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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는 어디에도 이름이 없던

by 장지호 · 2026-10-26

D+15 · 14:00

"세션이 삼백열네 개입니다."

수사팀 브리핑이 이어졌다. 사건 당일 02:40, 홍길동 계정은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접속해 있었다. 세션마다 하는 일이 달랐다. 어떤 세션은 삭제를 실행했고, 어떤 세션은 로그를 정리했고, 어떤 세션은 아무것도 안 하고 접속만 유지했다.

"아무것도 안 한 세션은 뭡니까."

"모릅니다. 지켜본 것 같기도 하고요."

"지켜봐요? 뭐를."

"제대로 지워지나요."

"침입 경로는 어디까지 나왔습니까."

"침입 흔적이 없습니다."

방 안의 몇이 고개를 들었다.

"없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정상 계정으로 정상 로그인했습니다. 아이디 넣고 비밀번호 넣고 들어왔어요. 방화벽에도 안 걸립니다. 걸릴 게 없으니까요." 수사관은 자료를 넘겼다. "문을 부순 기록을 찾고 있었는데, 부순 문이 없습니다. 열쇠를 갖고 있었어요."

다인은 그 말을 노트에 적었다. 적으면서 며칠 전 밤에 떠올렸던 이야기가 다시 왔다. 학교에서 배운 홍길동은 도적인데 관가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담을 넘은 게 아니었다. 형이 벼슬을 했으니 그 관복을 입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지키던 사람들은 옷을 봤고, 옷은 진짜였다.

"가져간 건 없습니까." 정 사무관이 물었다.

"없습니다."

"없다고요? 사천만 건 개인정보가 있는 시스템인데요."

"주민번호, 주소, 연락처, 하나도 안 건드렸습니다. 조회 로그도 없어요. 열어보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수사관은 잠깐 말을 멈췄다. "지운 건 권리관계뿐입니다."

"왜요."

"그건 저희도 궁금합니다. 팔면 값이 나가는 걸 앞에 두고 안 가져갔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몇 명인지 특정이 안 됩니다. 계정 정보가 언제부터 공유됐는지 추적했는데, 수 년 전부터 특정 커뮤니티들에서 조각조각 돌아다닌 정황이 있어요. 접속 방법을 아는 사람이 최소 수십, 많으면 수백입니다."

"조직입니까?"

"조직이라기엔 지휘 체계가 없고, 개인이라기엔 너무 많습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주범을 특정 못 하면 수사는 어떻게 됩니까."

"잡히는 사람이 주범이 되겠죠."

수사관은 그 말을 별 뜻 없이 했고, 다인은 그 말을 이틀 뒤에 다시 생각하게 된다.

로그인하는 순간 누구든 홍길동이 된다. 붙잡을 몸이 없는 이름을 쫓고 있는 것이다.

D+15 · 19:30

퇴근길에 다인은 지하철을 두 정거장 더 갔다.

수사 자료에 그 사람의 최종 주거지가 적혀 있었다. 오 년 전 주소였고, 등기부에 올라 있던 마흔여섯 채 중에는 없는 주소였다. 고시원이었다.

건물은 아직 있었다. 일층이 편의점이고 이층부터 사층까지가 고시원이었다. 입구에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창 있는 방 삼십오만 원, 창 없는 방 이십팔만 원. 그 아래에 볼펜으로 만 원씩 올려 적어놨다.

계단에서 총무를 만났다. 오십 대쯤 되는 남자였고, 다인이 뭘 물어보려는 걸 알아채고 먼저 말했다.

"방 보러 오신 거면 지금 하나 있어요."

"아니고요. 여기 오 년 전에 살던 분을 좀 찾고 있어서요."

"오 년 전 사람을 어떻게 찾아요."

"...그렇네요."

남자는 다인을 한 번 보고 계단을 올라갔다. 다인도 따라 올라갔다. 복도는 어깨를 돌려야 지나가는 폭이었고 문이 팔십 센티미터마다 하나씩 있었다. 문에 이름은 없고 번호만 붙어 있었다.

"이 층에 몇 분 사세요?"

"열아홉이요."

열아홉 개의 문. 다인은 그 복도에 서서 그 사람의 등기부를 생각했다. 마흔여섯 채. 빌라와 오피스텔. 전부 그 이름이 갑구에 적혀 있었고 전부 대출과 보증금이 꽉 차 있었다.

이 복도에 문이 열아홉 개고, 그중 하나에 마흔여섯 채의 주인이 살았다.

"그분 뭐 하다 없어졌는지는 몰라요." 총무가 말했다. 묻지 않았는데 대답한 것이었다. "여기는 다들 그래요. 어느 날 없어져 있어요."

"방은 어떻게 하세요."

"치우죠." 남자는 열쇠 꾸러미를 한 번 돌렸다. "짐이 얼마 없으니까 반나절이면 돼요."

"보통 뭐가 남아요?"

"옷가지랑 이불이요. 그릇 몇 개. 큰 건 없어요." 남자는 복도 끝을 턱으로 가리켰다. "넣을 데가 없으니까. 저 방 하나가 한 평 조금 넘어요."

한 평. 다인은 그 숫자를 화면에서 매일 본다. 등기부 표제부에 면적이 적히고, 창구에서는 제곱미터로 읽고, 사람들은 평으로 되물어본다. 마흔여섯 채의 면적을 다 더하면 몇천 제곱미터가 될 것이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쓴 면적은 한 평 조금이었다.

다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려왔다. 물어볼 것도 없었고 볼 것도 없었다. 일층 편의점에서 뭘 하나 사서 나왔는데, 나중에 보니 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D+16 · 11:00

복원 시뮬레이션 팀에서 비명이 나왔다.

경기 남부의 임야 한 필지. 십이 년 전 기획부동산이 산 하나를 일만 사천 조각의 지분으로 쪼개 판 땅이었다. 지분권자 명부가 백업 시점마다 달랐다. 사람들이 지분을 되팔고, 상속하고, 압류당하면서 명부가 계속 변해왔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 테이프로 복원하느냐에 따라 지분권자가 최대 천이백 명씩 달라집니다. 그 사이에 죽은 사람도 있고 판 사람도 있어요. 어떤 시점을 골라도 나머지 시점의 권리자들이 소송을 겁니다."

"전부 최신으로 맞추면?"

"최신 테이프가 필지마다 달라요. 이 필지는 삭제 전주 것이 있는데 옆 필지는 삼 주 전 것뿐입니다."

"섞으면요."

"섞으면 필지끼리 모순이 나요. 같은 지분이 두 사람한테 있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걸 여쭤보려고 온 겁니다."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적어놓은 문장이 그날 오후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완전한 복원은 시점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의 문제임.

다인은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적었다. 재작년 훈련, 세 시간 반, 표본만. 그때 자기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무도 전체를 되돌려본 적이 없다는 말은, 되돌릴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D+16 · 15:40

그날 오후에 전산 이관 얘기가 처음 나왔다.

지분 임야의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찾다가, 담당자가 십오 년 전 이관 당시의 원본 대장 얘기를 꺼냈다.

"종이 등기부에서 전산으로 넘어올 때 입력을 외주로 돌렸거든요. 그때 작업 책임자들이 검수 서명을 했어요. 이 필지 서명자가," 그는 서류를 넘겼다. "노경환. 등기소 전산계 출신이네요. 지금은 퇴직."

노경환. 다인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고,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다. 서명 하나로 기억되는 이름은 아니었다.

D+17 · 20:30

속보가 떴다. 이번에는 체포였다.

등기 전산망 침입 관련 10대 검거... "계정 정보 온라인서 입수"

열여덟 살이었다. 뉴스는 그 아이의 신상을 흐릿하게 처리한 등하굣길 영상과 함께, 범행 일체라는 단어를 썼다. 다음 날 아침 조간들은 일제히 주범이라는 단어를 썼다.

본부 사람들은 아무도 그 기사를 믿지 않았다. 세션 삼백열네 개 중 하나가 잡힌 것뿐이었다. 그 아이의 세션은 삭제 실행조차 하지 않은, 접속만 유지하던 세션이었다.

"접속만 하고 있으면 무슨 죄가 돼요?"

다인이 최민기에게 물었다.

"정보통신망 침입이죠. 그건 접속만 해도 성립해요."

"실행한 사람들이랑 형량이 같아요?"

"다르겠죠. 근데 잡힌 게 걔 하나잖아요. 그러면," 최민기는 자판을 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삼백열네 명 몫의 화가 한 명한테 갈 거예요. 법으로는 아니어도, 뉴스로는요."

"계장님은 그런 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보이세요."

최민기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

"보이는 거랑 말하는 거는 다르잖아요." 그는 다시 자판을 쳤다. "저는 보이는 것까지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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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후드티 (블랙/화이트) ★★★★☆ 리뷰 1,204

가슴 프린트: `등기권리자: 홍길동`

등판 프린트: `000000-0000000`

└ 사무실에 입고 갔더니 팀장님이 웃다가 정색함

└ 이거 입고 등기소 가면 쫓겨나나요

└ ㄴ 가봤는데 직원분이 못 본 척하심

└ 사이즈 정사이즈예요 근데 좀 슬프지 않냐 이거

└ ㄴ 슬퍼서 사는 거임

다음 날 그 아이의 학교 앞에 중계차가 세 대 서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다인은 그 사진 속 교문을 오래 봤다. 홍길동이 되는 방법은 로그인이었다. 홍길동에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잡히는 것뿐인 모양이었다. 돌아온 자리에는 삼백열네 명 몫의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것이 누구인지 다인은 생각해봤다. 계정 정보를 조각내서 커뮤니티에 뿌린 사람들이었다. 아무나 홍길동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나 대신 잡힐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름을 나눠 쓰면 책임도 나눠지고, 나눠진 책임은 제일 어린 쪽에 쌓였다.

그런데 여론은 하루 만에 바뀌었다. 잡혔다니까 끝났다고 했다. 학생이라니까 별것 아니었다고 했다. 무서워하던 사람들이 덜 무서워하기 시작했고, 다인은 그게 더 무서웠다.

이름이 잡히지 않으니까, 세상은 얼굴 하나를 잡아다 이름 위에 덧씌우고 있었다.

[내부 문건] 부동산 등기 신뢰 실태 전수조사 결과 보고 (○년 전, 대외비)

- 조사 대상: 피해 신고·민원·직권 인지 필지 17,304건

- 판정: 피해 인정 4,012건 / 불인정 3,944건 / 판단 유보 9,348건

- 건의: 인정 필지에 대한 직권 구제 입법 검토

- 처리: 건의 기각. 본 보고서 비공개 전환. (사유: 소급 구제 시 재정 부담 및 거래 질서 혼란 우려)

D+19 · 09:40

아침 회의까지 사십 분 남아 있었다. 정 사무관이 다인의 자리로 왔다.

법무 담당이었고 마흔 줄이었고 목소리가 작았다. 대책본부에서 다인이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건 그가 창구 얘기를 물어봐준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무관님. 창구에서 민원이 접수되면 그다음이 어떻게 됩니까."

"어떤 민원이요."

"내 등기가 잘못됐다는 민원이요."

"접수하고, 소명 자료 받고, 등기관이 검토하고, 대개는 각하됩니다. 형식 심사라서요. 그러고 나면 소송으로 가시거나," 다인은 잠깐 멈췄다. "다시 오십니다."

"기록은 남습니까."

"남죠. 접수 대장에요."

"그 대장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안 가요. 등기소에 있어요."

정 사무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삼십 분 뒤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출력물을 들고 있었다.

"이백 건을 뽑아봤습니다. 목록에서 무작위로요."

"네."

"이백 건 전부에 민원 기록이 있습니다."

다인은 출력물을 받았다. 국민신문고, 진정서, 소송, 언론 제보. 시기는 제각각이었다. 십이 년 전 것도 있고 재작년 것도 있었다.

"전부요?"

"이백 건 중에 이백 건이요. 그리고 이게 더 이상한데요." 그는 다음 장을 넘겼다. "필지마다 회신 공문이 하나씩 달려 있어요. 발신처가 다 같습니다."

회신 공문의 발신처를 따라가니 문건이 나왔다. 몇 해 전 정부 합동으로 등기 신뢰 실태를 전수조사한 보고서였다. 표지에 대외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조사 대상이 만 칠천삼백네 건입니다." 정 사무관이 말했다. "그중에 피해 인정이,"

그가 종이를 한 장 더 넘겼다.

"사천십이 건이요."

다인의 모니터에는 삭제 필지 목록이 떠 있었다. 오른쪽 위에 건수가 찍혀 있었다. 4,012.

두 사람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건도 안 다르네요." 다인이 말했다.

정 사무관은 대답 대신 출력물을 도로 가져갔다. 손이 조금 떨렸는데, 그걸 감추려고 서류를 세로로 세워 책상에 두 번 쳤다.

D+19 · 10:20

회의실에 문건 사본이 놓였다.

정 사무관은 그 숫자를 처음 맞춰본 뒤로 회의실까지 오는 동안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사본을 테이블에 놓으며 그가 한 첫마디는 이랬다.

"저 이거 발견 안 한 걸로 하면 안 됩니까."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그 문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방의 누구보다 먼저, 혼자서, 사십 분쯤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는 걸 무를 수 없어서 가져온 것뿐이었다.

D+19 · 14:00

긴급회의에서 황인선은 오래 말이 없었다. 문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읽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국가가 이미 조사를 했다. 이 필지들이 피해라는 걸 알았다. 구제하자고 건의가 올라갔다. 기각됐다. 문건은 덮였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누군가 그 문건의 인정 목록을 그대로," 그는 잠시 멈췄다. "집행했다."

"집행이라는 표현은 좀."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실행이라든지, 아니면 그냥 삭제라고."

"삭제는 방법이지 뜻이 아니잖아요." 황인선은 문건을 덮었다. "이 목록은 우리가 만든 겁니다. 지운 손만 남의 손이에요."

"본부장님." 남 부장이 끼어들었다. "그 표현이 회의록에 남으면 곤란합니다. 아직 확정된 게 아니고요."

"뭐가 확정이 안 됐습니까."

"문건과 삭제 목록의 동일성이요. 표본 이백 건입니다. 전수 대조가 아직."

"그럼 전수 대조를 오늘 안에 하세요." 황인선이 말했다. "그리고 대조가 끝나면 뭐가 달라지는지도 같이 적어 오시고요."

남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만 확인합시다." 황인선이 방 전체를 봤다. "이 문건 존재를 오늘 처음 안 사람 손 들어보세요."

손이 열몇 개 올라갔다. 다인도 들었다. 스무 명 남짓한 방에서 손이 올라가지 않은 자리가 셋이었다. 셋 다 부장급이었고, 셋 다 서로를 보지 않았다.

황인선은 그 셋을 한 명씩 봤다. 오래 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오후 보고는 제가 올립니다."

회의실의 침묵이 길었다. 범인이 한 일은 서랍을 연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