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1. 개선
지은이 외인 · 2026-08-21
개선식은 조용했다.
왕도의 대로에 사람이 나왔고 꽃도 뿌려졌다. 그런데 소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다가 앞줄이 조용해지면 따라서 조용해졌다.
하일공작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손도 들지 않았다. 정면만 보고 지나갔다.
그 뒤로 브론즈스톰 기사단이 따라갔다.
기수가 든 깃발이 하나 모자랐다.
유리스3세: 고생......했다.
유리스3세가 그렇게 말했다.
옥좌에 앉아 있었는데 몸이 앞으로 기울어 있었다. 손을 무릎에 얹었다가 다시 팔걸이에 얹었다가 했다.
옥좌 옆 낮은 자리에 왕비가 앉아 있었다.
로에나는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다.
한 번도 안 움직였다.
유리스3세: ......고생했어.......
같은 말을 두 번 했다.
하일이 고개를 숙였다.
하일: 폐하.
유리스3세: 그, 아들은.
유리스3세가 그렇게 말하다가 멈췄다.
말을 꺼내놓고 다음을 못 잇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신하들은 그것을 알았고 대개는 기다려주었다.
하일도 기다렸다.
유리스3세: ......찾을 것이다.
한참 뒤에 왕이 말했다.
유리스3세: 짐이 사람을 보내겠다. 강을 다 뒤지게 하겠다. 하류까지 전부.
하일: 감사합니다.
유리스3세: 아니. 그게 아니라.
유리스3세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유리스3세: 미안하다.
하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일: 폐하께서 미안하실 일이 아닙니다.
유리스3세: 아니다.
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리스3세: 내가 너를 그 자리에 보냈다.
로에나가 손을 들었다.
아주 조금 들었다. 무릎에서 손가락 두 마디쯤이었다.
유리스3세가 입을 다물었다.
하일은 그것을 봤다.
왕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 말이 나갔으면 다음 날 왕도에 무엇이 돌았을지, 하일은 알았다.
'.......'
하일이 고개를 숙였다.
하일: 마마.
로에나: 공작.
로에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로에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지요.
하일: 예.
로에나: 댁에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로에나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왕을 보고 있었다.
대전회의는 그날 오후에 열렸다.
케일: 우리가 이겼습니다.
케일 마이론 공작이 말했다.
목소리가 컸다. 회의장 끝까지 잘 들렸다.
케일: 인더가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왜 물러났습니까? 우리가 강해서 물러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론과 이 년째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러난 것뿐입니다.
케일이 회의장을 한 바퀴 둘러봤다.
케일: 바론이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케일: 인더가 돌아옵니다. 그때는 2만이 아니라 15만입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 그러니 지금 쳐야 합니다.
헤링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헤링톤 남작이 물었다. 갈비뼈에 붕대를 감은 채 앉아 있었다.
헤링톤: 인더의 변방을 치자는 말씀이십니까.
케일: 그렇소.
헤링톤: 인더가 15만을 몰고 올 수 있다면서, 그 인더를 먼저 치자는 말씀이십니까.
케일: 지금은 저들이 두 방향을 보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오.
케일이 헤링톤을 봤다.
케일: 남작은 갈비뼈나 붙이시오.
아인스: 불가능합니다.
목소리가 하나 끼어들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아인스 왕자였다. 열여덟이었다.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지 이 년이 되었고 그동안 말을 한 것은 다섯 번이 안 됐다.
케일: 전하.
케일이 몸을 돌렸다.
케일: 어째서 불가능하다 하십니까.
아인스: 병력이 없습니다.
케일: 헤네스에 병력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인스: 헤네스에는 있습니다.
아인스가 말했다.
아인스: 왕가에는 없습니다.
케일: ......
아인스: 인더 변방을 치려면 최소 3만입니다. 왕가 직속 병력은 1만 2천입니다. 나머지 1만 8천은 귀족들의 사병에서 나와야 합니다.
아인스가 회의장을 둘러봤다.
아인스: 여기 계신 분들이 사병을 절반씩 내놓으시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인스: 공작께서 먼저 내놓으시면 나머지 분들도 따르실 것 같습니다만.
케일의 얼굴이 굳었다.
케일: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아인스: 그렇습니다.
아인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아인스: 그래서 셈은 정확히 합니다.
케일은 회의가 끝나기 전에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컸다.
회의장에 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봤다. 게링 자작이 옆 사람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하일공작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의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일이 공작저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진 뒤였다.
현관에 사람이 서 있었다.
세이린이었다.
그 뒤에 마사가 있었고 마사 뒤에 리엔이 있었다.
하일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천으로 싼 것을 들고 걸어왔다.
세이린 앞에 섰다.
천을 풀었다.
검이었다.
날이 상해 있었다.
하일: 부인.
세이린: ......
하일: 받으시오.
세이린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세이린: 안 받습니다.
하일: 부인.
세이린: 그건 아이 것입니다.
세이린이 말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세이린: 아이한테 주십시오.
하일은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뒤에서 소리가 났다.
마사였다.
아론의 유모였다. 젖먹이 때부터 키웠고 걸음마도 마사가 가르쳤다.
마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릎이 꺾여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리엔이 마사를 붙들었다.
하일은 그 셋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밀고 있던 검을 거뒀다.
다시 천으로 쌌다.
하일이 검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리엔의 옆을 지났다.
리엔이 울고 있었다.
소리를 안 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열일곱이었다.
참는 법을 아직 몰랐다.
하일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 애의 머리에 얹었다.
한 번 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갔다.
리엔은 그 자리에 서서 더 울었다.
그날 밤에 리엔은 아론의 방에 들어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창문을 반만 열고 나왔다.
케일의 저택은 왕궁에서 마차로 십오 분 거리였다.
정문에서 안채까지가 다시 오 분이었다.
제킨: 각하.
제킨이 마차 문을 열었다.
제킨: 오늘 온 것들입니다.
케일이 서류 뭉치를 받았다.
그중에 작은 통이 하나 섞여 있었다.
케일: 이건 뭔가.
제킨: 전서구입니다.
케일: 어디.
제킨: 메톤강 하류 수색대입니다.
케일이 그것을 봤다.
케일: 왕궁으로 가는 것 아닌가.
제킨: 오늘 저녁에 갈 겁니다.
케일: ......
케일이 통을 열었다.
종이는 손가락 두 마디 크기였다.
글씨가 아주 작았다.
케일은 그것을 읽었다.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다.
제킨: 각하?
제킨이 물었다.
케일이 종이를 접었다.
케일: 수색이 얼마나 됐지.
제킨: 20일쯤 됐습니다.
케일: 뭘 건졌다고 하던가.
제킨: 시신을 열몇 구 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고.
케일: 그렇지.
케일이 종이를 다시 폈다.
거기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류 사십 리 지점. 갑옷 발견. 공작가 문양 확인. 내용물 없음.'
케일: 제킨.
제킨: 예.
케일: 갑옷을 벗은 시체를 본 적이 있나.
제킨: ......예?
케일: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스스로 갑옷을 벗나.
제킨이 잠깐 생각했다.
제킨: ......아.
케일: 수색을 접게 만들어라.
케일이 종이를 촛불에 댔다.
케일: 왕의 이름으로.
제킨: 그, 폐하께서 승낙하시겠습니까?
케일: 승낙 안 하실 거야.
종이가 탔다.
케일: 그러니까 승낙하시게 만들어야지.
제킨이 나가고 나서 케일은 창가에 섰다.
밖이 어두웠다.
'살아 있다.'
케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몇 번 더 굴렸다.
살아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하류 사십 리는 데던산 초입이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면 죽었을 것이다. 열여섯짜리 공자가 데던산에서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죽었을 것이다.
'.......'
케일은 촛불을 봤다.
죽었을 것이다. 아주 높은 확률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가 없었다.
케일이 삼십 년 동안 살아남은 방식은 하나였다.
시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케일: ......제킨.
문 밖에서 발소리가 돌아왔다.
제킨: 예, 각하.
케일: 루디에 사람을 하나 보내라.
제킨: 루디시 말씀이십니까?
케일: 용병길드에.
제킨: ......무슨 의뢰를 넣을까요.
케일이 창에서 돌아섰다.
케일: 아직 아니다.
제킨: 예?
케일: 길을 터놓기만 해.
케일이 자리에 앉았다.
케일: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문이 열렸다.
셀비아: 아버지.
딸이었다.
셀비아는 열다섯이었다. 자기 전에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것이 이 집의 규칙이었고, 그 규칙을 만든 것은 케일이었다.
케일: 들어와라.
셀비아가 들어왔다.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다.
셀비아: 아버지.
케일: 그래.
셀비아: 오늘 학교에서 그러던데요.
케일: 뭐라고 하더냐.
셀비아: 에르세느스가 공자님이 돌아가셨대요.
케일이 딸을 봤다.
케일: ......그렇다더구나.
셀비아: 진짜예요?
케일: 시신이 없다.
셀비아: 그럼 안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케일이 잠깐 조용했다.
케일: 셀비아.
셀비아: 예.
케일: 방금 그 말을.
셀비아: ......
케일: 밖에서 하지 마라.
셀비아가 아버지를 봤다.
셀비아: 왜요?
케일이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케일: 어른들 일이다.
셀비아가 나갔다.
문이 닫혔다.
케일은 문을 한참 봤다.
'시신이 없다.'
열다섯짜리도 아는 것이었다.
케일은 그날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