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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지은이 한용운

대철이 돌아간 뒤에도 순영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아까 속으로만 계산해 두었던 술값을 다시 세어 보았다.

그리고는 자기 돈으로 꼼꼼히 치렀다.

모든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순영의 머릿속에는 온통 대철 생각뿐이었다.

분명 대철은 마지막에 마음이 상한 사람처럼 돌아갔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순영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자기 같은 처지의 여자가 은인을 대접하려면 안주도 더 잘 차리고, 술도 보통 술 말고 외국 술 같은 좋은 것을 내왔어야 했던 걸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형편상 그럴 수도 없었고, 또 대철이 그런 걸 따질 사람 같지도 않았다.

아니면 수영 선수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달라서 특별한 예법이나 대접 방식이 있는 걸까.

혹시 자기가 그런 걸 몰라 실수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오늘 자리는 무슨 격식을 차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대철 역시 그런 사소한 일에 화낼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면—

정말 자기 자체가 싫어진 걸까.

그 생각에 이르자 순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선뜻 믿기 어려웠다.

대철을 처음 알게 된 뒤로 순영도 마음속에 불안한 생각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대철이 보여 준 말투, 표정, 행동…

그 모든 것 속에는 결코 그녀를 불쾌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순영은 그걸 느끼고 있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대철의 눈빛에는 분명 자신을 향한 감정이 있었다.

귀로 들을 수 있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그런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돌렸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마지막에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술을 마시다 말고 대철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던 순간.

마치 무슨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힘없이 말하던 모습.

‘혹시… 그 일 때문인가?’

순영은 자리에서 몸을 뒤척였다.

만약 대철에게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그건 곧 자기와도 관계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설령 그 문제가 직접 자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대철에게 고통이 되는 일이라면 결국 두 사람의 미래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자기가 대철과 결혼해 소원을 이루는 데에도.

그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만약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순영은 정말 자기 몸의 반이라도 떼어 대철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만약 대철의 사정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순영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상에는 남녀가 서로 힘을 합쳐 어려운 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자기도 대철 곁에서 함께 견디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한 뒤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정말 대철이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까 그의 말 속에는 분명 어떤 거리감이 있었다.

‘자격이 없다.’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순영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을 돌렸다.

‘아니야…’

혹시 대철이 술기운에 괜히 한숨을 쉰 것뿐일지도 몰랐다.

설령 고민이 있다 해도, 그건 단지 생활 문제라든가 사업상의 어려움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대철 같은 사람이라면 뭔가 큰일을 벌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잠시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대철이 큰 뜻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 아닌가.

순영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대철을 향한 존경과 애틋함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날 밤.

순영은 잠도 아닌, 꿈도 아닌 공상 속에 빠져 있었다.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이튿날 아침.

순영은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했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들떠 있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어젯밤 대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술잔을 들던 모습.

자기를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조용히 한숨 쉬던 얼굴까지.

그 모든 것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도 있었다.

‘혹시 다시 안 오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영은 괜히 방문 쪽을 바라보고,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만 나도 심장이 먼저 뛰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이러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 인생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사는 건 늘 같았다.

술손님을 받고, 웃고, 비위를 맞추고, 하루를 버티는 일.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대철을 만난 뒤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손님들처럼 추잡하게 굴지도 않았고, 억지 웃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순영을 사람처럼 대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선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순영은 대철이 오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오늘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지.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순영은 천천히 손등으로 자기 얼굴을 만졌다.

‘정말… 내가 그렇게 예쁜가.’

생각하자 얼굴이 또 뜨거워졌다.

물론 대철의 말이 전부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빈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자의 본능으로 그걸 알고 있었다.

대철은 자기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다가도 문득 현실이 떠올랐다.

자기는 기생집 여자였다.

대철 같은 사람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순영은 갑자기 거울을 바라보았다.

화장은 아직 지우지 못한 채였다.

밤새 흐트러진 얼굴은 피곤해 보였고, 눈가에는 희미한 그늘도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늘은 자기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도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순영은 한참 동안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하나의 소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대철과 함께 사는 삶.

그 평범하고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

이제는 순영의 하루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