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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지은이 허균 · 2026-08-25

한편 홍 승상은 나이 아흔에 이르러 오래 병을 앓았다.

가을 구월 보름에 병세가 더욱 무거워지자 부인과 맏아들 길현을 불러 말했다.

“내 나이 아흔이라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다만 길동이 비록 천한 첩에게서 난 자식이나 또한 내 피붙이다.”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임종에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가 죽은 뒤에라도 길동의 어미를 잘 대접하여 편히 지내게 하라.”

“부디 뒷일을 생각하여, 만일 길동이 돌아오거든 천한 종의 자식으로 여기지 말라.”

“한배에서 난 형제처럼 대하여 부모의 유언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고는 길동의 어미를 불러 가까이 앉으라 하고,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은, 길동이 나간 뒤로 소식이 끊겨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도 이토록 생각이 간절한데, 네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

“길동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다. 만일 살아 있다면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부디 몸을 가볍게 버리지 말고 잘 보전하여 지내라.”

“내 저승으로 돌아가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말을 마치자 곧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기절하고 좌우가 모두 망극하여 곡소리가 진동했다.

길현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이 비 오듯 흘렀다.

그러면서도 부인을 붙들어 위로하고 진정시킨 뒤, 초상 절차를 예법에 따라 극진히 치렀다.

길동의 어미는 더욱 망극하여 애통해하니, 그 모습이 애처로워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졸곡을 마친 뒤 명당을 구하여 장사 지내려 했다.

각처에 사람을 놓고 여러 지관을 데리고 사방으로 산자리를 구했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근심했다.

그때 길동이 서강에 다다라 배에서 내려 승상 댁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장 승상의 영위 앞으로 들어가 엎드려 통곡했다.

상주가 자세히 보니 바로 길동이었다.

크게 통곡한 뒤 길동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부인께 아뢰었다.

부인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엉킨 채 길동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네가 어려서 집을 떠나 이제야 들어오니, 지난 일을 생각하면 도리어 부끄럽구나.”

“그런데 그 삼사 년 동안은 종적을 아주 끊고 어디로 갔더냐?”

“대감께서 임종하실 때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시며 너를 잊지 못한 채 돌아가셨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길동의 어미를 불렀다.

그 어미가 길동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들어와 모자가 서로 마주하니, 흐르는 눈물을 서로 금하지 못했다.

길동은 부인과 어머니를 위로한 뒤 형에게 말했다.

“제가 그동안 산중에 은거하며 지리를 깊이 공부하였습니다.”

“대감의 산소 자리를 정해 둔 곳이 있사온데, 혹 이미 정하신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워하며,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밤새도록 회포를 풀었다.

이튿날 길동은 형을 모시고 한곳에 이르러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제가 정한 자리입니다.”

길현이 사방을 둘러보니 겹겹의 바위가 험악하고, 오래된 무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말했다.

“아우의 높은 소견은 모르겠으나, 내 마음에는 이곳에 모실 생각이 없다.”

“다른 땅을 골라 보아라.”

길동이 짐짓 탄식했다.

“이 땅이 비록 이러하나 대대로 정승과 장군이 날 자리입니다.”

“형님의 소견에 맞지 않으시니 안타깝습니다.”

그러고는 도끼를 들어 몇 자를 파냈다.

그러자 오색 기운이 피어오르며 푸른 학 한 쌍이 날아올랐다.

형이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뉘우쳐 길동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못난 형의 소견 탓에 저런 큰 땅을 잃었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느냐.”

“바라건대 다른 땅은 없느냐?”

길동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