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지은이 허균 · 2026-08-25
“꿈에도 생각지 못한 흉적을 만나 목숨이 끊기게 되었다.”
“너희는 이놈을 놓치지 말고 내 원수를 갚아라.”
그러고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울동들이 일시에 칼을 들고 달려 나오며 꾸짖었다.
“내 형을 무슨 죄로 죽였느냐! 내 칼을 받아라!”
길동이 차갑게 웃었다.
“제 명이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내가 어찌 죽였겠느냐.”
울동들이 크게 노하여 칼을 들어 길동을 치려 했다.
길동도 맞서려 했으나 손에 한 자 칼도 없었다.
형세가 위급하여 몸을 날려 공중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울동은 본디 몇만 년 묵은 요괴라, 바람과 구름을 부리고 조화가 끝이 없었다.
무수한 요괴가 바람을 타고 뒤쫓아 올라왔다.
길동은 하는 수 없이 육정육갑을 불렀다.
문득 공중에서 무수한 신장이 내려와 울동들을 모두 결박하여 땅에 꿇렸다.
길동은 그놈들이 쥐고 있던 칼을 빼앗아 울동을 남김없이 베었다.
그러고는 안으로 들어가 여자 세 명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여자들이 울며 말했다.
“저희는 요괴가 아닙니다.”
“불행히도 요괴에게 붙잡혀 와, 죽으려 해도 틈을 얻지 못해 죽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길동이 그 여자들의 이름을 물었다.
하나는 낙천현 백용의 딸이었고, 나머지 둘은 정씨와 조씨 두 사람의 딸이었다.
길동은 세 여자를 데리고 돌아와 백용을 찾아 이 일을 이야기했다.
백용은 평생 아끼던 딸을 되찾자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천금을 들여 큰 잔치를 벌이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홍생을 사위로 삼았다.
칭찬하는 소리가 온 고을에 진동했다.
또 정씨와 조씨 두 사람도 홍생을 청하여 사례했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저마다 딸을 드려 소실로 삼게 하겠습니다.”
길동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부부의 정을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세 부인을 맞아 가까이하니, 그 정이 아교와 옻처럼 굳어 비할 데가 없었다.
백용 부부도 사랑함을 이기지 못했다.
이윽고 길동은 세 부인과 백용 부부, 그리고 일가친척을 모두 거느리고 제도로 들어갔다.
군사들이 강변까지 나와 맞이하며 먼 길을 무사히 오신 것을 위로했다.
호위하여 제도 안으로 들어와 큰 잔치를 벌이고 즐겼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 제도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삼 년이 되었다.
어느 날 길동이 달빛을 사랑하여 달 아래를 거닐다가 문득 하늘의 별자리를 살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될 것을 알고 길게 통곡했다.
백씨가 물었다.
“낭군께서는 평소 슬퍼하시는 일이 없더니, 오늘은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십니까?”
길동이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불효자요.”
“나는 본디 이곳 사람이 아니라 조선국 홍 승상의 천첩에게서 난 자식이오.”
“집안에서 천대가 심하고 조정에도 나갈 수 없어, 대장부의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부모를 하직한 뒤 이곳에 몸을 숨겼소.”
“그러면서도 부모의 안부를 늘 사모하였는데, 오늘 하늘을 살피니 아버님의 목숨이 머지않아 다하실 것이오.”
“내 몸이 만 리 밖에 있어 미처 다다르지 못하니, 살아 계실 때 아버님 앞에 뵙지 못하게 되었소.”
“그것이 슬프오.”
백씨가 듣고 마음속으로 탄복했다.
‘그 근본을 감추지 않으니 참으로 장부로다.’
그러고는 두 번 세 번 위로했다.
그때 길동은 군사를 거느리고 일봉산에 들어가 산세를 살펴 명당을 정했다.
날을 가려 공사를 시작하여, 좌우의 산골짜기와 무덤 자리를 임금의 능처럼 꾸몄다.
그러고 돌아와 군사들을 불러 말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큰 배 한 척을 준비하여 조선 서강에 와서 기다려라.”
“부모님을 모셔 올 것이니 미리 알아 거행하라.”
군사들이 명을 받들고 물러가 준비했다.
이날 길동은 백씨와 정씨·조씨 두 사람에게 하직하고, 작은 배 한 척을 재촉하여 조선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