았느냐?”
“턱을 잡으셔서 떼어 내려고요.”
“떼어 내는 손치고는 오래 잡더군.”
막삼은 침을 삼켰다. 칼보다 눈이 빠르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석철이 칼을 찾는지 막삼의 허리춤을 한 손으로 훑었다. 그 손이 금 조각이 든 주머니 위를 지나갔다. 멈칫했다가,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석철이 짧게 말했다.
“별채 근처에 얼씬하는 자는 치우라는 명이다.”
달빛 아래에서 석철의 칼자루가 보였다. 막삼은 그 칼을 보지 않고 석철의 소매를 보았다. 왼쪽 소맷부리에 접은 종이 귀퉁이가 비쳤다.
이 사내에게는 돌려줄 것이 없다. 엉덩이로는 이길 길이 없었다. 그러면 남는 건 입이었다.
“치우라는 게 어느 쪽입니까?”
“무슨 소리냐?”
“관아 마당에서 착실히 쳐라와 마음 써서 쳐라는 다른 말입니다. 겉말이 같아도 속을 잘못 읽으면 친 놈만 남지요.”
석철의 손은 그대로였다. 막삼은 목덜미가 잡혀 짧아진 숨으로 말을 이었다.
“내보내라는 뜻이면 호위님이 저를 담 밖에 던지시면 끝납니다. 묻으라는 뜻이면 묻으셔야 하고요. 그런데 적어 주신 분은 묻으라고 안 쓰고 치우라고 쓰셨습니다. 나중에 나는 내보내라고 했다, 하실 자리를 남겨 두신 거지요. 묻은 건 호위님 손이고요.”
“말이 많은 놈이군.”
“맞을 때 말을 못 하니, 안 맞을 때 몰아서 합니다.”
석철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막삼은 그 틈에 또 물었다.
“호위님은 소가주님 사람입니까, 총관 어른 사람입니까?”
“서문가 사람이다.”
“같은 말 아닙니까?”
“다른 말이다.”
석철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소가주와 총관이 다르고, 그 둘과 서문가가 또 다르다는 말이었다. 막삼은 그 말을 귀에 넣어 두었다.
석철은 막삼을 오래 보다가, 목덜미를 쥔 채로 다른 손을 소매에 넣었다. 접은 종이를 꺼내 한 손으로 펼쳤다. 달빛에 비춰 읽었다.
막삼은 종이를 보았다. 읽을 줄은 몰랐다. 글자가 몇 자인지 셌다. 아홉. 글씨의 모양도 보았다. 획마다 끝을 붓으로 살짝 들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갈고리처럼.
석철이 종이를 접어 소매에 도로 넣었다. 넣는 손이 꺼낼 때보다 느렸다. 받아 든 날 읽고 넣어 둔 종이를, 석철도 오늘 처음 다시 읽은 모양이었다.
“글자대로 하겠다.”
석철은 막삼의 목덜미를 쥔 채 후원을 가로질렀다. 막삼의 발끝이 땅에 반쯤 끌렸다.
“그 종이, 누가 쓰셨습니까?”
“읽을 줄도 모르면서.”
“모양은 압니다.”
석철의 걸음이 반 박자 멎었다. 목덜미를 쥔 손은 그대로였는데, 석철은 매품팔이를 처음부터 다시 재 보듯 한참 내려다보고는 말없이 다시 걸었다.
우물을 지나고, 대숲을 지나고, 마구간 뒷문을 지났다. 다락에서 갈 영감이 코를 골다 멈추는 소리가 났다. 마구간 앞마당을 지나 바깥 담 아래에 이르자 석철이 멈췄다.
“다음엔 종이를 다시 읽지 않는다.”
석철이 막삼의 목덜미를 쥔 채 발끝으로 땅을 찼다. 막삼의 발밑으로 기와 얹은 담 머리가 지나갔다. 사람 키 곱절은 되는 담 위에 선 채로, 석철은 짐짝 내려놓듯 막삼을 골목 쪽으로 던졌다.
막삼은 담 밖 골목에 엉덩이부터 떨어졌다. 이번에는 소리를 질렀다. 짧게.
올려다보니 담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철이 내려가는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등불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야경 도는 늙은이였다.
“거기 누구냐?”
“매 맞고 자빠진 놈입니다.”
늙은이가 등불을 들이밀어 막삼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관아 담 밑 모귀로구나. 밤에도 맞냐?”
“밤 매는 공짜라 싸게 맞았습니다.”
늙은이는 대꾸하지 않고 등불을 거두어 지나갔다.
새벽이 될 때까지 막삼은 골목 진흙에 엎드려 있었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담에 부딪히고 땅에 떨어진 자리는 콩알이 되지 않았다. 공짜 매였다. 소완 말이 맞았다. 손해였다.
담을 사이에 두고도 스물은 별채 쪽을 보았다. 우물에 덮개를 씌우라던 목소리와 몇 시진 전 창호지 위를 지나가던 키 큰 그림자가 막삼의 머릿속에서 같은 사람으로 겹쳤다.
갈 영감은 다락에서 막삼을 보고도 돌아누웠다. 늙은 마부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척하는지, 막삼은 아직 다 알지 못했다.
동이 터 올 무렵, 쪽문 빗장 벗기는 소리가 났다. 바구니를 든 하녀가 골목으로 나왔다. 새벽 두부를 사러 나가는 소완이었다.
소완은 골목 진흙에 엎드린 막삼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바구니를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공짜로 맞았죠?”
“담하고 땅한테.”
소완이 막삼의 팔을 제 어깨에 걸었다. 하녀의 어깨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막삼은 겨우 일어서며 허리춤 안쪽 주머니에서 금 조각을 꺼냈다.
“이거 봐라.”
금 조각이 소완의 손바닥에 놓였다. 소완은 새벽빛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숯 묻은 손가락으로 깃털 결을 차례로 쓸었다.
“새 꼬리깃이에요. 봉황 같은 거.”
“어디서 떨어진 건지 아냐?”
소완은 고개를 젓다가 멈췄다. 금 조각을 다시, 오래 보았다. 그믐밤 취옥의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던 것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소완은 금 조각을 막삼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집에 가서 엎드려 있어요. 두부 사 가지고 갈게요.”
소완은 바구니를 들고 두부 장수네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 모퉁이에서 돌아보고는 걸음을 서둘렀다.
막삼은 담에 기대어 금 조각을 들여다보았다. 새벽빛에 비추니 깃털 결이 가닥가닥 새겨져 있었다. 금방에서 정성 들여 두들긴 물건이었다.
그 종이의 글씨가 떠올랐다.
글자는 몰라도 붓버릇은 안다. 삼 년 동안 거적 밑에서 쪽지를 몇 번이나 꺼내 보았는지 모른다. 약 쪽지의 글씨는 획 끝을 갈고리처럼 살짝 들어 올렸다.
어제 형당 문간에서 막삼의 이름 끝에 가로획 셋을 긋던 붓끝도 그렇게 들렸던 것 같았다. 그때는 제 이름 모양을 보느라 붓버릇까지 눈여겨보지 않았다.
치우라고 적은 붓버릇은, 하루 두 번 밥 먹고 약을 먹으라고 적은 붓버릇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