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두 개의 태양
지은이 외인 · 2026-08-21
눈을 떴다.
해가 두 개였다.
기훈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여전히 두 개였다.
'.......'
한 번 더 감았다. 이번에는 좀 오래 감았다. 열까지 셌다.
떴다.
두 개.
기훈은 포기했다.
등에 자갈이 배겼다.
그러니까 죽은 건 아니다. 죽으면 자갈이 안 배긴다. 아마도.
기훈은 그대로 누워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하나, 죽었다. 이건 확실하다. 물이 목까지 찼고 폐가 탔고 왼팔이 납작해졌다.
둘, 살아 있다. 이것도 확실하다. 자갈이 배기니까.
셋, 해가 두 개다.
'.......'
정리가 안 됐다.
기훈은 팔을 들어보았다.
왼팔이었다.
멀쩡했다.
접었다 폈다. 두 번 했다. 세 번째는 안 했다. 세 번 하면 뭔가 진지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멀쩡하네.'
멀쩡했다.
멀쩡한데 자기 손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길었다. 마디가 가늘었다. 손톱이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었다.
기훈의 손은 그렇게 안 생겼다. 열두 해 동안 사람을 발로 차고 손으로 친 손은 그렇게 안 생긴다.
기훈은 그 손을 오래 보았다.
'누구 손이지.'
물가로 기어갔다.
걷지 않고 기어간 것은 아직 일어설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기어가는 게 편했다. 인간은 원래 네 발로 다녔다.
강물은 맑았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물 위에 소년이 있었다.
열대여섯쯤. 갈색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왔다. 눈이 크고 코가 오뚝했다. 얼굴이 하얬다.
잘생겼다.
기훈은 물에서 얼굴을 뺐다.
숨을 한 번 쉬었다.
다시 넣었다.
여전히 있었다.
아론: ......누구세요.
소년도 똑같이 말했다. 목소리가 높고 얇았다.
기훈은 물에서 얼굴을 빼고 자갈밭에 도로 누웠다.
두 번째 해가 눈부셨다.
기억을 뒤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있었다.
자기 기억을 떠올리는 자리에, 남의 인생이 통째로 들어와 있었다.
아론 아르네이트 에르세느스.
헤네스 왕국 하일공작의 외아들. 열여섯 살.
기훈은 그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발음이 어려웠다. 아론까지는 괜찮은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아르네뭐.'
기억을 조금 더 뒤졌다.
정보가 쏟아졌다.
하인즈에서 사 년째 공부 중. 필기 성적 늘 첫째. 문장학 우수. 대륙사 우수. 수사학 우수. 셈법 우수. 검술 이론 우수.
'오.'
기훈은 잠깐 감탄했다.
검술 실기 최하위.
'.......'
승마 상급. 무도 상급. 음악 상급.
체력 최하위. 근력 최하위. 지구력 최하위.
'.......'
매운 것을 못 먹음. 겨울에 손이 잘 틈.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픔.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기훈은 뒤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이 몸의 주인은 아론이라는 애다. 열여섯이고 공작 아들이고 머리가 좋다. 그리고 몸은 못 쓴다. 아주 못 쓴다.
어제 전장에서 죽었다.
그 기억도 있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 같지 않았다. 겪은 것이었다. 절벽에서 떨어질 때의 공포가 자기 것처럼 생생했다. 손가락이 부러지던 감각도 그랬다.
그런데 자기가 아론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자아는 기훈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다만 그 옆에 인생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쪽이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었다.
기훈은 팔로 눈을 덮었다.
'하필.'
어제 그 전장에서만 몇천이 죽었을 것이다. 이 세상 전체로 치면 몇만은 될 것이다.
'하필 이런 애로.'
검을 두 합에 놓친 애다.
울면서 도망친 애다.
열여섯 해 동안 몸으로 한 일이라고는 말 타고 산책한 게 전부인 애다.
기훈은 웃었다.
웃음이 나온 건 아니었다. 웃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아서 웃었다.
'그래도 팔은 멀쩡하네.'
그건 사실이었다.
갑옷부터 벗었다.
허리 조임쇠를 풀고 어깨끈을 벗겨내는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론의 몸이 알고 있었다.
편했다.
다 벗고 나서 갑옷을 들어보았다.
무거웠다.
'이걸 입고 뛰었다고?'
죽을 만했다.
기훈은 갑옷을 자갈밭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한 번에 됐다.
그런데 시야가 높았다.
기훈은 백칠십오였다. 이 몸은 그보다 컸다. 한 오 센티쯤.
'열여섯인데?'
더 클 것이다.
기훈은 잠깐 기분이 좋아졌다.
'키는 이득이네.'
한 발 내디뎠다.
멀리 갔다.
'.......보폭도 다르구나.'
두 발. 세 발.
열 발쯤 걷고 나서야 몸이 조금 익었다. 기훈은 다리를 털고 어깨를 돌리고 목을 좌우로 꺾었다.
준비운동이 끝났다.
그러면 확인을 해봐야 한다.
기훈은 왼발을 축으로 삼고 오른발을 들었다.
앞차기.
제일 기본이다.
제일 안 다치는 동작이다.
허벅지에서 소리가 났다.
아론: 악.
기훈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론: 악. 아. 아악.
허벅지 안쪽이 불에 데인 것 같았다. 손으로 눌러보니 근육이 돌처럼 뭉쳐 있었다.
기훈은 자갈밭에서 잠시 뒹굴었다.
스트레칭이라고는 평생 해본 적 없는 몸이었다.
유연성이 영이 아니라 마이너스였다.
아론: ......하아.
기훈은 누운 채로 하늘에 대고 욕을 했다.
한국말로 했다.
이상하게도 그건 자기 목소리처럼 들렸다.
정신을 차린 뒤 기훈은 세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 이 몸은 약하다.
둘, 이 몸은 안 굽는다.
셋, 그런데 힘은 세다.
셋째는 우연히 알았다.
앉으려고 짚은 바위가 밀렸기 때문이다.
기훈은 그 바위를 보았다. 사람 상체만 했다.
다시 밀어보았다.
밀렸다.
두 손으로 잡았다.
들렸다.
기훈은 바위를 든 채로 서 있었다. 팔이 떨렸다. 근육이 없으니 오래는 못 든다. 그건 알겠다.
문제는 애초에 이 팔로 이게 들린다는 것이다.
바위를 내려놓았다.
'뭐지.'
아론의 기억을 뒤졌다.
아론은 힘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열여섯 해를 놀림받았다. 검을 들면 손목이 흔들렸고 활을 당기면 시위가 반도 안 당겨졌다.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지금이 이상했다.
기훈은 답 찾기를 그만두었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오래 붙잡는 건 시간 낭비다.
그건 스물두 해 동안 배운 몇 안 되는 확실한 교훈이었다.
'좋은 거니까 됐고.'
문제는 여기가 어디냐는 것이었다.
기훈은 다시 기억을 뒤졌다.
이번에는 좀 조심스럽게 뒤졌다. 남의 서랍 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메톤강.
절벽 위에서 떨어졌으니 여기는 그 아래 어딘가다. 물살에 얼마나 떠내려왔는지는 모른다.
메톤강에 관해 아론이 아는 것은 세 가지였다.
하나, 사람들이 죽음의 강이라고 부른다.
둘, 상류는 절벽이라 못 올라간다.
셋, 하류로 가면 데던산이 나온다.
데던산에 관해 아는 것은 더 간단했다.
몬스터의 천국.
들어가서 나온 기록 없음.
'.......'
기훈은 상류를 보았다.
물이 굽어 도는 곳 너머로 절벽이 보였다. 까마득했다.
하류를 보았다.
숲이었다.
'선택지가 없네.'
정확히는 있었다.
여기서 굶어 죽는 선택지가.
기훈은 갑옷을 다시 보았다.
입으면 무겁고 안 입으면 위험하다.
잠깐 고민하다가 흉갑만 챙기기로 했다. 나머지는 두고 갔다.
무기는 없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놓쳤다. 그 기억은 아주 선명했다. 검이 손에서 튕겨 나가 삼 미터쯤 날아가 흙에 박혔다.
기훈은 혹시나 해서 아론의 기억을 뒤졌다.
검술 기본형 스물세 가지가 나왔다.
순서와 각도와 그것이 어느 상황에서 왜 유효한지까지 전부 있었다. 제3형은 상대가 위에서 내려올 때, 제7형은 상대가 옆에서 들어올 때, 제12형은 상대가 둘 이상일 때.
'.......'
검이 없는데.
'이걸 왜 이렇게 잘 외우고 있냐고.'
기훈은 강가를 훑었다.
부러진 창 자루가 하나 걸려 있었다. 주워서 흔들어보니 반으로 갈라졌다.
방패 조각이 있었다. 손잡이가 없었다.
가죽끈이 있었다. 가죽끈으로 뭘 하겠는가.
'.......'
기훈은 빈손으로 다시 걸었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가슴이 아팠다.
기훈은 멈췄다.
심장 쪽이 아니었다. 그보다 위였고 안쪽이었다. 숨 쉬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뭐지.'
원인을 찾다가 알았다.
방금 아론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강가에 서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표정이 없었다.
아버지였다.
정확히는 아론의 아버지였다.
기훈은 그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또 아팠다.
'.......'
기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목소리도 모르고 성격도 모른다. 아론의 기억에 있는 정보라고는 대륙 최강의 검사이고 말수가 적고 웃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그 얼굴을 떠올리면 아팠다.
보고 싶었다.
만난 적도 없는 남자를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기훈은 무릎에 팔을 얹고 앉아 있었다.
기훈에게도 사람은 있었다.
김 관장이 있었다. 관비를 대주고 원정비를 대주고 자기 차로 대회장까지 태워다 준 사람이다.
오 중사가 있었다. 훈련 끝나고 두 시간씩 굴려놓고는 제대할 때 종이 한 장을 쥐여준 사람이다.
사라루시아 수녀가 있었다. 스물두 해 동안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정아 누나가 있었다. 네 살 위였고, 열여섯에 원생 열넷의 밥을 지었고, 지금은 대구에서 미용실을 한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그중 누구를 떠올려도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고마운 것과 아픈 것은 다른 것이었다.
기훈은 그 차이를 스물두 해 동안 몰랐다.
없는 것을 그리워할 수는 없다.
그는 부모가 없었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슬프려면 잃어야 하는데 애초에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팠다.
'.......웃기네.'
기훈은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눈물은 안 났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자기 아버지가 아니다.
다만 아팠다.
그게 전부였다.
소리가 났다.
기훈은 걸음을 멈췄다.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였다. 왼쪽이었다.
그리고 오른쪽에서도 났다.
'.......'
기훈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늑대가 있었다.
'아.'
크다는 게 첫 번째 생각이었다.
어깨높이가 허리쯤 왔다. 그러니까 저게 서면 자기 가슴까지 온다. 주둥이가 길고 이빨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털이 젖어 있었고 뭔가 검은 것이 입가에 말라붙어 있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 그리고 정면 조금 뒤에 하나.
세 마리가 반원으로 벌어졌다.
기훈은 그것을 보면서 아주 이상한 것을 느꼈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
떨라고 한 적이 없었다.
기훈은 자기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이 저 혼자 오그라들고 있었다.
'내 다리가 아닌데.'
그 순간 알았다.
아론이었다.
이 몸은 겁쟁이였다. 열여섯 해 동안 겁쟁이로 살았고, 그 열여섯 해가 근육에 배어 있었다. 정신이 바뀌었다고 몸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기훈은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진정해.'
진정이 안 됐다.
가운데 늑대가 한 걸음 나왔다.
기훈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서면 안 됐다.
물러서는 순간 오른쪽 늑대가 옆으로 돌았다. 짐승은 계산을 안 한다. 다만 안다. 저것이 도망칠 것을 안다.
'.......'
무기가 없었다.
돌아보니 나무가 있었다. 올라갈까. 저것들이 나무를 못 타면. 그런데 저 발톱이면 탈 것 같은데.
강. 강으로 뛸까. 헤엄을 칠 수 있나. 저것들은 못 치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아론의 머리였다. 이 몸은 위기에 처하면 계산이 빨라진다. 그게 열여섯 해 동안 그를 살려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계산이 지금 내놓은 답은 하나였다.
'.......죽었네.'
늑대가 뛰었다.
기훈은 옆으로 굴렀다. 굴렀다기보다 넘어졌다. 다리가 풀려서 서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게 그를 살렸다.
이빨이 지나간 자리에 그의 목이 있었어야 했다.
아론: 어, 어.
기훈은 네 발로 기어서 물러섰다.
두 번째가 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이빨이 왼팔에 박혔다.
아론: 아악!
뜨거웠다.
찢어지는 것도 아니고 뚫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뜨거웠다. 그리고 그다음에 아팠다. 아픈 게 아니라 아프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늑대가 목을 흔들었다.
몸이 딸려갔다.
땅에 얼굴이 갈렸다.
'아.'
이번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상했다. 죽어본 적이 있는데도 무서웠다. 아니, 죽어봤기 때문에 더 무서웠다. 그때는 순식간이었고 선택지가 없었다.
지금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세 번째 늑대가 뛰었다.
기훈은 그것을 보았다.
입이 벌어져 있었다. 위쪽 이빨이 네 개, 아래쪽이 네 개. 그 안쪽까지 다 보였다.
그리고 몸이 움직였다.
기훈이 시킨 게 아니었다.
열두 해 동안 하루에 몇백 번씩 반복한 동작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다리에 새겨진 것이었다. 무엇이 얼굴 높이로 날아오면 몸이 알아서 축을 세우고 무릎을 접었다가 편다.
오른발이 나갔다.
퍽.
소리가 짧았다.
기훈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늑대가 없었다.
정확히는 저쪽에 있었다.
사 미터쯤 떨어진 나무 밑동에 처박혀 있었다. 옆구리가 이상한 모양으로 꺾여 있었고 다리가 한 번 경련하더니 멈췄다.
기훈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오른발을 보았다.
아론: ......어?
왼팔에 박혀 있던 늑대가 입을 놓았다.
기훈이 그쪽을 봤다.
늑대도 그를 봤다.
둘이 잠깐 눈이 마주쳤다.
늑대가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두 걸음.
남은 한 마리도 물러섰다. 그리고 나무 밑동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기훈을 봤다.
기훈은 여전히 네 발로 엎드린 채였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기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아까와 같은 떨림이었는데 이번에는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한 발 내디뎠다.
늑대들이 도망쳤다.
늑대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기훈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확히는 다리가 접혔다.
아론: ......하.
숨이 안 쉬어졌다. 아까부터 안 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훈은 몇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손이 계속 떨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기훈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토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나올 것도 없었다. 그래도 몇 번 더 했다.
한참 뒤에 기훈은 소매로 입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왼팔이 엉망이었다. 구멍이 네 개 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꽤 깊었다.
그리고 나무 밑동을 봤다.
늑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기훈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컸다. 옆구리가 통째로 함몰되어 있었다.
기훈은 그것을 한참 보다가 자기 오른발을 다시 봤다.
앞차기였다.
힘도 제대로 못 실었다. 축이 흔들렸고 무릎이 덜 펴졌다. 도장 애들이 저렇게 찼으면 관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
기훈은 발끝으로 땅을 두어 번 툭툭 찼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아론: ......어, 나 강한데?
목소리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기훈은 늑대 옆에 앉아서 한참 쉬었다.
일어날 힘이 없었다.
발끝에 뭔가 걸렸다. 돌이었다. 주먹만 했다.
기훈은 그걸 주워서 손에 얹어보았다. 무게가 적당했다.
저만치 나무를 봤다.
던졌다.
퍽 소리가 나면서 돌이 나무에 박혔다.
박혔다.
기훈은 그 나무를 한참 보았다.
'.......이것도 되네.'
그날 밤 기훈은 나무 아래에 불을 피웠다.
부싯돌은 없었다.
대신 아론의 기억에 마른 나뭇가지를 비비는 방법이 있었다. 책에서 읽은 것이었다.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 지식이었다.
두 시간이 걸렸다.
기훈은 불을 피우면서 아론에게 몇 마디 했다.
아론: 야.
대답은 없었다.
아론: 이론만 알면 어떡하냐고.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기훈은 불을 보면서 왼팔을 살폈다.
찢어진 자리가 아물고 있었다.
반나절 만이었다.
그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뭐, 좋은 거니까.'
기훈은 그렇게 정리했다.
정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기훈은 손가락을 하나 폈다.
하나, 여기서 죽는다. 굶어 죽거나 뭐한테 먹히거나. 가능성이 제일 높다.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둘, 데던산을 넘는다. 넘으면 사람 사는 데가 나온다. 아론의 기억에 따르면 그렇다. 넘은 기록은 없다.
세 번째 손가락은 펴지 않았다.
세 번째가 없었다.
기훈은 손을 내렸다.
'집에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조금 멈칫했다.
집.
기훈에게 집은 없었다.
방 한 칸이 있었고 거기 아무도 없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그걸 집이라고 불러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방금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론의 기억에 있는 집이었다.
왕도 서쪽. 정원에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서고 창문에서 그 나무가 보인다. 겨울이면 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늦게 들어왔다.
들어와서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론은 그 발소리를 알았다.
기훈은 불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 가면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하면 관계가 생긴다.
관계가 생기면 잃을 것이 생긴다.
기훈은 스물두 해 동안 그런 걸 안 만들면서 살았다. 그게 편했다.
그런데 가슴이 아팠다.
낮에 한 번 아팠고 지금도 조금 아팠다.
기훈은 그게 뭔지 알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아버지를 만나서 뭘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아들 노릇을 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이 통증이 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하고 나면 정리가 될 것이다.
그의 인생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정리되어 왔다.
'가서 얼굴만 보고 오자.'
기훈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는, 그때는 몰랐다.
불이 사그라들 무렵 기훈은 하늘을 보았다.
달이 두 개였다.
기훈은 기억을 뒤졌다.
달은 두 개가 맞았다. 큰 것과 작은 것.
그리고 낮에 본 두 번째 해는 해가 아니었다.
작은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