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원 모집 완료
지은이 뮤즈 · 2026-10-04
시간이 갈수록 난 의도치 않게 [반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병약했던 아싸 백설아에서 명백히 [인싸]가 되어가고 있는 거다.
나는 맹세코 인싸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조용히 졸업장이나 따서 대학(물리학과)이나 가려 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자리, 맨 뒷줄 창가석은 일종의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설아야, 나 어제 남친이랑 싸웠는데 들어봐."
"야, 이번 수학 숙제 너무하지 않냐?"
"오늘 급식 메뉴 뭐래?"
연애 상담부터 시작해 내용 없는 수다, 선생님 뒷담화까지.
반 여자아이들의 모든 이야기가 내 자리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그렇다고 내가 수다쟁이냐? 전혀 아니다.
물론 오는 아이들을 내치지는 않는다.
이 귀여운 것들을 어찌 거부할 수가 있겠냐.
나는 턱을 괴고 앉아, 아이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다.
가끔 추임새나 한 번씩 넣어주는 정도?
설아: ……헤어지라니까.
설아: ……그건 네가 참아.
설아: ……쓰레기네.
신기한 건, 내 짧고 굵은(목소리는 옥구슬 같지만) 한마디에 아이들이 엄청난 위로를 받는다는 거다.
"와… 역시 설아. 정답이다."
"속이 다 시원해."
아무래도 내 안에 있는 36세 아저씨의 연륜 때문인 것 같다.
전생에 체육관 관장 하면서 관원들 하소연 들어주던 짬바가 여기서 발휘되는 건가.
녀석들은 나를 친구가 아니라, 묘하게 '든든한 큰오빠'처럼 의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매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에 출석 도장을 찍는 고정 멤버(파티원)들이 있었다.
우리 파티원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하나. [참모] 이민지. 안경 쓴 모범생. 내 필기 셔틀이자 '설아 찬양론자'.
둘. [탱커] 최한나. 덩치가 내 두 배는 되는 유도부 주장. 나와는 먹방 배틀을 즐기는 의리파.
셋. [정보통] 김세린. 여우같이 생긴 깍쟁이. 학교 소식통이자 패션 지적질 담당.
넷. [물주] 백유리. 츤데레 내 동생.
한나는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묻는다.
최한나: 설아 너, 가방에 케이크 가져왔지? 내가 봤어.
예리한 녀석. 쉬는 시간에 출출할까 봐 서진 언니 졸라서 하나 챙긴 건데.
설아: 어. 너 먹을래?
최한나: 헐, 사랑해! 진짜 너밖에 없어!
한나는 나를 와락 껴안으려 했다. 묵직하다.
옆에서 세린이가 거울을 보며 혀를 찼다.
김세린: 야, 최한나. 좀 떨어져. 설아 구겨지겠어. 그리고 설아 너, 안경 좀 벗으라니까? 그 뿔테 갖다 버리고 렌즈 껴. 내가 골라준다니까?
설아: 귀찮아. 이게 편해.
내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자, 세린이는 "아오, 저 얼굴 낭비!"라며 가슴을 쳤다.
세린이는 언제나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가십거리를 가져온다.
"야야, 대박 사건. 옆 반 체육 쌤이랑 음악 쌤이랑 썸 탄대." 라던가,
"진호가 아무리 생각해도 유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라던가.
이 녀석들, 처음엔 내가 무서워서 접근 못 하다가, 내가 한나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한 손으로), 세린이가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준(동체시력으로) 이후로 껌딱지처럼 들러붙었다.
그때, 앞문이 열리고 백유리가 들어왔다. 손에는 매점 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탁. 유리는 내 책상에 빵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유리: 야. 먹어.
보통 자매라면 "언니 먹어" 했겠지만, 우린 아니다.
호적상으론 내가 언니지만-내가 6월생, 유리가 10월생-학교에선 얄짤없다.
설아: 오, 땡큐. 백유리.
유리: 흥. 내가 먹으려다 배불러서 주는 거야. 버리기 아까우니까.
거짓말.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코크림 빵이잖아.
매점에서 제일 먼저 품절되는 건데, 굳이 줄 서서 사 온 주제에.
세린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김세린: 야, 유리야. 넌 언니한테 말투가 왜 그래? 싸가지 없게.
유리: 상관 마. 우린 원래 이래. 그치?
유리가 나를 째려봤다. 나는 빵 봉지를 뜯으며 피식 웃었다.
설아: 어. 우린 철저한 '비즈니스 자매'니까.
유리는 내 옆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한나의 과자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예전엔 박혜진 눈치 보느라 우리 쪽에 오지도 못했는데, 이젠 아주 제집 안방이다.
손톱을 물어뜯던 버릇도 사라졌다.
볼살도 제법 통통하게 올랐다. 녀석, 이제 좀 살 만해 보이네.
방과 후. 나는 이 멤버들을 이끌고 교문을 나섰다.
교문 앞엔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최 실장이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최 실장: 다들 나왔냐.
원래 최 실장은 아버지 경호원인데, 요즘은 나랑 유리 등하교를 전담한다.
예전엔 내가 언제 쓰러질지 몰라 감시용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기사님' 역할이다.
집에 있는 이모도 마찬가지.
예전엔 내 전담 간호사 같았지만, 이젠 그냥 집안일 총괄하며 잔소리하는 우리 모두의 이모다.
설아: 실장님, 오늘 저 친구들이랑 떡볶이 먹고 들어갈게요. 먼저 가세요.
최 실장: 응? 회장님이…….
설아: 유리도 같이 갈 거예요. 야, 가자!
나는 유리 등을 떠밀었다.
유리는 "아, 떡볶이 칼로리 높은데…" 하면서도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최 실장은 한숨을 쉬더니 창문을 내리고 한마디 던졌다.
최 실장: 6시까지 안 오면 데리러 간다.
설아: 네에.
민지, 한나, 세린이까지 합류. 완벽한 [떡볶이 원정대]가 결성되었다.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 근처 자판기로 향했다.
매운 거 먹기 전에 음료수는 필수니까.
그런데, 자판기 앞에 거대한 등짝 하나가 길을 막고 있었다.
키는 185cm 정도?
짧은 스포츠머리. 교복 셔츠 단추를 두 개나 푼, 구릿빛 피부의 남학생.
녀석은 자판기를 붙잡고 씨름 중이었다.
강태양: 아… 왜 안 나와… 내 500원… 밥 사 먹어야 하는데…….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동전 먹었다고 울상이다.
자판기를 주먹으로 쾅쾅 치는데, 요령 없이 힘만 쓴다.
기계 부서지겠다, 인마.
설아: 비켜 봐.
내가 등 뒤에서 말을 걸자, 녀석이 흠칫 놀라 돌아봤다.
명찰을 보니 '강태양'. 이름값 하네.
얼굴이 아주 해맑다 못해 탔다.
안에는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다. 농구부로구먼.
강태양: 어? 너, 너는… 백설아?
설아: 나 알아?
강태양: 알지! 2학년 3반 슬리핑 지니어스!
그 별명, 아직도 따라다니는구나.
나는 한숨을 쉬고 자판기 앞으로 갔다.
설아: 동전 먹었냐?
강태양: 어… 내 전 재산인데… 배고픈데…….
나는 자판기 하단을 쓱 훑어봤다.
전생에 체육관 자판기도 자주 이랬지.
이건 힘으로 치는 게 아니라, 타격점이 중요하다.
나는 교복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자판기 오른쪽 하단, 동전 투입구와 연결된 내부 스프링 지점을 정확히 손바닥으로 가격했다.
격투기의 팜 스트라이크 기술을 응용한다. 대단한 건 아니고 손바닥 치기란 뜻이다.
탁! 덜커덩.
거짓말처럼 반환구로 500원짜리 동전이 굴러떨어졌다.
강태양: 오오오오!!
강태양의 눈이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반짝거렸다.
강태양: 대박! 뭐야? 방금 뭐 한 거야? 기공(氣功)이야?
설아: 기술이다, 멍청아.
나는 내 음료수를 뽑아 들고 쿨하게 돌아섰다.
뒤에서 한나가 "와, 설아 포스 보소" 하며 감탄하고, 세린이는 "야, 쟤 강태양 아냐? 농구부 주전. 멋있긴 한데 좀 멍청하기로 유명한데."라고 속삭였다.
한나가 "그래도 여자애들한테 인기는 꽤 있지. 뭐, 난 관심 없지만."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녀석이 쪼르르 달려와 내 앞을 막아섰다.
강태양: 저기! 잠시만!
설아: 뭐.
강태양: 나랑 친구 하자!
……뭐래, 이 미친놈이.
나는 36살 아저씨다. 너 같은 핏덩이랑 친구 할 군번이 아니다.
설아: 싫어.
강태양: 왜?! 나 힘센데! 너 가방 들어줄게! 급식 당번 대신 해줄게!
설아: 난 멍청한 남자 딱 질색이야.
보통 이러면 상처받고 가야 정상이다.
근데 이 녀석은…….
강태양: 헐! 나 멍청한 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천재는 달라!
감동받은 표정이다.
와, 진짜 답 없는 해맑음이다. 리트리버가 따로 없네.
유리가 옆에서 "푸흡" 하고 터졌다.
유리: 야, 백설아. 너한테 딱인데? 머슴 하나 키워.
강태양은 내 손에 들려 있던 가방(무거운 문제집이 든)을 획 낚아챘다.
강태양: 내가 들게! 누님! 아니, 사부님!
설아: ……누님?
강태양: 방금 그 손기술, 예사롭지 않았어. 나한테도 가르쳐줘! 농구할 때 써먹게!
아니, 자판기 치는 법을 농구에 왜 써먹어. 반칙패 당할 일 있냐?
하지만 녀석은 이미 내 가방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대형견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나와 세린이가 키득거렸다.
김세린: 설아 파티에 전사 추가요.
최한나: 몸빵은 확실하겠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리더(나): 36세 아저씨 영혼의 만능캐.
참모(민지): 브레인.
딜러(세린): 입 딜러(말빨).
탱커(한나): 의리파 방패.
물주(유리): 자금 지원 및 츳코미 담당.
짐꾼(강태양): 멍청한 대형견 (New!)
설아: ……하아.
그래. 뭐, 나쁘지 않다.
학교생활 하려면 든든한 머슴 하나쯤은 있어야지.
설아: 야, 강태양.
강태양: 넵! 사부님!
설아: 가방 안 무겁냐?
강태양: 깃털 같습니다!
설아: 그래. 그럼 떡볶이집까지 뛰어라. 늦게 오면 국물도 없다.
강태양: 옙!!!
강태양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먼저 뛰어갔다.
분식집 앞.
유리의 걸음이 문 앞에서 뚝 멈췄다.
설아: 왜.
유리: ……아니.
녀석은 김이 뿌옇게 서린 유리문과, 그 안의 주황색 플라스틱 테이블과, 벽에 코팅해 붙여 놓은 메뉴판을 번갈아 봤다.
낯선 나라에 막 입국한 관광객의 눈이었다.
설마.
설아: 너… 분식집 처음이지.
유리: 처, 처음은 무슨! 나도… 이런 데… 티브이에서 많이 봤거든?
티브이에서.
하긴. 등하교는 세단, 방과 후는 과외, 간식은 주방 아주머니표 수제 디저트인 인생이다. 학교 앞 분식집에 올 일이 있었을 리가.
그런데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반격을 날렸다.
유리: 그러는 너는? 너는 와 봤어?
움찔.
날카로운 반격이다.
생각해 보니 백설아는 나보다 더하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던 애가 학교 앞 분식집은 무슨.
설아: 나, 나야 뭐… 병원 앞에… 비슷한 데가…….
유리: 병원 앞에 분식집이 어디 있어.
설아: ……편의점은 있었어.
유리: 그게 같아?!
궁색하다. 궁색해, 김철수.
다행히 세린이가 입을 틀어막으며 끼어들었다.
김세린: 대박. 백씨 자매 분식집 동반 데뷔. 야, 이거 찍어야 돼.
설아: 시끄러워! 찍기만 해 봐!
두 목소리가 정확히 겹쳤다.
유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메뉴판 앞에서 다시 굳었다.
유리: ……로제 떡볶이는 없어?
설아: 여긴 그런 거 없다.
먼저 와서 구석 테이블을 맡아 놓은 태양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강태양: 사부님! 여기 자리 있습니다!
나는 익숙하게 주문을 넣었다.
설아: 이모님, 떡볶이 3인분에 튀김 모둠, 순대 하나요. 어묵 국물은 그냥 주시는 거죠?
"아이고, 학생이 잘 아네~"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 넌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설아: ……유튜브.
유리: 또 유튜브야?!
잠시 후, 유리는 포크로 떡 하나를 콕 찍어 아주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멈췄다.
안다, 그 표정. 크리스마스 라면 때 봤다.
유리: …맛있네.
설아: 튀김은 국물에 찍어 먹는 거다.
김세린: 유리야, 어묵 국물은 리필 공짜야!
한나가 종이컵을 건넸고, 민지는 냅킨을 깔아 줬다.
유리는 그날 떡볶이 2인분을 혼자 비웠다.
차에서 칼로리 걱정하던 애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계산은 유리가 했다. 카드를 내밀며 녀석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유리: ……다음엔 내가 먼저 가자고 할 거야.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제법 시끌벅적하고, 제법 든든한.
나의 고등학교 2학년이, 그렇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이 평화가 5월의 어느 체육 시간에 화려하게 박살 날 줄은, 그때는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