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 적는 사람
作 받아적는사람 · 2026-10-22
건너온 이들은 다들 이 세계를 책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았다. 대신 10년 동안 받아 적었다.
그리고 곧 그 공책 서른한 권으로 읽은 사람 행세를 하게 된다. 틀리면 교수대에 서는 자리에서. 동생 약값이 두 달째 밀린 달이었다.
"4권 들어가면 북부랑 전쟁 나. 그때 밀값이 열 배로 뛰어."
마르코 상단주가 포도주 잔을 흔들었다. 오늘만 세 번째 하는 말이었다.
나는 펜을 멈추지 않았다. 「4권, 북부 전쟁, 밀값 열 배」. 귀퉁이에 작게 덧붙인다. 「세 번째」.
"작가 후기에 그렇게 써 있었대. 4권은 전쟁이라고."
「출처: 상단주님도 들은 얘기」. 이것도 적었다. 그는 2권까지만 읽었다.
"이렌, 방금 거 적었지?"
"네, 상단주님."
"읽어 봐."
나는 목을 가다듬고 그의 목소리로 읽었다.
"4권 들어가면 북부랑 전쟁 나. 그때 밀값이 열 배로 뛰어."
끝을 살짝 끌어올리는 버릇, 「뛰어」에서 혀를 차는 소리까지. 상단주가 낄낄 웃었다.
"이거 봐라. 붙박이가 흉내 하나는 기가 막혀."
붙박이. 건너온 이들이 우리를 부르는 말이다. 이 땅에 붙박여 어디로도 못 가는 사람들.
"23년 전에 첫 비 왔잖아." 마르코가 잔을 비웠다. 술이 들어가면 꼭 나오는 얘기였다. "다음 날 눈을 떴는데 여기야. 『황금 가시의 황녀』 안이라고. 내가 2권까지 읽은 그 책 속."
"네."
"등록소 가서 2급 받았지. 그 동판 하나로 이 창고 세운 거고. 저쪽에선 내가 직장인이었다, 너 그거 알아?"
"직장인이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책상에 앉는 사람. 여기 오니까 그게 제일 그립더라."
"무슨 일 하셨는데요?"
"……그건 묻는 거 아니야."
그는 그 질문에만은 대답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 창고 장부를 적는 하녀였다. 정확히는 장부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원작」 전부를.
"원작에서 그 겨울은 진짜 길거든. 나 그 장면 읽다가 이불 덮었잖아."
나는 받아 적었다. 「이불 덮음」까지.
* * *
이 집에 손님이 오는 밤이면 일이 두 배로 늘었다.
"황녀 첫 등장은 백금발이야. 거기가 복선이라니까."
1급 백작 부인은 말끝을 늘였다. 젖은 솜처럼 느린 목소리였다.
"3권 중반에서 끊겼어. 작가 놈이. 휴재 공지 하나 없이."
군 장교는 탁자를 쳤다. 3권 중반까지 읽었다는 쉰 목소리였다.
"저는 1권만……."
젊은 공증인은 끝까지 말한 적이 없었다.
"황녀 머리는 은발이라니까."
"무슨 소리야, 백금발이지. 삽화 못 봤어?"
"난 텍스트파야."
"그냥 궁에 가서 보면 되잖아요."
공증인이 웅얼거렸다. 장교가 혀를 찼다.
"누가 들여보내 준대. 황녀궁 안채엔 붙박이 시녀만 드나들어. 열두 살에 들어간 뒤로 그 담 밖에 한 번도 안 나왔다고."
그래서 황녀의 머리색은 늘 이 식탁 위에서 정해졌다. 나는 잔을 채우며 들었다. 집에 가면 다 적었다. 은발파 셋, 백금발파 넷.
그렇게 10년을 하니 공책이 서른한 권이 됐다.
* * *
"보르 아가씨."
부엌 뒷문에서 약재상 심부름꾼이 손을 내밀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이번 달 페트라 아가씨 약값, 은화 열두 닢입니다. 지난달 것까지 합치면 스물넷이고요."
"월말에 드릴게요."
"지난달에도 그러셨어요."
"이번엔 진짜예요."
심부름꾼은 대답 대신 내 앞치마를 봤다. 마르코 상단의 문장이 수놓인 앞치마. 붙박이 하녀 월급이 얼마인지는 이 골목 사람이면 다 안다.
나는 겁이 많다. 빚쟁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큰 소리가 나면 먼저 숨는다. 그래도 하나는 할 줄 알았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상단주님이 다음 주에 밀 창고를 하나 더 여시거든요. 약재상 어르신도 그거 아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원작에서도 그 겨울은 길다고 하니까."
마지막 문장은 마르코의 억양 그대로였다. 심부름꾼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앞일을 아는 사람의 말투에는 그런 힘이 있다.
"상단주님이 그러셨어요? 그 겨울 길다고?"
"네. 원작에서요."
"……월말까지입니다."
"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 * *
일이 끝난 건 그날 저녁이었다.
상단주의 서재에 낯선 청년이 앉아 있었다. 깨끗한 손, 잉크 한 점 없는 소매. 가슴에 5급 등록증이 달려 있었다.
"인사해, 이렌. 테오야. 오늘부터 내 서기."
"서기요?"
"서기. 장부 적고, 손님 오면 원작 얘기 정리하고. 네가 하던 거."
"제가 하던 거요."
"응. 얘가 1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대. 직접. 받아 적고 할 필요가 없어."
5급. 1권을 다 읽었으면 적어도 4급이었다. 마르코는 그 셈을 하지 않았다. 나는 했다.
테오가 고개를 까딱했다. 나를 보는 눈이 의자나 촛대를 볼 때와 같았다.
"받아 적은 건 이제 필요 없어요. 저는 제 눈으로 읽었으니까요."
"원작 1권에서 황녀가 처음 궁에 들어올 때 은발이었죠. 그 장면 좋아해요."
은발. 나는 열네 번째 공책, 서른두 쪽을 떠올렸다. 「은발은 2권에서 염색한 거고, 1권 첫 등장은 백금발이야. 거기가 복선이라고.」
입이 근질거렸다. 말하지 않았다. 5급이 2급 앞에서 틀린 걸 붙박이 하녀가 바로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10년 동안 충분히 봤다.
"그러니까." 마르코가 손뼉을 쳤다. "붙박이는 이제 필요 없어. 10년이면 붙박이치곤 오래 버텼지. 이번 달 치는 줄게. 공책은 두고 가."
"공책은……."
"응?"
"제가 쓴 거라서요."
"내가 한 말이잖아."
그 말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서른한 권 어디에도 내 말은 없었다.
"……그럼 상단주님 장부만 두고 갈게요. 나머지는 손님들 말씀이에요."
"손님들 말? 가져가. 2권 너머는 다 남이 지어낸 얘기야. 백작 부인이 3권을 읽었다고? 그 여자 2권 끝에서 울다가 잠든 사람이야. 장교는 술만 들어가면 없는 장면도 만들어 내고."
"네."
"그러니까 그건 휴지야. 불쏘시개로나 써."
테오가 웃었다.
"붙박이가 원작 받아 적은 걸로 뭐 하게요. 이불이나 덮겠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 달 치 월급으로 은화 여덟 닢을 받았다. 약값 스물넷에서 여덟을 빼 보았다. 셈은 금방 끝났다.
* * *
뒷문으로 나가는 길에 부엌을 지났다. 베르타 아줌마가 감자 수프를 젓다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이 집 부엌을 20년 맡은 붙박이였다.
"들었다. 서기가 왔다며."
"벌써요?"
"마부가 봤고, 마부가 세탁장에 말했고, 세탁장이 나한테 말했지." 아줌마가 수프를 한 그릇 퍼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계피 냄새가 났다. "건너온 이들은 위층에서 떠들어. 우리는 아래층에서 다 듣고. 몰랐니?"
"알았어요."
"갈 데 없으면 말해. 이 도시 부엌들은 뒷문끼리 다 통한다."
"아줌마는 안 물어요? 왜 잘렸는지."
"물어서 뭐 해. 위층 일은 위층 일이지." 아줌마가 다시 국자를 들었다. "공책은 챙겼니?"
"손님들 거만요."
"그럼 됐다. 남의 말도 모아 두면 재산이야. 부엌은 다 그렇게 버틴다."
나는 수프를 다 먹고 그릇을 씻어 놓았다.
* * *
"언니 왔어?"
수도 변두리 셋방. 페트라가 이불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열다섯인데 열둘로 보인다. 겨울마다 기침이 깊어졌다.
"오늘 일찍 왔네."
"응. 상단주님이 일찍 가래."
"언니, 오늘은 상단주 흉내 안 내?"
"이따가."
"오빠들한테 편지 왔어." 페트라가 베개 밑에서 종이를 꺼냈다. "남부 항구 일이 끊겼대. 이번 달은 못 보낸대."
"……그래."
"영지 넘어간 지 10년인데 아직도 아버지 빚 갚는대. 언니, 우리 빚 얼마 남았어?"
"자. 그건 언니가 셀게."
"언니 셈은 맨날 맞는데 왜 맨날 모자라?"
"……셈이 맞아서 모자란 거야."
"오늘도 원작 얘기 했어?"
"했지."
"해 줘."
나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마르코가 됐다. 배를 내밀고 포도주 잔 대신 물컵을 흔들었다.
"4권 들어가면 북부랑 전쟁 나. 그때 밀값이 열 배로 뛰어. 나 그 장면 읽다가 이불 덮었잖아."
페트라가 웃다가 기침을 했다. 나는 등을 쓸어 주었다. 숨이 가라앉자 페트라가 나를 올려다봤다.
"언니, 또 남의 말 하네."
"재밌잖아."
"언니 말로도 해 봐. 오늘 어땠는지."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르코가, 테오가, 심부름꾼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토씨 하나까지 기억났다. 그런데 나는 무슨 말을 했지.
"……피곤했어."
"그게 다야?"
"응. 자."
페트라는 한참 나를 보다가 돌아누웠다. 나는 등잔을 껐다.
* * *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광장 게시판에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서 붉은 봉인이 번들거렸다.
【제국 등록소 공고】
늦게 깨어난 건너온 이의 추가 등록을 받음.
거울 시험 응시 자격: 첫 비 이후 다른 세상의 기억을 얻은 자.
1급(3권 이상) 등록 시 연금 금화 50, 작위에 준하는 대우, 면세.
허위 등록은 제국법에 따라 교수형.
"금화 쉰 닢이래."
야경꾼 영감이 등불을 들고 옆에 섰다. 붙박이였다.
"보르 아가씨는 볼 일 없는 종이지. 우린 깨어날 일이 없으니까."
"……그렇죠."
"작년에 저거 보고 응시한 붙박이가 셋이야. 셋 다 저기 갔어." 영감이 광장 끝 교수대 쪽으로 등불을 들었다. "책 한 권 외운 걸로는 안 된대. 거울이 다 안다더라."
"응시하려면 뭐가 있어야 해요?"
"다른 세상 기억. 그거 하나야. 증명은 거울이 하고."
"거울이 뭘 아는데요?"
"그걸 내가 어찌 알아. 붙박이는 등록소 문턱도 못 넘는데." 영감이 등불을 흔들었다. "들어가 본 놈들은 다 저기 있고."
영감이 지나갔다. 나는 공고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금화 한 닢이 은화 스무 닢. 셈을 하다가 그만뒀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마르코의 목소리를 냈다.
"원작에서 그 겨울은 진짜 길거든."
목소리가 돌바닥에 부딪혀 돌아왔다. 낯설지 않았다. 10년 동안 내 입에서 제일 많이 나온 목소리였다.
공고문 귀퉁이를 조금 찢었다. 「1급(3권 이상)」이 적힌 자리였다.
* * *
셋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 궤짝을 열었다. 공책 서른한 권. 두 권을 빼면 전부 손님들의 원작이었다.
책 한 권 외운 걸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궤짝 속 서른한 권을 내려다봤다. 그 안에는 서른 명의 입이 있었다.
등잔을 다시 켜고 첫 권을 펼쳤다. 열두 살의 삐뚤삐뚤한 글씨였다. 페트라가 깨지 않게 아주 작게, 적은 사람의 목소리로 읽었다.
"황녀는 가시 덩굴 정원에서 처음 나와. 금색 가시야. 나 여기서 소름 돋았잖아."
마르코였다. 열네 번째 권을 펼쳤다.
"은발은 2권부터예요. 1권은 백금발. 거기가 복선이라니까요."
백작 부인의 느린 말투. 스물아홉 번째 권.
"3권, 북문. 불이 올라. 황태자는 거기서부터 내리막이야. 여기서부터 진짜 재밌어진다고."
장교의 쉰 목소리. 서른 번째 권.
"저는 1권만 읽어서……."
공증인의 웅얼거림. 서른한 권 안에 서른 명이 살고 있었다.
나는 공책을 바닥에 한 줄로 늘어놓았다. 백작 부인의 정원 옆에 장교의 연병장, 그 옆에 마르코의 술주정.
등잔 불빛이 공책 등을 차례로 훑었다. 1권 정원에서 3권 북문까지 끊긴 데가 없었다.
"이 정도면."
내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듣는.
"건너온 척은 되겠다."
궤짝 맨 위 공책 표지에 열두 살의 내가 삐뚤게 쓴 이름이 있었다. 이렌 보르.
건너온 이들은 다 이름이 둘이었다. 나는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