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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병상 공녀의 심심풀이

作 외인 · 2026-10-19

방에 돌아오니 화분이 바뀌어 있었다.

같은 흰 제라늄이었다. 다만 잎이 싱싱했고, 흙은 갓 갈아엎은 밭처럼 검고 보송했다. 끈적한 기운은 한 점도 없었다.

레티시아는 창턱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니나: 아가씨...

니나가 문가에서 쭈뼛거렸다. 얼굴이 새빨갰다.

니나: 제가요. 어제 정원사 할아버지한테 화분 좀 봐 달라고 했어요. 꽃이 아파서요.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레티시아: 괜찮아.

니나: 안 괜찮아요. 흙이 없어졌잖아요. 그게 증거였는데.

니나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작은 잼 병이었다. 안에 검은 흙이 한 줌 들어 있었다. 그 옆에는 손수건으로 곱게 싼 무언가. 펼쳐 보니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흰 꽃 한 송이였다.

니나: 정원사 할아버지가 흙을 버리기 전에, 제가 한 줌 담아 뒀어요. 꽃도요.

레티시아는 잼 병과 니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레티시아: 니나야.

니나: 네...

레티시아: 너 장사하면 잘하겠다.

니나는 그게 칭찬인지 아닌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레티시아는 잼 병을 받아 침대 밑 깊숙이 넣었다. 오래된 상자들 뒤, 손이 겨우 닿는 곳이었다.

침대에 누워 레티시아는 그레고르를 생각했다.

그 노인은 화분의 비밀을 알았다. 그런데 공작에게도, 드라벨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면 오늘 아침 이 방에 드라벨이 먼저 와 있었을 것이다. 반지 세 개를 번쩍이며.

적이라면 벌써 말했을 것이다.

같은 편이라면 장부를 보여 줬을 것이다.

그레고르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동대문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자기가 맡은 가게 하나만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은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어렵고, 적으로 돌리기도 아까웠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지키는 문을, 그 사람보다 높은 열쇠로 열면 된다.

이 집에서 그레고르가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하나였다.

레티시아는 천장의 날개 벗겨진 천사를 올려다봤다.

제일 쉬운 협상 상대는 이미 내 편인 사람이다. 그리고 제일 어려운 상대도 그 사람이다.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

공작의 서재는 1층 서쪽 끝에 있었다.

레티시아는 오후 훈련 시간을 그대로 썼다. 율리안이 구령을 붙이고, 니나가 걸음을 셌다. 계단 두 층을 내려가 서쪽 복도를 끝까지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행군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스윈: 레티? 레티가 왜... 어디 아프냐? 율리안, 무슨 일이냐!

레티시아: 아무 일 없어요, 아버지. 걸어서 왔어요.

공작 오스윈 벨하르트는 문을 연 채로 굳었다. 그리고 딸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세 번쯤 훑어봤다. 서재 안쪽 창가 자리에서는 공작부인이 찻잔을 든 채 일어서 있었다. 오후의 차를 남편과 마시는 것이 두 사람의 오랜 습관이라고, 니나가 언젠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서재는 주인을 닮아 있었다.

벽에는 검과 창이 걸려 있었고, 커다란 북부 지도가 한 면을 다 차지했다. 책장에는 전술서와 연대기가 빼곡했다. 그런데 책상 위가 깨끗했다. 서류 한 장 없었다. 펜대에 잉크 자국도 없었다.

숫자를 안 보는 사람의 책상이었다.

오스윈: 앉아라, 앉아. 아니, 이 의자 말고 저 의자. 저게 더 푹신하다.

공작이 직접 의자를 끌어왔다. 공작부인은 말없이 찻잔 하나를 더 채웠다. 율리안과 니나는 문가에 남았다.

레티시아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레티시아: 아버지. 저 심심해요.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오스윈: 심심해?

레티시아: 훈련은 하루에 세 번, 한 번에 십오 분이잖아요. 나머지는 다 누워 있어요. 오라버니가 갖다준 책은 다 읽었고요. 지리지는 세 번 읽었어요.

오스윈: 세 번...

레티시아: 그래서 말인데요. 장부를 보고 싶어요. 이 집 살림 장부요.

서재가 조용해졌다.

공작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서재가 울릴 만큼 큰 웃음이었다.

오스윈: 장부? 레티, 그건 나도 하품 나서 못 본다. 숫자만 잔뜩이야. 재미없어.

레티시아: 그러니까요. 잠 안 올 때 딱이잖아요.

공작이 또 웃었다. 이번에는 무릎까지 쳤다. 문가에서 율리안이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떨었다.

공작부인만 웃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딸을 찬찬히 봤다.

엘레노어: 숙녀가 장부라니요. 하인들이 보면...

거기서 부인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다른 목소리로 이었다.

엘레노어: ...하긴, 살림을 미리 배워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요. 언젠가 시집을 가면, 그 집 안살림은 네가 맡게 될 테니까.

레티시아는 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시집.

예순 평생, 누가 그녀에게 그 단어를 쓴 건 서른 넘어 친척 어른들이 혀를 차며 꺼낸 게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열일곱 살 귀에 그 단어가 들어오자, 얼굴이 제멋대로 뜨거워졌다. 머리는 아무렇지 않은데 귀 끝이 먼저 달아올랐다.

레티시아: 그, 그건 아직...

오스윈: 시집은 무슨 시집이오!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이었다.

오스윈: 레티는 아직 열일곱이오! 이제 겨우 걷기 시작했는데 무슨 시집을!

엘레노어: 예를 들어서 한 말이에요, 오스윈.

오스윈: 예를 들어서도 안 되오!

레티시아는 손등으로 뺨을 식히며 생각했다. 이 집 사람들은 정말 장사를 할 줄 모른다. 협상 자리에서 이렇게 속을 다 드러내면 안 되는데.

그런데 그 덕분에 판이 기울었다. 아버지는 이제, 딸이 '시집'이 아니라 '장부'를 원한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운 얼굴이었다.

오스윈: 그레고르를 부르게.

공작이 문가의 율리안에게 말했다.

그레고르는 금방 왔다. 서재에 들어서며 그는 레티시아를 봤다. 아주 짧게.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스윈: 그레고르. 레티가 장부를 보고 싶다는구나. 심심하대.

그레고르: 각하. 장부는...

오스윈: 알아. 집안의 속이라는 거. 아버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지.

공작은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딸 쪽을 한 번 보고, 집사 쪽을 봤다.

오스윈: 그레고르. 레티가 뭘 원한다고 이렇게 또박또박 말한 게 처음이야. 소리도 안 지르고, 아무것도 안 던지고. 그냥 와서, 앉아서, 말했어.

공작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오스윈: 나는 그게 좋다.

그레고르는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레티시아를 봤다. 이번에는 짧지 않게.

레티시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패를 꺼냈다.

레티시아: 아버지.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제가 거는 조건이요.

오스윈: 조건?

레티시아: 매주 한 번, 장부에서 본 걸 아버지께 보고드릴게요. 오라버니가 훈련 보고 하는 것처럼요. 숫자 하나 빠짐없이.

공작의 얼굴이 무너졌다. 감격한 장롱이 또 한 번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레고르가 허리를 굽혔다.

그레고르: ...각하 뜻대로 하겠습니다.

장부는 그날 저녁에 왔다.

그레고르가 직접 들고 왔고, 하인 둘이 뒤에서 나무 상자를 날랐다. 가죽 장정의 장부가 열두 권. 작년 한 해, 한 달에 한 권씩이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그달그달의 영수증과 계산서 묶음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레티시아는 그 상자를 봤다.

영수증까지. 그레고르는 하나도 빼지 않고 가져왔다. 숨길 것이 있는 사람은 장부를 내주더라도 증빙은 빼놓는다. 동대문에서 세무 조사를 받던 가게들이 다 그랬다.

아니면, 숨긴 것을 결코 찾을 수 없으리라 자신하는 사람이거나.

그레고르: 심심풀이로 보시기엔 양이 좀 많으실 겁니다.

그레고르가 장부를 침대 옆 탁자에 쌓으며 말했다.

레티시아: 그러게요. 한동안 심심할 틈이 없겠네요.

레티시아가 웃었다. 그레고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레고르: 장부에 손대신 곳이 있으면, 저는 압니다.

레티시아: 손 안 대요. 보기만 할 거예요.

그레고르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밤이었다.

니나는 의자에서 잠들었고, 촛불 하나가 탁자 위에서 흔들렸다. 레티시아는 첫 번째 장부를 펼쳤다.

묵은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동대문 사무실 서랍에서 나던 냄새와 똑같았다. 그녀는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제 자리에 앉은 기분이었다.

글씨는 그레고르의 것이었다. 반듯하고, 작고, 한 줄도 틀어지지 않았다. 날짜, 항목, 금액, 서명. 사십 년을 이렇게 써 온 손이었다.

먼저 약값을 찾았다. '아가씨 의료비'. 달마다 같은 자리에 같은 크기로 있었다. 계산서와 맞았다. 그리고 그 줄은 저택 살림의 단일 항목 가운데 가장 컸다. 양초보다도, 장작보다도.

레티시아는 그 숫자를 머릿속 장부에 옮겨 적었다. 지금은 거기까지였다. 약은 증거가 다 모일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다. 그건 마지막에 한 번에 칠 일이었다.

대신 나머지를 봤다.

양초, 장작, 밀가루, 포도주, 말먹이, 세탁. 달마다 반복되는 줄들. 레티시아는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가며 머릿속 주판을 튕겼다. 대부분은 철 따라 오르내렸다. 겨울엔 장작이 늘고, 여름엔 줄었다. 정상이었다.

그러다 한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얼음.'

마르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얼음 값은 매달 오르는데, 정작 얼음은 늘 모자라요.

레티시아는 열두 권을 다 꺼내 그 줄만 따라 넘겼다.

얼음은 매달 같은 수만큼 들어왔다. 이틀에 한 번, 열 덩이.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똑같이. 그런데 값은 석 달마다 조금씩 올라 있었다. 연초와 연말을 견주니 한 덩이 값이 반 넘게 뛰어 있었다.

수는 같다. 값은 오른다. 그런데 주방에서는 늘 모자란다.

레티시아는 장부를 덮지 않은 채 촛불을 조금 더 가까이 당겼다.

셋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