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지은이 한용운
“저금이 무슨 저금이에요?”
순영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저금한 일이 없다는 겁니까?”
“그까짓 걸 저금이라고 할 수 있나요. 푼푼이 모은 게… 많아야 이백 원쯤 될 거예요.”
“이백 원이 적은 돈입니까?”
대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이런 처지에서 그만큼 모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는 그제야 술잔을 입에 댔다.
순영은 대철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 알아들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저 같은 처지에서 어떻게 돈을 모았냐… 결국 그 말씀이시죠?”
“아닙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아니에요.”
순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대철을 바라봤다.
“그래도 그 돈… 더러운 돈 아니에요.”
“……”
“손님들이나 주인어머니가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 가끔씩 돈푼을 주셨거든요. 저는 그걸 함부로 안 쓰고 모아 둔 것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상하리만큼 힘이 실려 있었다.
“몸은 천할지 몰라도 마음까지 천하게 살고 싶진 않았어요.”
방 안 공기가 잠시 조용해졌다.
대철은 잔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
“설령 순영 씨가 떳떳하지 않은 돈을 모았다 해도… 내가 그걸 의심할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순영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야 그렇겠죠.”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선생님 같은 분이 상관하실 일은 아니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순영은 방금 전까지 대철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 괜히 오해받고 싶지 않아 변명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철의 말은—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상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들렸다.
순영은 갑자기 자신이 너무 경솔했던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대철도 그녀의 표정을 읽은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할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
“사실은 지금도 순영 씨의 지난 일을 이것저것 묻고 싶습니다. 궁금한 것도 많고요.”
대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내가 그럴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순영 쪽이 더 미안해졌다.
“무얼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녀는 급히 얼굴빛을 풀며 말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자격이 없으면 누가 자격이 있어요?”
순영은 수줍은 듯 웃었다.
“저는 지금 이렇게 선생님 모시고 이야기하는 것만 해도 기쁘고 조심스러운데…”
대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른 자격은 몰라도…”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순영 씨를 의심할 자격은 없습니다.”
“왜요?”
“순영 씨를 의심한다는 건…”
대철은 말을 멈췄다가 낮게 이어 말했다.
“결국 순영 씨를 사랑한다는 뜻이니까요.”
순간 순영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대철은 허리를 조금 숙인 채 그녀를 바라봤다.
“자격이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술기운 때문인지 더없이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순영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닙니다.”
“……”
“선생님이 왜 자격이 없어요?”
대철은 힘없이 웃었다.
“있을 리가 없지요.”
“무슨 일 있으세요?”
순영은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대철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제가 뭐 잘못했나요?”
“아니에요.”
대철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술 마시다 보면 가끔 이렇습니다.”
그는 술잔을 내려다보더니 중얼거렸다.
“한잔 더 마실까요.”
그리고 손깍지를 풀어 턱을 괴었다.
순영은 더 불안해졌다.
“왜 그러세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 거죠?”
그녀는 잔이 넘칠 만큼 술을 따랐다.
대철은 술을 받아 마시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별일 아닙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냥 사내자식이 못나서 그렇죠.”
그 말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철은 몸을 약간 기울이더니 포켓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제 술이 취하는군요. 그만 계산하지요.”
“예?”
순영이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회계는 무슨 회계예요?”
“술 먹었으면 술값을 내야죠.”
대철은 지갑을 찾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순영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가 대접한 건데 무슨 술값이에요.”
“이 집 술인데 어떻게 그냥 먹습니까.”
“이 집 술 아니에요.”
순영의 목소리가 조금 단단해졌다.
“제가 제 돈으로 산 거예요.”
“……”
“설마 제가 남의 술로 선생님 대접했겠어요?”
대철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순영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저한테도 그 정도 술값은 있어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푼푼이 모은 돈이라도… 선생님 술 한잔 대접할 만큼은 됩니다.”
대철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술을 사 주신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순영의 얼굴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게 왜 미안한 일이에요?”
그녀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죽을 사람 살려 놓고도 별일 아니라고 하시면서…”
“……”
“그런 선생님께 제가 술 한잔 대접하는 게 미안한 일이라면…”
순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세상 좋은 일은 다 사내만 하고, 저 같은 여자는 사람도 아니라는 뜻인가요?”
대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순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저도 사람답지 못한 건 알아요.”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은인한테 술 한잔 대접할 정도의 마음은 있는 사람이에요.”
방 안이 고요해졌다.
대철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더 무슨 말을 하려다 끝내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순영은 붙잡으려 했지만—
대철은 끝내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