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 앞의 곰
지은이 뮤즈 · 2026-10-03
빵을 몇 개 먹기는 했지만, 한창 자랄 나이에 그걸로 점심을 때울 수는 없다.
뒤늦게 급식실로 뛰어갔지만 이미 파장.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다.
내 배꼽시계가 웅장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그때 세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세린: 오늘 3학년 선배들이 '군기 잡기' 한다고 돌아다닌대. 너 타깃 1순위야. 알겠어?
하지만 그 경고가 내 뇌리에 머문 시간은 고작 3초였다.
꼬르륵.
내 허기를 이길 수는 없다.
한창 클 나이인 여고생의 몸, 그리고 국밥 두 그릇은 기본으로 비우던 김철수의 영혼.
이 두 가지가 합쳐지니 식욕이 이성을 지배했다.
'3학년이고 군기고 나발이고. 밥은 먹어야 할 것 아니야.'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이민지: 설아, 어디 가려고? 세린이가 가지 말랬잖아.
설아: 매점. 굶을 수는 없잖아. 소시지 빵 다 팔리기 전에 가야 해.
이민지: 아, 안 돼! 위험해!
민지가 말렸지만, 이미 내 발은 매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군기? 까짓거 잡히면 되지.
나, 김철수다.
비록 덩치 때문에 군대는 못 갔어도, 사회에서 진상 관원들 많이 상대해 봤다.
고작 여고생 선배들의 군기가 무서워서 밥을 굶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매점 앞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원래라면 빵을 사려는 전쟁터여야 하는데, 오늘은 학생들이 홍해 갈라지듯 양옆으로 물러나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거대한 산… 아니, 덩치 큰 여학생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와, 피지컬 보소.'
나는 빵을 사러 가다 말고 감탄했다.
키는 나만 했는데, 교복 셔츠가 터질 듯한 어깨 근육. 짧은 숏컷에 무뚝뚝한 인상.
우리 반 최한나다. 우리 학교 유도부 주장.
그런데 상황이 좀 묘했다.
그 거대한 맹수 같은 한나를, 왜소한 3학년 선배 셋이 둘러싸고 쪼아대고 있었다.
선배: 야, 덩치. 선배가 지나가면 인사를 해야지? 눈 떴다고 안 보이냐?
최한나: ……죄송합니다.
한나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굵직했다.
3학년 리더 격인, 껌을 짝짝 씹는 선배가 한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선배: 죄송하면 다야? 덩치만 산만 해서는. 너 유도부라며? 사람 패고 다니냐?
최한나: 아닙니다.
선배: 아니긴!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우리 칠 거야? 쳐봐! 쳐보라고!
선배는 한나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한나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휴, 저러다 죽지.
저 주먹이면 저 선배 셋은 3초 컷이다. 업어치기 한 방이면 아스팔트에 꽂아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한나는 참아야 했다.
체육 특기생.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 바로 선수 자격 정지다.
징계를 받으면 대학 진학도 물 건너간다.
저 영악한 선배들은 그 약점을 알고 괴롭히는 거다.
선배: 왜? 쫄려? 덩칫값도 못 하는 게. 야, 빵이나 하나 사와 봐.
선배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한나의 얼굴에 휙 던졌다.
선배: 천 원 줄 테니까 피자빵이랑 우유 사 오고, 거스름돈 남겨 와라.
명백한 모욕.
지켜보던 아이들도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3학년 일진들은 건드리면 피곤해지니까.
한나는 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줍기 위해, 굴욕적으로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안의 '아저씨 본능'이 꿈틀거렸다.
'밥맛 떨어지게.'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약해야 한다. 그게 내 철학이다.
그런데 고작 나이 한 살 많다고 약점을 잡고 흔들어?
그것도 신성한-내 기준에-매점 앞에서?
나는 인파를 헤치고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한나가 주우려던 지폐를 내 발로 꾹, 밟아버렸다.
최한나: ……?
한나가 멈칫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녀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3학년 선배들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선배: 누구야? 넌 또?
선배가 인상을 팍 구겼다.
나는 귀를 후비며 건조하게 내뱉었다.
설아: 비켜. 밥 먹으러 가게.
선배: ……뭐?
설아: 길 막고 있잖아. 안 비켜?
선배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감히 2학년이, 그것도 존댓말도 안 쓰고 명령조로 나오니 기가 찰 노릇일 테지.
무릎 꿇고 있던 한나조차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덫에 걸린 여우를 구할 때와는 다르다.
사슬에 묶인 곰을 풀어주는 느낌이랄까.
설아: 일어나. 쪽팔리게 무릎은 왜 꿇어.
내 말에 한나는 홀린 듯 내 손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거대한 그림자가 선배들 위로 드리워졌다.
선배: 이, 이게 미쳤나!
선배(일명 '껌 씹는 언니')가 꽥 소리를 질렀다.
선배: 야! 너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너 몇 반이야!
설아: 2학년 3반 백설아.
나는 짝다리를 짚은 채 짧게 대답했다.
선배가 욱하는 마음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붕!
손바닥이 내 코앞을 갈랐다.
나는 고개만 살짝 뒤로 젖혀(스웨이) 피했다.
김철수의 동체시력에, 감정이 앞선 저런 붕붕 훅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선배: 어, 어?
허공을 가른 선배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설아: 느려.
선배: 이, 이년이 진짜!
선배가 다시 달려들려 하자, 옆에 있던 무리가 다급하게 팔을 잡았다.
"야, 야! 멈춰! 쟤 백설아래."
"그게 뭐!"
"백산그룹! 그 재벌 집 딸이라고!"
그제야 '껌 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한민국에서 재벌이라는 두 글자가 갖는 무게감.
섣불리 건드렸다간 인생 피곤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법.
껌 언니는 타깃을 바꿨다.
나 대신 만만한 한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하, 백산이고 나발이고. 야, 최한나. 너 지금 친구 관리 안 하냐? 너 선수 생활 끝장나고 싶어?"
치사한 놈들. 기어이 약점을 건드린다.
한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녀석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려 했다.
이그, 곰 같은 것.
최한나: 죄송합…….
탁.
내가 한나의 어깨를 잡아 제지했다.
설아: 고개 들지.
최한나: ……어?
설아: 네가 때렸냐? 욕을 했냐? 뭘 잘못해서 고개를 숙여.
나는 폰을 꺼내 선배들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녹음 중인 화면이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야, 너 그거 뭐냐?"
설아: 증거 수집.
나는 무표정하게 읊조렸다.
설아: 특수 협박에 금품 갈취. 그리고 폭행 미수.
"뭐, 뭐? 갈취?"
설아: 천 원 주고 오천 원어치 빵 사 오라며. 그게 삥 뜯는 거지, 심부름인가?
나는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쐐기를 박았다.
설아: 계속해 봐. 우리 집 변호사들이 요즘 심심해하던데. 합의금 얼마나 나오나 견적 좀 뽑아보게.
나의 차분한, 그러나 내용은 살벌한 협박에 선배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벌가 딸이 작정하고 법무팀 부르겠다는데, 일개 고등학생들이 무슨 수로 당해내겠는가.
"아, 아 씨……. 더러워서 피한다, 진짜."
결국 껌 언니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뒤돌아섰다.
도망가는 뒷모습에 대고 내가 낮게 덧붙였다.
설아: 다음엔 침 말고, 돈 들고 와. 선배 언니.
선배들은 못 들은 척 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구경하던 아이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남은 건 나와, 멍하니 서 있는 거인 최한나뿐이었다.
최한나: ……고마워.
한참 만에 한나가 입을 열었다.
덩치에 안 맞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설아: 뭐가.
최한나: 도와준 거. 너 아니었으면 나… 진짜 곤란했어.
나는 대꾸 없이 바닥에 떨어진 빵 봉지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한나를 툭 쳤다.
설아: 인사는 됐고. 밥이나 먹자.
최한나: 어?
설아: 배고프다고.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한나는 운동복 바지 자락을 꽉 쥐었다.
억울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녀석의 뱃가죽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꼬르르르륵-!
최한나: …….
설아: …….
한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나도 피식 웃으며 배를 문질렀다.
사실 내 배에서도 아까부터 전쟁이 나고 있었다.
설아: 배고파 뒤지겠다. 매점 털러 가자.
나는 한나의 팔을 잡아끌고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5분 뒤. 매점 야외 테이블.
우리는 마치 푸드 파이터 대회 결승전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설아: 자, 많이 먹어라. 덩칫값 하려면.
내가 테이블 위에 쏟아부은 건, 매점에 남아 있던 소시지 빵 10개, 크림빵 5개, 우유 1000ml짜리 두 팩이었다.
한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한나: 이, 이걸 다?
설아: 왜? 모자라? 더 사 올까?
최한나: 아니! 그게 아니라… 너도 먹게?
설아: 당연하지. 나 성장기야.
나는 소시지 빵 봉지를 뜯어 한입에 절반을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캬, 이 맛이지.
싸구려 소시지와 케첩의 환상적인 조화.
김철수 시절엔 체중 관리하느라 꿈도 못 꿨던 탄수화물 폭탄이다.
한나도 쭈뼛거리며 크림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더니, 녀석의 눈빛이 변했다.
와구와구.
녀석은 빵 하나를 3초 만에 해치웠다.
역시 운동부 주장. 먹는 속도와 양이 클래스가 달랐다.
설아: 오, 좀 치는데?
나의 승부욕이 발동했다.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빵 봉지를 뜯어대기 시작했다.
[시스템 : '먹방 배틀'이 시작되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빈 봉지가 산처럼 쌓여갔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경악하며 쳐다봤다.
"야, 저거 봐. 백설아랑 최한나야."
"미친, 저걸 다 먹어? 백설아 저 몸에 저게 다 들어가?"
마지막 남은 우유 한 팩을 나눠 마시고 나서야, 우리의 폭주는 멈췄다.
한나가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트림을 했다.
최한나: 꺼억~ 웁스.
나도 배를 두드리며 등받이에 기댔다.
설아: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한나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처음 볼 때의 경계심은 사라지고, 동지애 가득한 눈빛이었다.
최한나: 너… 진짜 의외다.
설아: 뭐가.
최한나: 재벌 집 딸내미라 깍쟁이인 줄 알았는데. 먹는 건 나랑 비슷하네.
설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쩨쩨하게 굴 거 뭐 있냐.
한나가 피식 웃었다.
녀석의 웃는 얼굴은 꽤 순박해 보였다.
그때, 한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최한나: 근데 아까 왜 나한테 사과하지 말라고 했어?
설아: 어?
최한나: 보통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러잖아. 그냥 사과하고 넘기라고.
나는 이쑤시개(어디서 구했는지 모를)를 입에 물고 대답했다.
설아: 난 그 말 제일 싫어해.
최한나: …….
설아: 똥이 더러우면 치워야지, 왜 피해? 그리고 너, 잘못한 거 없잖아. 네가 힘이 없어서 참은 게 아니라, 지킬 게 있어서 참은 거잖아. 그건 비겁한 게 아니라 멋있는 거야.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동안 덩치 크다고 놀림받고, 운동부라고 무시당하면서도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내 한마디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설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참지 마. 정 못 참겠으면 나한테 와.
나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설아: 법적인 건 내가 막아줄게. 대신, 몸빵은 네가 좀 해라. 나 맷집이 좀 약해서.
한나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최한나: 푸하하하! 뭐야, 그게.
한나는 자신의 거대한 주먹을 내 주먹에 툭, 갖다 댔다.
최한나: 좋아. 거래 성립. 앞으로 누가 너 건드리면 내 뒤로 숨어. 유도부 주장의 등을 빌려줄 테니까.
[시스템 : 파티원 '최한나'(탱커/보디가드)가 합류했습니다.]
[특수 효과 : 물리적 방어력 +200%, 식비 지출 +300%]
그날 이후, 학교에는 기이한 조합이 탄생했다.
가녀린 미소녀 백설아와, 그녀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거인 최한나.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매점을 털어버리는 공포의 먹방 듀오.
내 든든한 방패가 생긴 날이자, 내 지갑이 털리기 시작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