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로 보내는 신호
지은이 와우산 · 2026-10-25
통화 단자 앞에 앉은 태성 직원이 헤드셋을 귀에서 반쯤 떼고 고개를 들었다.
“실장님. 첫 정지 들어간다는데요. 청솔 사람들 다 데리고.”
구 실장은 갑판 난간에 기대어 강 건너를 보고 있었다. 바지선 반대편 끝에서는 태성 속공팀이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기록 전담 팀이었다.
팀장이 A급, 나머지는 B급이었다. 다들 경량 갑옷 차림이었고, 어깨마다 방송용 몸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11층에서 옆으로 빠지는 목, 짐꾼들도 잘 안 쓰는 길로 먼저 들어간 부팀장과 민규에게서는 아직 아무 소식이 없었다.
“협회 허가는 우리가 받았어.” 구 실장이 말했다. “구조는 태성 속공팀이 한다. 저 줄 달고 열한 명이 걸어 나오면, 그건 저 잠수부가 구한 거야.”
“그래도 아래에 사람이……”
“공기는 8층까지라며. 그 사람 지금 16층이야.”
직원이 대답하지 못했다. 구 실장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갑판에 사려진 생명줄 묶음을 내려다봤다. 공기 호스와 통화선과 강도 줄이 한데 감긴 굵은 줄이었다.
“끊어.”
직원의 손이 허리춤의 작업 칼로 갔다가 멈췄다. 구 실장이 그를 봤다. 직원이 칼을 뽑았다. 줄 묶음은 생각보다 질겨서 칼날이 몇 번 오갔다.
마지막 가닥이 끊기자 끊긴 끝이 갑판을 미끄러져 강물로 떨어졌다. 압축기가 헛바람을 뱉었다.
구 실장이 속공팀 팀장을 불렀다.
“바로 들어가지 말고. 한 시간쯤 있으면 입구 밑까지 올라와. 그때 내려가서 나오는 그림만 잡아.”
둔치 쪽 계단참에서 오철이 그 장면을 봤다. 강물 위로 끊긴 줄 끝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오철이 계단을 박차고 내려가려는 순간, 곽만수가 그의 팔을 잡았다.
영감은 오철의 팔을 붙든 채 반대편, 둔치 주차장에 세워 둔 한강수중 트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짐칸에 압축기와 예비 호스 한 사리가 실려 있는 트럭이었다.
◇
이어폰이 죽은 채로 2분 30초가 지났다.
나는 베젤을 들여다봤다. 첫 정지가 찼다. 뒤를 돌아보자 헤드랜턴들이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통화가 끊겼어요.” 공대장이 말했다. “위에서 무슨 일 났습니까?”
“모릅니다. 시계는 제 손목에 있어요. 띠는 여러분 손목에 있고.”
나는 이어폰 선을 뽑아 가슴 끈에 감았다. 위에서 무슨 일이 났든 아래의 셈은 바뀌지 않는다. 바뀌는 건 내가 기댈 데였다. 이제 영감도, 영감의 시계도 없었다.
“14층으로 갑니다. 천천히.”
다음 정지의 시간은 앞 정지를 떠난 순간부터 센다. 가는 동안 걸린 시간도 거기 들어간다. 그래서 목을 오르는 동안에도 나는 베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음 목 어귀에 닿았을 때 이미 1분이 흘러 있었다. 남은 시간만 섰다. 12층도 그렇게 섰다.
12층 홀은 이상하게 축축했다. 벽에서 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목 어귀에 줄지어 서서 숨을 고르는 동안, 홀 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점은 금방 늘었다. 눈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다가, 우리 랜턴 쪽으로 천천히 모여들었다.
밤바다에서 랜턴을 켜고 물속에 매달려 있으면 오징어 떼가 몰려온다. 빛을 보고 온다. 다가오다가 빛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그러다 갑자기 빛 한가운데로 달려든다.
저것들이 꼭 그랬다. 맨 앞의 것이 랜턴 빛 가장자리에 들어왔다. 길쭉하고 하얀 몸에 다리가 지나치게 길었다. 눈은 보이지 않았다. 빛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불 꺼요. 전부. 제 것만 남기고.”
“저거 싸울 수 있어요.” B급 사내가 칼을 반쯤 뽑았다. “이 층 잡몹이에요.”
“정지 중입니다. 칼 넣어요.”
뒤에서 랜턴이 차례로 꺼졌다. 나는 내 랜턴 앞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손바닥을 지나온 빛이 핏빛으로 붉었다.
남해에 수중 사진가들이 들어왔을 때 들은 얘기였다. 깊은 데 사는 것들은 붉은빛을 잘 못 보니까 빨간 필터를 끼우고 찍으면 고기가 달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저것들 눈이 그 고기들 눈과 같은지는 나도 몰랐다.
하얀 것들이 빛 가장자리에서 머뭇거렸다. 맨 앞의 것이 쳐들었던 머리를 천천히 내리더니 갈 데를 잃은 듯 옆으로 비껴 걸었다.
마른 가지 꺾이는 것 같은 관절 소리가 홀 바닥에 흩어졌다. 몇 마리는 우리 쪽으로 왔다가 방향을 틀었다.
긴 다리 하나가 내 장화 옆 바닥을 짚었다가 떨어졌다. 그 다리가 짚은 자리에서 물이 튀었다. 나는 숨을 길게 뱉었다. 물에서 하던 대로, 거품이 크게 안 나게.
그때 내 옆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짧고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C급이었다. 아까부터 무릎을 절던 사람이었다. 붉은 어둠과 저 소리가 그에게는 한계였다.
“못 하겠어. 못 하겠어요, 나 먼저 올라갈래요.”
그가 목 안의 사다리를 더듬어 잡는 소리가 났다. 위로. 16층부터 여기까지 선 시간을 다 버리고, 맨 위까지 단숨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하네스를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 내 하네스 고리에서 카라비너를 풀었다. 엄지로 누르면 입이 열리는 쇠고리다. 철컥. 그의 하네스 고리와 내 하네스를 하나로 물렸다.
“가려면 나 끌고 가요.”
그가 사다리를 잡은 채 굳었다. C급이면 나 하나쯤은 끌고 갈 힘이 있다. 끌고 가면 나는 사다리에 부딪히며 딸려 갈 것이고, 고관절은 그걸로 끝일 것이다. 그도 그걸 알았다. 그의 손이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미안해요.” 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무서운 게 맞아요. 물에서도 처음엔 다 그래요. 그래서 줄을 묶고 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한 번, 짧게 두드렸다.
“이게 괜찮냐는 뜻이에요. 괜찮으면 똑같이 두드려요.”
조금 뒤에 내 어깨에 그의 손이 닿았다. 한 번.
홀 저편의 관절 소리는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나는 손바닥 밑의 랜턴마저 끄고, 어둠 속에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다들 들어요. 이제부터 말 안 합니다. 앞사람 어깨에 손 얹고 있어요. 짧게 두드리면 괜찮냐, 받은 사람도 똑같이 두드리면 괜찮다. 네 번은 올라간다. 제가 맨 앞에서 시작하면 뒤로 넘겨요.”
영감이 오철의 손바닥에 눌러 주던 줄 신호를, 끊긴 줄 대신 어깨로 보내는 셈이었다.
앞사람이 없는 나는 내 뒤 C급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손이 돌아왔다. 그가 뒷사람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퍽, 퍽, 퍽.
어둠 속에서 손바닥이 어깨에서 어깨로 건너갔다. 한참 만에 맨 뒤의 공대장까지 갔다가, 같은 길로 대답이 거슬러 돌아왔다. 다들 괜찮았다.
시계를 보니 이 층 시간은 진작 지나 있었다. 정지는 넘겨 서서 손해 볼 일이 없다.
나는 앞으로 손을 뻗어 사다리를 잡고, 뒤로 손을 돌려 C급의 어깨를 네 번 두드렸다. 올라간다.
10층으로 오르는 목 안은 캄캄해서, 사다리 칸을 손으로 더듬어 올랐다. 뒤에서 사람들이 같은 칸을 더듬는 소리가 따라왔다. 내 하네스에 물린 C급의 무게가 칸마다 고관절로 내려와, 나는 이를 물고 칸을 셌다.
칸을 세면서 시계도 봤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지는 않았다. 세 칸 오르고 손목을 얼굴 앞에 들어 야광 눈금을 보고, 다시 세 칸. 물에서 줄 타고 올라올 때 하던 그대로였다.
10층 목 어귀에서 내 랜턴만 켜고, 빛을 손바닥으로 덮어 틈으로 베젤만 비췄다. 5분.
그 층을 지나자 머리가 조금 더 맑아졌다. 아까까지 손끝에서 미끄러지던 숫자들이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두 잔이 한 잔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위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왔다.
통화선이 죽었다. 영감 대신 모르는 목소리가 받았다. 사정이 있어서 잠깐 내려가셨고요.
영감은 내 줄을 놓지 않는다. 화장실도 내가 물 밖에 있을 때 간다. 남해에서 태풍 끝물에 바지선이 기울었을 때도 영감은 난간에 몸을 묶고 줄을 잡았다. 그런 사람이 사정이 있어서 내려갔다면, 그건 누가 만든 사정이었다.
8층에서 답이 나왔다.
바위 턱에 걸어 둔 갈래 밸브가 그대로 있었다. 내 마스크도, 예비 마스크도. 나는 밸브를 열었다. 쉭 하는 소리가 나야 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호스를 손으로 잡아당겨 봤다.
무게가 없었다. 위로 이어져 있어야 할 줄이 굴뚝 안에서 맥없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한참을 당겼더니 끝이 나왔다. 칼로 자른 단면이었다. 세 번쯤 그은 자국이 고무 피복에 남아 있었다.
공대장이 내 어깨 너머로 그 단면을 봤다.
“이거……”
“끊었네요. 위에서.”
뒤에서 누가 욕을 뱉었다. 태성 새끼들. 다른 누가 따라 욕을 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들렸다.
“욕은 위에 가서 해요.” 내가 말했다. “여기서 숨 가빠지면 손해예요. 정지 중에 힘쓰면 안 좋아요.”
욕이 멎었다. 공대장이 낮게 물었다.
“왜 끊었을까요.”
“모릅니다.”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할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끊긴 호스 끝에서 갈래 밸브를 풀어 허벅지 주머니에 넣고, 예비 마스크를 내 목에 걸었다. 내 마스크는 끈째 하네스 고리에 매달았다.
공기가 안 오면 밸브도 마스크도 쓸 데가 없었다. 그래도 그 자리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끊긴 호스만 사려 바위 턱에 걸었다.
지상 공기가 없으니 셈은 줄지 않았다. 덤을 빼고 적어 온 숫자가 남은 정지마다 그대로 맞았다.
8층을 서고 6층으로 올랐다.
6층에서 서 있던 시간은 이 던전에서 내가 겪은 가장 긴 15분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가 말했다. 몇 분마다 내가 앞에서 두드리면, 손바닥이 뒤로 건너갔다가 대답이 되어 돌아왔다.
어느 때는 오래 걸렸다. 맨 끝에서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다시 두드리려는 순간 어깨에 손이 닿았다. 공대장이 다친 어깨 쪽 손으로 두드리느라 늦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랜턴은 내 것만 켜 두었다. 빛을 바닥으로 낮추면 사람들의 발만 보였다. D급 청년은 장화 앞코로 바닥에 숫자를 쓰고 지우기를 되풀이했다. C급들은 서로 어깨를 붙이고 서 있었다.
B급 넷은 벽에 손을 짚었다. 공대장은 맨 끝에서 붕대 감은 팔을 가슴에 붙이고, 다른 손으로 앞사람 배낭끈을 쥐고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았다. 서 있으라고 한 사람도 없었는데.
내 하네스에 물린 C급은 이제 숨을 고르게 쉬고 있었다. 카라비너는 4층에 닿고 나서야 풀었다.
6층을 떠난 순간 베젤을 다시 돌렸다. 여기서부터 맨 위 정지의 시계가 시작된다.
4층 목 어귀에 닿았다. 굴 어귀 분필 글씨가 랜턴 빛에 드러났다. 입구까지 4. 그 아래에 서하가 어제 남긴 글씨도 있었다. 둘째 나감.
4층은 입구로 나가기 전 마지막 정지다. 위로는 굴뚝 네 층과 7미터 물, 그 위가 바지선이었다. 위에서 누가 무엇을 하든 그 소리가 제일 가깝게 들리는 층에서, 정지는 제일 길었다.
토요일에는 서하가 이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오늘은 열한 명이었다.
나는 손목의 띠들을 차례로 확인했다. D 26. C 39. B 52. A 65. 내 왼손목 베젤이 그 숫자들을 향해 천천히 돌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각자 숫자예요. 띠에 적힌 분이 되면 차례로 나갑니다. 약한 사람부터.”
D급 청년이 제 손목을 들여다봤다. 그는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저씨는 안 서도 돼요?”
“저는 0이라서요.”
“0?”
“측정기가 그래요. 머금은 게 없으니까 뱉을 것도 없어요.”
청년이 이해 못 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그래도 웃었다. 벽에 기댄 C급 하나가 따라 웃었다.
“토요일 중계 봤어요.” 공대장이 벽을 보며 말했다. “월요일 새벽에 들어오면서도 다들 그 얘기를 했고요. 그래도 설마 했지. 30층 보스 잡고 나서, 막내가 올라가자고 짐을 싸는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서하도 쓰러졌는데 우리가 뭐라고.”
“그래서 안 올라오셨군요.”
“올라가다 끓을까 봐 못 올라가고, 여기 있으면 굶을까 봐 못 있고. 하루를 그렇게 앉아 있었어요. 통신석 이어서 겨우 말 한마디 올려 보내고.”
그가 제 손목의 띠를 손끝으로 눌렀다.
“이게 있었으면 첫날 올라갔을 텐데.”
16분째에 공대장이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조금 뒤에 C급 사내가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프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무릎을 눌러 봤다. 무늬는 없었다.
20분째.
머리 위 목 안에서 쇠사다리가 울렸다. 여럿이 한꺼번에, 빠르게 내려오는 발소리였다. 랜턴 빛이 목 안을 쓸며 내려왔다. 빛 속에 태성 로고가 박힌 경량 갑옷이 보였다. 어깨마다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맨 앞에서 내려온 남자가 4층 바닥에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빨리 올라가! 태성 구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