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첫 번째 승부
지은이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제1부 무너진 큐
### 제3화. 첫 번째 승부
민호가 다시 태성당구장을 찾은 것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신규 사업 자료를 검토한 뒤였다. 전날 밤에는 집에 돌아가서도 당구장 생각이 났다. 흰 공이 큐 끝에 맞고 굴러가던 모습, 재식이 공의 위치를 확인하며 한참을 고민하던 모습, 점수 차가 벌어졌는데도 끝까지 자신의 리듬을 지키던 성철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특별히 대단한 일을 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아니고, 몇십 점을 연속으로 득점하는 놀라운 경기를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동네 당구장에서 사람들이 공을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민호는 그 평범한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회사에서는 하루가 끝나도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잘못된 보고가 없는지, 누군가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않았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맡게 될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반면 당구장에서는 공이 멈추면 그 배치를 다시 살펴보면 되었다. 잘못 쳤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바꿔야 할지 생각할 수 있었다.
물론 당구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제 몇 번 쳐 본 것으로는 공의 방향조차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해도 괜찮았다.
민호는 당구장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서 장부를 정리하던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어제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까, 제가 공을 너무 세게 치더라고요. 힘을 빼야 한다고 하셨는데 막상 치면 잘 안 됩니다.”
“그게 하루 만에 되면 다들 선수 하죠.”
태성이 웃었다.
“일단 큐부터 잡아 보세요. 어제보다 편해졌는지 확인해 봅시다.”
민호는 벽에 놓인 큐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어제 사용했던 큐와 비슷한 무게였다. 그는 큐를 잡고 당구대 앞에 섰다.
태성은 공을 놓아 주었다.
“오늘은 공을 세게 치는 연습보다 일정하게 치는 연습을 해 보죠. 같은 힘으로 여러 번 쳐도 결과가 조금씩 달라질 겁니다. 그 차이를 느껴 보는 거예요.”
민호는 자세를 잡았다.
처음에는 큐가 오른쪽으로 조금 비켜 나갔다. 두 번째에는 공을 맞히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강했다. 세 번째에는 힘을 줄이려다 스트로크가 끊겼다.
민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어제보다 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처음이라 뭘 잘못하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오늘은 잘못하는 게 보이니까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거죠.”
태성은 민호의 큐를 살펴보았다.
“공을 치는 순간에 멈추지 마세요. 공을 맞히고 나서도 큐가 자연스럽게 나가도록 해 보세요. 맞히는 순간 겁을 먹으면 손이 먼저 멈춥니다.”
민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큐를 뒤로 당겼다가 부드럽게 앞으로 보냈다. 공이 굴러갔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그렇죠. 방금은 조금 나았습니다.”
민호는 웃으며 큐를 세웠다.
그때 입구에서 재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성 형, 오늘은 제가 먼저 왔네요.”
재식은 가방을 내려놓고 민호를 바라보았다.
“또 오셨네요. 벌써 재미가 붙으셨나 봅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공이 생각대로 안 가니까 오기가 생기네요.”
“그게 시작이죠.”
재식이 웃었다.
“그런데 오기만으로 치면 손해를 많이 봅니다. 공이 안 맞을 때마다 힘을 더 주게 되거든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안 들어가니까 다음에는 더 세게 쳤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래요.”
재식은 자신도 실수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 민호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당구를 치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오늘 시간 있으시면 간단하게 한 게임 해 보시겠습니까?”
민호는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잠시 멈칫했다.
“제가 재식 씨하고요?”
“네. 물론 실력 차이는 많이 날 겁니다. 그래도 실제로 한 게임 해 보면 연습할 때와 다른 점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민호는 당구대를 바라보았다.
어제는 공을 맞히는 것만으로도 어려웠다. 그런 자신이 재식과 경기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혼자 공을 칠 때와 상대가 있는 상태에서 공을 칠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고 싶었다.
“좋습니다. 대신 제가 너무 못 쳐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에는 못 쳤습니다.”
재식은 큐를 골라 들었다.
태성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럼 친선으로 한 게임 하시죠. 점수는 무리하지 말고, 민호 씨가 실제 경기 분위기를 경험하는 걸로 합시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당구대 양쪽에 섰다.
경기 전 재식이 먼저 인사했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민호도 큐를 세우고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짧은 인사였지만 민호는 이상하게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서 발표할 때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실수하면 평가가 나빠질 것 같았고,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능력을 의심받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재식은 자신보다 훨씬 잘 치는 사람이었지만, 민호가 초보자라는 이유로 경기를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민호 역시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뱅킹을 했다.
공이 쿠션을 맞고 돌아왔다. 재식의 공이 먼저 기준에 가까운 위치에 멈췄고, 초구는 재식이 치게 되었다.
재식은 당구대 위의 공을 살폈다. 초구를 신중하게 준비한 뒤 스트로크를 했다.
첫 샷은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민호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잘 치는 사람이라면 초구부터 쉽게 득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재식은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공의 위치를 확인한 뒤 조용히 큐를 세우고 옆으로 물러났다.
이제 민호 차례였다.
민호는 당구대 앞으로 다가갔다.
공의 배치를 보니 어제보다 조금 익숙해 보였다. 수구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대략적인 방향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큐를 뻗어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막상 샷을 하려는 순간 재식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공을 맞히지 못하면 어떻게 보일까.
민호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상대는 자신이 초보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는 평소보다 힘을 주어 큐를 밀었다.
수구는 적구를 맞혔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적구를 향해 가던 공은 쿠션 근처에서 방향이 어긋났다.
득점은 실패였다.
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재식이 당구대에 다가와 공의 위치를 살폈다.
“처음에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죠.”
“보고 있으니까 괜히 잘 치고 싶어지네요.”
민호가 솔직하게 말했다.
재식은 웃었다.
“그 마음이 들면 공보다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평소에 하던 것도 잘 안 되죠.”
재식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구대 옆으로 물러나 재식의 샷을 지켜보았다.
재식은 다음 배치를 확인하고 잠시 고민했다. 수구를 어느 정도 두께로 맞힐지, 득점한 뒤 다음 공이 어디에 놓일지 살피는 듯했다. 자세를 잡았다가 일어서더니 반대편으로 돌아가 다시 공을 바라보았다.
민호는 그 모습을 보며 어제 태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민이 끝났으면 실행해야 한다.
재식은 충분히 살핀 뒤 다시 자세를 잡았다. 큐가 부드럽게 나갔다. 수구가 적구를 맞히고 쿠션을 돌아 두 번째 적구를 향했다.
득점이었다.
재식은 잠시 공의 위치를 확인한 뒤 다음 샷을 준비했다.
민호는 감탄했다. 공을 맞히는 순간뿐 아니라, 그 뒤의 위치까지 계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은 눈앞의 공을 맞히는 데도 정신이 없는데 재식은 그다음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샷도 득점으로 이어졌다.
민호는 당구대 옆에 서서 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재식이 연속으로 득점하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아직 점수 차가 크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자신이 경기를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식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재식이 공을 놓치면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 득점하면 점수 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민호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구를 즐기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식은 세 번째 샷에서 득점에 실패했다. 수구가 첫 번째 적구를 맞힌 뒤 예상과 다른 위치에 멈췄다.
민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당구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비교적 편안한 배치였다. 조금만 침착하게 치면 득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호는 큐를 뻗었다.
이번에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방금 재식이 실수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구를 바라보며 스트로크를 했다.
탁.
수구가 적구를 맞혔다.
하지만 두께가 맞지 않았다. 공은 예상했던 경로를 벗어나 쿠션 가까이에서 멈췄다.
또 실패였다.
민호는 큐를 든 채 한동안 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공을 즐기려고 했는데, 어느새 점수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대가 실수하면 기뻐하고, 자신이 실수하면 조급해졌다.
회사에서 자신이 승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렸던 것과 비슷했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인정받는 것이 중요해졌고,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신경 쓰였다.
민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첫 게임이었다.
재식이 그에게 말했다.
“한 번 더 해 보세요. 지금 공은 아까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민호는 당구대를 살폈다.
“그런데 방금보다 더 긴장됩니다.”
“그럴 수 있죠. 한번 실수하고 나면 다음에는 만회하고 싶어지니까요.”
재식은 큐를 세우고 기다렸다.
“그래도 다음 공은 다음 공입니다. 아까 실수한 것까지 같이 치려고 하면 더 어려워집니다.”
민호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아까 실수한 것까지 같이 치려고 한다.
회사에서도 그랬다. 한 번 평가가 좋지 않으면 다음 일에서는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민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득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았다. 수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큐를 어떤 방향으로 보내야 하는지에만 집중했다.
탁.
공은 적구를 맞혔다.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왜 실패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수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얇게 적구를 스쳤다. 두께를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민호는 공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조금 얇았네요.”
태성이 옆에서 말했다.
“그렇군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한 것이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은 실수했다고 해서 마음이 급해지지는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반가웠다.
경기는 계속되었다.
재식은 몇 차례 더 득점했고, 민호는 득점보다 실수가 많은 상태로 경기를 이어 갔다. 간혹 공이 예상보다 잘 맞을 때도 있었지만, 다음 샷에서는 다시 힘이 들어가거나 두께를 잘못 판단했다.
민호는 점점 지쳐 갔다.
팔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머리가 피곤했다. 공을 볼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어느 쪽을 맞힐지, 얼마나 힘을 줄지, 수구가 어디로 움직일지, 다음 공은 어떻게 놓일지.
재식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생각하는 대신 하나씩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경기 후반, 민호에게 비교적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수구와 적구의 위치가 앞선 배치보다 단순했다. 태성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말고, 아까 배운 대로 해 보세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을 바라보았다. 득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민호는 자신이 다시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고 있었다.
그는 자세를 풀고 일어섰다.
재식이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 보시려고요?”
“네. 한번 서두르지 않고 해 보려고요.”
민호는 당구대 주변을 천천히 돌아 공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생각한 경로가 맞다고 여겼지만, 반대편에서 보니 조금 다른 각도가 보였다.
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큐를 뒤로 당기는 속도를 늦췄다. 스트로크를 멈추지 않고 부드럽게 밀었다.
탁.
수구가 첫 번째 적구를 맞혔다. 이어 두 번째 적구까지 정확하게 맞았다.
득점이었다.
민호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득점한 것인지 확인하듯 공의 위치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여러 번 실패했던 샷이었기에 기쁨이 조금 늦게 찾아왔다.
태성이 웃었다.
“좋습니다. 방금은 괜찮았어요.”
재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샷이었습니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연속 득점도 아니었고, 어려운 기술을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한 번의 득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득점은 조금 전과 달랐다. 누군가가 실수해서 얻은 기회가 아니었다. 자신이 서두르지 않고 공의 위치를 다시 살핀 뒤,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득점이었다.
그는 큐를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공이 맞았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어떻게 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뻤다.
경기는 결국 재식의 승리로 끝났다.
점수 차는 꽤 컸다. 민호는 몇 차례 득점했지만, 재식의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공이 멈췄을 때 민호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잘 쳤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서둘렀고, 언제 상대의 실수를 기다렸으며, 어느 순간 다시 집중할 수 있었는지 떠올랐다.
민호는 재식에게 다가갔다.
“잘 쳤습니다.”
재식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처음 치신 것치고는 금방 적응하셨네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식은 웃으며 큐를 정리했다.
민호는 그 말이 빈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식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과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을 얕보지 않았고,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도 않았다.
태성이 민호에게 물었다.
“첫 게임 해 보시니까 어떠셨어요?”
민호는 잠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기고 싶었습니다. 잘 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요.”
“그럴 수 있죠.”
“그런데 그러다 보니 상대가 실수하기만 기다리고 있더군요. 제가 잘 치는 것보다 상대가 못 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태성은 말없이 들었다.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저는 당구를 즐기려고 온 건데, 어느새 점수에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태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가 시작되면 누구나 이기고 싶어집니다.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이기고 싶은 마음 때문에 공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상대를 존중하지 않게 되면 문제가 되는 거죠.”
민호는 당구대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직 공도 잘 못 보는데, 벌써부터 이기려고 했네요.”
“그것도 배워 가는 과정입니다. 다음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지면 되는 거죠.”
민호는 웃었다.
그는 오늘 패배했다. 점수만 놓고 보면 재식과의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사에서 승진에 실패했을 때처럼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당구대 위에서는 잘못 친 공이 그대로 남았다. 잘못 판단했다면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 되었다. 한 번의 실패가 자신이라는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민호는 현우의 방문 앞에 섰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문을 두드리려다가 잠시 멈췄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지금 말을 걸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 왜 아직 자지 않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취업 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계획은 세웠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차례로 물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민호는 휴대전화를 꺼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는 오늘 당구장에 다녀왔다. 네가 주말에 하려던 이야기, 그때 천천히 듣겠다.
잠시 뒤 방문 안쪽에서 휴대전화 알림 소리가 들렸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민호는 문 앞에 조금 더 서 있다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아들과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구 실력도 초보 수준이었다. 회사에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도 불분명했다.
그런데 오늘은 적어도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끌려가면 눈앞의 공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민호는 책상 위에 놓인 업무 자료를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승진에서 탈락한 사실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료를 펼쳤다가 다시 덮었다.
오늘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일 해야 할 일을 차분히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번 당구장에서는 오늘보다 조금 더 천천히 공을 바라보기로 했다.
민호는 아직 당구를 잘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승부에서 지고도, 다음 경기가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