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 시계와 여우 사냥
지은이 뮤즈 · 2026-09-30
김세린: 아, 진짜! 백설아 너 그거 안 벗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아, 피곤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반의 확성기이자 자칭 패션 리더, 김세린이다.
세린이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여우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외모.
눈꼬리는 살짝 올라갔고, 입술은 틴트를 발라 앵두 같았다.
교복 치마는 규정 위반 직전까지 줄였고, 머리에는 명품 헤어핀이 반짝거렸다.
확실히 예쁘장하긴 했다.
문제는 입만 열면 쏟아지는 저 잔소리와 오지랖이었다.
설아: 야, 김세린. 너나 신경 써. 치마가 그게 뭐냐? 속바지 보이겠다.
내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세린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김세린: 뭐, 뭐?! 야! 단어 선택 좀 우아하게 못 해? 그리고 이건 패션이야! 넌 다리가 예쁜데 왜 맨날 가리고 다녀? 답답해 죽겠어, 진짜!
녀석은 내 옆자리인 민지에게까지 동의를 구했다.
김세린: 민지야, 너도 말 좀 해봐. 얘가 이러고 다니는 게 말이 돼?
이민지: 으응… 난 설아 편한 게 제일 좋긴 한데…….
민지는 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했다.
그때, 모른 척하고 앉아 있던 유리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유리: 야, 김세린.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좀 조용히 하지?
세린은 혜진 패거리와 어울리는 아이다.
요즘 유리가 혜진 패거리에서 벗어나고부터 둘은 좀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과거엔 같이 어울렸지만, 지금은 선이 그어진 사이.
세린은 유리의 말에 움찔했지만, 짐짓 들은 척도 않고 말을 이었다.
김세린: 아오, 내가 말을 말지. 야, 너희들 오늘 점심시간에 매점 가지 마. 급식실도 가지 마.
설아: 왜? 나 배고픈데.
김세린: 오늘 3학년 선배들이 '군기 잡기' 한다고 돌아다닌대. 특히 설아 너처럼 눈에 띄는 애는 타깃 1순위야. 알겠어? 정보통인 이 언니 말 들어.
세린이는 나름 걱정해 준답시고 정보를 흘려주곤, 홱 돌아서 자기 무리(박혜진 패거리)가 있는 복도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박혜진 옆에 서서 과장되게 웃으며 알랑거리는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젤리 봉지를 뜯으며 피식 웃었다.
'짜식, 사는 게 피곤하겠다 너도.'
김세린.
학교 내의 모든 소문을 꿰고 있다는 정보통. 혜진 패거리의 일원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녀석의 주변 친구들은 하나같이 명품과 외모로 급을 나누는 부류들이다.
의리라곤 없는, 바람 불면 날아가는 '겨' 같은 관계.
세린이는 그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 거다.
마치 예전의 백유리처럼,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서.
하지만 녀석의 그런 위태로운 줄타기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남의 인생 신경 끄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게 내 철칙이니까.
그렇게 철저히 방관자로 남으려 했는데.
운명은 꼭 피곤한 날에 터지는 법이다.
하필이면 혜진이네 반과 합동 체육 수업이 잡힌 날, 사달이 났다.
장소는 수업이 끝난 후의 탈의실이었다.
여담이지만 아저씨 김철수, 여학생 탈의실에서 자연스럽게 옷 갈아입게 된 걸 보면 여자 다 됐다.
처음엔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천장만 보고 옷을 입었는데, 이젠 뭐 옆에서 누가 옷을 갈아입든 말든 신경도 안 쓰인다.
오히려 '저 친구는 삼두근이 좀 부족하네', '광배근 라인이 아쉽구먼' 하고 근육량이나 체크하고 앉았으니. 인간의 적응력이란 참 무섭다.
암튼 탈의실 구석 벤치에 앉아 주섬주섬 체육복 바지를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탈의실 문이 쾅! 열리며 앙칼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박혜진: 야! 문 잠가! 아무도 못 나가!
분위기가 싸해졌다.
소리의 주인공은 옆 반 박혜진. 로펌 대표 딸이자, 세린이가 죽고 못 사는 그 '잘나가는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반장: 혜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우리 반 반장이 놀라서 물었다.
박혜진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박혜진: 내 시계! 내 다이아 박힌 시계가 없어졌다고! 그거 우리 아빠가 프랑스에서 사다 준 한정판이란 말이야!
탈의실이 술렁거렸다.
나 참, 미쳤다.
다이아 시계라니. 못해도 천만 원은 넘을 물건이다.
그런 걸 학교에 차고 오는 게 정신이 올바로 박힌 거냐.
고등학생에게 그런 시계를 사다 준 아빠도 제정신은 아닌 거 같다.
암튼 난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끄고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혜진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박혜진: 분명히 체육복 갈아입기 전에는 있었어. 사물함에 넣어놨다고! 근데 지금 없잖아! 너네 중에 도둑년이 있어!
박혜진의 눈이 독사처럼 번뜩이며 아이들을 훑었다.
나는 구석에서 체육복을 개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귀찮게 됐네. 배고픈데.'
박혜진: 지금부터 가방이랑 사물함 다 뒤질 거야. 불만 있는 년은 범인으로 간주한다.
박혜진의 패거리 둘이 나서서 아이들의 가방을 강제로 열기 시작했다.
인권이고 뭐고 없었다.
여기는 힘과 돈이 법인 사립고니까.
"야, 너네 뭐 하는 거야!"
몇몇이 항의했지만, 박혜진이 "닥쳐. 찔리냐?" 하고 쏘아붙이자 조용해졌다.
드르륵, 탁. 드르륵, 탁.
가방 지퍼 열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털어봤자 나올 건 젤리 봉지랑 줄넘기뿐이니까.
그런데.
가방 검사가 세린이의 사물함 앞에 멈췄을 때였다.
"……어?"
세린이의 명품 백팩을 뒤지던 박혜진의 꼬붕이 멈칫했다.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무언가가 나왔다.
큐빅이 아니라 진짜 다이아가 박힌, 은색 손목시계였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김세린에게 꽂혔다.
김세린: ……이게 왜 거기서 나와?
세린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김세린: 아, 아니야! 나 아니야! 내가 그걸 왜 훔쳐!
박혜진이 천천히 세린이에게 다가갔다.
평소 '베프'라고 부르며 팔짱 끼고 다니던 사이.
하지만 지금 박혜진의 표정은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짝!
날카로운 파열음이 탈의실을 울렸다.
세린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하얀 뺨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박혜진: 야, 김세린. 너 많이 컸다?
박혜진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박혜진: 평소에 내 물건 탐내더니, 기어이 손버릇이 나오는구나? 너네 집 요즘 사업 어렵니? 그래서 이딴 짓 했냐?
김세린: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혜진아, 너 나 알잖아! 내가 미쳤다고 네 걸 훔쳐?
세린이가 울먹이며 혜진의 팔을 잡았지만, 혜진은 벌레 털어내듯 뿌리쳤다.
박혜진: 이거 놔, 도둑년아. 소름 돋게 어디서 만져?
더 잔인한 건 주변 반응이었다.
세린이와 같이 어울려 다니며 하하 호호 했던 무리들.
그들마저 세린이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와… 세린이 진짜 실망이다."
"어쩐지, 요즘 자꾸 혜진이 거 예쁘다고 만지작거리더라."
"소문 퍼트릴 때 알아봤어야 했어. 쟤 원래 뒤 구린 애잖아."
순식간이었다.
그 잘나가던 '정보통 김세린'이 '손버릇 나쁜 도둑년'으로 추락하는 건.
세린이는 구석에 몰려 덜덜 떨고 있었다.
항상 당당하고 뻔뻔하던 그 여우 같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덫에 걸려 피를 흘리는 작은 짐승만 남아 있었다.
박혜진: 경찰 불러. 아님, 학생부로 끌고 가든가. 콩밥 좀 먹어야 정신 차리지.
박혜진의 말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세린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지켜보던 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한데.'
내 안의 김철수가 속삭였다.
36년 인생, 그중 절반을 거친 체육관 바닥에서 눈치로 먹고산 짬밥이 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의 미세한 근육 떨림, 당황했을 때의 동공 흔들림.
지금 김세린의 눈은 '들켜서 당황한 도둑'의 눈이 아니다.
'억울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사람'의 눈이다.
반면, 피해자라는 박혜진.
녀석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0.1초 정도 비릿하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되짚어 보면 상황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다.
보통 물건이 없어지면 "어? 어디 뒀더라?" 하고 찾는 게 순서다.
그런데 비명과 동시에 문을 걸어 잠그고, 기다렸다는 듯 남의 가방부터 뒤진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설마.'
뇌리를 스치는 기억 하나.
체육 시간 전, 혜진이 세린이에게 "내 가방 좀 잠깐 맡아줘"라며 사물함 열쇠를 넘기던 장면.
퍼즐이 맞춰졌다.
이건 도난 사건이 아니다. 작업 쳤구나.
이유는 뻔하다.
무리 내 서열 정리? 아니면, 꼬운 게 있었겠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가장 더럽고 치졸한 이지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배고파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렇게 억울하게 당하는 꼬라지를 보니, 내 안의 정의로운(이라 쓰고 오지랖이라 읽는) 아저씨 본능이 꿈틀거렸다.
설아: 야.
나는 벗다 만 체육복 바지를 다시 추켜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아이들을 헤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울고 있는 세린이와, 기세등등한 혜진이 사이로.
설아: 시끄러워서 옷을 갈아입을 수가 없네.
모두의 시선이 나, 백설아에게 쏠렸다.
박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박혜진: 뭐야, 백설아? 넌 빠져. 도둑년 참교육 중이니까.
설아: 도둑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혜진이의 코앞에 들이밀며 피식 웃었다.
설아: 이거, 지문 감식 한번 해볼까?
박혜진: ……뭐?
설아: 네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훔친 물건을 지문 뻔히 남겨서 자기 가방 제일 잘 보이는 앞주머니에 넣어놨을 리는 없을 테고.
나는 세린이 쪽을 힐끔 보고 다시 혜진이를 노려봤다.
설아: 반대로, 누군가 장갑 끼고 몰래 쑤셔 넣었다면, 시계엔 주인 지문밖에 없겠지. 안 그래?
박혜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빙고.
설아: 그리고 너 아까 체육 시작 전에, 김세린 사물함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거 내가 봤는데. 그것도 CCTV 까볼까?
물론 탈의실 복도에 CCTV가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다.
박혜진: 아, 아니! 그건 가방 맡기느라 그런 거고! 너 뭐야? 지금 이 도둑년 편드는 거야? 너도 한패냐?
박혜진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혜진이의 발악을 보며,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그래, 그렇게 흥분해야 빈틈이 생기지.'
나는 들고 있던 시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혜진이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한 발짝, 두 발짝.
내가 다가갈 때마다 혜진이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여고생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링 위에서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넣던 파이터의 압박감.
나는 혜진의 귀 바로 옆에 얼굴을 들이밀고,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아: 야, 박혜진. 머리 굴리는 건 좋은데, 너무 티 나게 굴렸다.
박혜진: ……뭐?
설아: 너네 아까 세린이 가방 뒤질 때, 지퍼 열기도 전에 손이 먼저 안주머니로 들어갔잖아. 마치 거기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박혜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박혜진: 그, 그건 우연히…….
설아: 우연? 웃기지 마. 남들이 다 바보 같지? 내가 지금 여기서 경찰 부르고, 지문 감식하고, 네가 세린이 가방 만지는 거 봤다는 애들 증언 확보해 줄까? 무고죄가 절도죄보다 형량 더 센 건 알고?
박혜진: ……!
혜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설아: 선택해. 지금이라도 '어머, 내 주머니에 있었네? 착각했나 봐' 하고 꼬리 내리고 꺼질래? 아니면 진짜 경찰서 가서 개망신 한번 당해볼래? 백산그룹 법무팀, 일 잘하는 거 알지?
백산그룹.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박혜진은 완전히 무너졌다.
제아무리 로펌 집 딸이라도, 재벌가인 우리 집안과는 체급이 다르다.
게다가 본인이 찔리는 게 있으니 더더욱.
박혜진: ……아.
혜진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내 손에 들린 시계를 낚아챘다.
그리고 쥐어짜듯 소리쳤다.
박혜진: 아, 아 맞다! 내, 내 바지 주머니에 있었네! 아까 넣어두고 깜빡했나 봐! 내가 착각했어!
탈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뻔하디뻔한 거짓말.
모두가 진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혜진이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도망치듯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혜, 혜진아! 같이 가!"
혜진이의 시녀 노릇을 하던 패거리들도 헐레벌떡 뒤를 따랐다.
남은 건, 우리 반 아이들과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김세린뿐이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세린이를 '도둑년' 취급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오려 했다.
"어머, 세린아. 다행이다. 오해였네?"
"난 처음부터 너 아닌 줄 알았어. 혜진이가 너무했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간사한 것들.'
나는 세린이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알랑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설아: 비켜. 공기 탁하니까.
아이들이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줬다.
나는 질질 짜고 있는 세린이를 데리고 탈의실을 나갔다.
학교 옥상 벤치.
세린이는 10분째 훌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매점에서 사 온 빵과 우유를 우물거리며, 녀석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김세린: 크흠, 킁! 으으으…….
화장은 다 번져서 팬더가 됐고, 콧물까지 흘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천하의 김세린이 저런 꼴을 보이다니.
설아: 야, 그만 좀 울어라. 빵 맛 떨어지게.
내가 우유를 내밀자, 세린이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탔던 모양이다.
한참 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세린이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김세린: ……왜 도와줬어?
설아: 어?
김세린: 너 나 싫어하잖아. 나도 너 촌스럽다고 깠었고. 근데 왜…….
세린이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자기가 믿었던 '세련되고 급 맞는' 친구들은 다 등을 돌렸는데, 정작 언제나 무뚝뚝하게 말 한번 붙여주지 않던 내가 도와주다니.
나는 빵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설아: 이유 없어. 그냥.
김세린: ……그냥?
설아: 어. 굳이 따지자면, 강약약강인 놈들 꼴 보기 싫어서. 그리고 너, 억울해서 죽으려던 표정이더라.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쳤다.
나의 덤덤한 말에, 세린이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김세린: 흐으응… 백설아, 너 진짜…….
설아: 아, 또 울려고? 그만해라. 나 간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세린이가 다급하게 내 교복 자락을 붙잡았다.
김세린: 잠깐만!
설아: 왜 또.
세린이는 교복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의 울상 짓던 표정은 사라지고, 특유의 독기 어린, 아니 결의에 찬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김세린: 나 빚지고는 못 살아. 이 은혜, 확실하게 갚을게.
설아: 밥이나 사라고 했잖아.
김세린: 아니, 그딴 거 말고!
세린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내 흐트러진 넥타이를 맵시 있게 고쳐 매주며, 비장하게 선언했다.
김세린: 앞으로 학교의 모든 정보, 찌라시, 고급 소스. 제일 먼저 너한테 물어다 줄게. 누가 너 씹고 다니면 내가 가서 다 조져놓을 거고.
설아: ……푸핫!
웃음이 터졌다.
30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그딴 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현생은 여고생이니, 학교생활이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김세린: 그리고!
세린이는 내 헐렁한 교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김세린: 제발 그 패션 좀 어떻게 하자. 내가 코디해 줄게. 백산그룹 딸답게, 아니 학교 여신으로 만들어 줄게. 내 자존심이 허락 안 해.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와중에도 패션 지적질이라니. 역시 김세린답다.
하지만 녀석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껍데기뿐인 가짜 관계에 질린 여우가, 처음으로 진짜 주인을 만난 눈빛.
설아: 그래. 뭐, 나쁘지 않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헝클어진 머리를 툭 쳐주었다.
설아: 잘 부탁한다, 정보통. 대신 이상한 레이스 달린 옷 가져오면 죽는다?
세린이가 활짝 웃었다.
화장이 번진 얼굴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예뻐 보였다.
김세린: 걱정 마. 언니만 믿어!
[시스템 : 파티원 '김세린'(딜러/정보통)이 합류했습니다.]
[특수 효과 : 학교 내 평판 관리 +100%, 정보 수집력 최상]
그렇게, 나의 두 번째 파티원이자 학교에서 가장 시끄러운 스피커가 내 편이 되었다.
이제 박혜진 같은 애들이 내 뒷담화를 깔 때마다, 세린이의 독설 미사일이 날아갈 것이다.
학교생활, 생각보다 재미있어지겠는데?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세린이 사건 때문에 점심시간을 통째로 날려 먹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