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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두 번의 죽음

지은이 외인 · 2026-08-21

웨인: 공자님. 여기 계십시오.

웨인이 아론을 언덕 뒤로 밀어넣었다.

웨인: 둘이 붙어라. 절대 떨어지지 마라.

스테인: 예.

웨인: 공자님께 뭐가 닿으면 그때는 너희 목이 아니라 내 목이 날아간다.

웨인이 말을 돌려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흙먼지가 잠깐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아론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무릎이 자꾸 꺾이려 했다. 그런데도 검끝이 흙에 박히지 않게 각도를 맞추고 있었다. 검을 흙에 박으면 날이 상한다. 배웠다.

배운 건 많았다.

아버지는 대륙 최강의 검사였고, 아론은 그 아들이었으며, 학교에서 필기 성적은 늘 첫째였다. 검술 이론도 첫째였다. 스물세 가지 기본형의 순서와 각도와 그것이 어느 상황에서 왜 유효한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웠다.

문제는 몸이었다.

아론: 으윽.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 정도 자존심은 있었다.

멀리서 소리가 났다.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좌익이 밀리고 있다.

스테인: 공자님.

인더의 기병이 왼쪽을 돌아 들어왔다. 그쪽을 맡은 건 헤링톤 남작의 부대다. 하지만 남작은 어제 갈비뼈가 나갔다. 지금 지휘하는 건 부관. 실전 경험은 세 번뿐이다.

무너진다.

좌익이 무너지면 중앙이 노출된다. 중앙이 노출되면 본진 앞이 빈다. 아버지가 우익에서 돌아오는 데는 말을 달려도 이십 분.

좌익이 완전히 무너지는 데는 십오 분.

'모자라.'

계산이 끝난 뒤에야 아론은 자신이 계산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계산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도.

스테인이 다급하게 불렀다.

언덕 위로 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주.

인더 제국의 황실 근위였다.

아론은 그 문양을 알고 있었다. 문장학 교재 백열두 쪽. 황실 직속 기사단의 문장이다.

여덟.

아니, 아홉이다.

맨 뒤에서 한 기가 더 넘어왔다. 그자만 투구를 쓰지 않았다.

아론의 시선이 잠시 왼쪽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이쪽까지 적이 들어올 수 없었다. 헤링톤 남작의 부대는 왕국군에서도 제법 이름난 정예였다. 적도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들어왔다.

헤링톤 남작이 없다는 걸 알았거나.

아니면 싸워 보고 알아챘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검은 기병 아홉이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투구를 쓰지 않은 남자가 아론을 발견했다.

고삐를 당기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뜻밖에도 웃었다.

인더 장수: 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더 장수: 뭐야, 애가 하나 있네.

스테인과 베린이 동시에 움직였다. 말할 시간도 없었다.

스테인이 왼쪽 셋을 맡았다. 첫 번째 근위의 창을 흘리면서 말 앞다리를 베었다. 말이 무너지며 기수가 굴러떨어졌고 그 위로 검이 떨어졌다. 두 번째가 달려들었을 때 스테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베린은 오른쪽이었다. 그는 방패가 없었다. 대신 창 자루를 잡고 기수를 통째로 끌어내렸다. 갑옷 입은 사내 하나가 그대로 흙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스테인: 베린! 오른쪽 더 있다!

베린: 압니다!

브론즈스톰이었다.

헤네스에서 브론즈스톰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나이대 검사 300명 중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300명은 이미 다른 3000명을 이기고 올라온 자들이다.

인더 근위 아홉 중 넷이 흙바닥에 있었다.

아론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이길 수 있나.'

계산이 다시 돌아갔다. 스테인은 왼쪽 둘을 남겼고 베린은 오른쪽 셋을 남겼다. 둘 다 아직 숨이 고르다. 시간을 끌면 웨인이 돌아온다. 이길 수는 없어도 버틸 수는 있다.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아홉 번째 남자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고 그냥 걸어왔다. 스테인의 옆을 지나고, 베린의 뒤를 지나서.

스테인: 공자님!

스테인이 몸을 돌렸다.

돌리면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상대하던 근위의 검이 등을 갈랐다. 스테인은 그래도 손을 뻗었다. 손끝이 남자의 망토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인더 장수: 이런.

남자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인더 장수: 충성스럽네.

베린: 공자님! 도망치십시오! 어서!

베린이 소리쳤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남은 셋이 그를 붙잡았다. 하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도 둘이 남았다.

베린은 그 둘을 뚫지 못했다.

십 미터였다.

십 미터를 두고 베린은 그 십 미터를 갈 수 없었다.

인더 장수: 자, 그럼.

남자가 아론 앞에 섰다.

아론은 검을 들었다.

들었다기보다 팔이 그렇게 움직였다. 스물세 가지 기본형 중 세 번째. 상대가 위에서 내려올 때 쓰는 자세. 왼발이 반 보 앞, 검끝은 눈높이, 팔꿈치는 몸에 붙이고.

정확했다.

인더 장수: 호. 자세는 제법인데.

남자가 한 번 쳤다.

아론의 검이 손에서 튕겨 나갔다. 손목이 뒤로 꺾였고 손가락 두 개가 부러진 것 같았다. 검이 삼 미터쯤 날아가 흙에 박히는 것이 보였다.

날이 상하겠다고, 아론은 생각했다.

인더 장수: 어어? 이건 뭐야.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인더 장수: 자세만 알고 힘이 없네. 야, 너 누구한테 배웠냐.

아론은 뒤로 물러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인더 장수: 어허.

남자가 따라왔다. 서두르지 않았다.

인더 장수: 으하하. 바보 공자, 도망가기냐?

아론은 뛰었다.

품위 같은 건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또 뛰었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남자는 걷고 있는데도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베린: 공자님!

베린의 목소리였다.

아론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다. 다리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

발밑이 사라졌다.

'왜 나는…'

아론은 자기가 절벽 끝까지 뛰었다는 걸 몸이 허공에 뜬 다음에야 알았다.

메톤강이었다. 사람들이 죽음의 강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절벽은 삼십 미터가 넘고 물살은 빠르고 하류에는 데던산이 있다. 빠지면 익사하거나, 익사하지 않으면 먹힌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아는 게 참 많았다.

물이 다가왔다.

'아버지.'

그리고 십 미터 뒤에서, 두 사람을 상대하던 베린이 그것을 보았다.

그는 그날의 나머지를 평생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절벽 끝에서 무언가가 사라지던 그 한 순간만은, 십 년이 지나도 어제처럼 보였다.

하일 아인트 지 에르세느스가 도착한 것은 십칠 분 뒤였다.

그는 우익에서 이백 명을 뚫고 왔다. 갑옷이 붉었는데 그게 원래 색이 아니라는 것을 부하들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언덕은 조용했다.

인더 근위 여섯이 흙에 누워 있었다. 헤네스 기사는 둘이었다. 스테인은 엎드린 채였고 손이 앞으로 뻗어 있었다. 무언가를 잡으려던 자세 그대로였다.

베린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병사들이 그를 들어 올리려 하자 그가 손을 저었다.

베린: 저쪽입니다.

그가 절벽 쪽을 가리켰다.

베린: 저쪽으로....... 공자님이.......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 너머에 검 한 자루가 흙에 박혀 있었다.

하일은 말에서 내려 그것을 뽑았다. 아들의 검이었다. 열다섯 살 생일에 준 것이고, 손잡이에 이름을 새겼으며, 무게를 아들의 팔에 맞춰 특별히 낮춘 것이었다.

날이 상해 있었다.

한스: 각하.

한스가 뒤에 와서 섰다.

한스: 절벽입니다. 강으로 떨어지셨다고 합니다.

하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절벽 끝까지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물살이 빨랐다. 흰 거품이 바위에 부딪혔다가 흩어지고 다시 부딪혔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하일: 한스.

한스: 예, 각하.

하일: 내려가라.

한스: ......각하.

하일: 시체라도 좋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하일: 찾아와라. 부탁한다.

*** *** ***

버스가 흔들렸다.

기훈은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금속이 자꾸 허벅지를 눌렀다. 아침에 목에 걸었다가 사진 몇 장 찍고 벗어둔 것이었다.

정아 누나한테 사진을 보낼까 하다가 말았다.

보내면 답이 올 텐데, 그 답에 또 답을 해야 했다.

기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건 생각해봐야 답이 안 나온다는 걸 스물 두 해 동안 배웠으니까.

창밖으로 논이 지나갔다. 물이 차 있어서 하늘이 두 개로 보였다.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기훈은 그걸 잠깐 보다가 눈을 감았다.

펑.

버스운전사: 이런.

기사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버스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중앙선을 넘었다.

버스운전사: 손잡이 잡으세요. 다들 손잡이.

기훈은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사고가 나면 목이 제일 위험하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였다.

타이어가 도로를 긁는 소리가 났다.

길게, 아주 길게.

그리고 멈췄다.

기우뚱.

버스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승객: 악! 으악!

여기 저기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기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도로가 없다.

절벽이다.

난간을 들이받은 버스의 앞 바퀴 하나가 도로 밖으로 빠져 있었다.

차체 절반이 난간에 걸친 채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있다.

그 아래로 강물이 아득하게 흘렀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그때 경적이 울렸다.

아주 가까이서.

맞은편에서 트레일러가 오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밟아 앞바퀴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저 무게가 저 속도로 오면 멈추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기훈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아.'

생각할 시간은 그게 전부였다.

쾅!

충격이 소리보다 먼저 왔다.

세상이 돌았다. 천장이 바닥이 되었다가 다시 천장이 되었다. 유리가 쏟아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끊겼다.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다시 부딪혔다. 그때마다 소리가 났는데 그게 자기 몸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기훈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리고 낙하.

물소리.

차가웠다.

기훈은 눈을 떴다. 물속이었다. 버스가 뒤집힌 채 가라앉고 있었고 깨진 창으로 물이 밀려들어 왔다. 어두웠다. 위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려고 했다.

왼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좌석 프레임이 무너져 내려서 팔을 짓누르고 있었다. 짓눌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팔이 원래 그런 두께였던 것처럼 납작했다.

기훈은 그것을 한참 보았다.

물이 목까지 찼다.

숨이 막혔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몸이 멋대로 발버둥을 쳤고 기훈은 그걸 멈출 수 없었다.

'이제 태권도는 못 하겠네.'

이상하게도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억울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애초에 붙잡고 있던 게 별로 없었다.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