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다음 공을 남기는 사람
지은이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제1부 무너진 큐
### 제4화. 다음 공을 남기는 사람
민호는 당구장에 들어서자마자 빈 당구대를 살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구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 자체가 어색했는데, 이제는 어디에 큐가 놓여 있는지부터 눈에 들어왔다. 구석 당구대에서는 성철이 혼자 연습하고 있었고, 가운데 자리에서는 재식이 태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호가 다가가자 재식이 먼저 손을 들었다.
“오늘도 연습하러 오셨습니까?”
“네. 어제는 집에서도 자꾸 공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거 좋은 신호일 수도 있고, 나쁜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당구가 머릿속에서 안 나가면 나쁜 겁니까?”
“당구 생각만 하다가 잠을 못 자면 나쁘겠죠. 하하.”
민호도 웃었다. 회사에서라면 업무 이야기가 아닌 대화가 이렇게 편하게 이어지는 일이 드물었다. 이곳에서는 누가 어느 회사의 부장인지, 누구의 승진이 늦어졌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 잘 치는 사람은 잘 치는 사람대로, 처음 시작한 사람은 처음 시작한 사람대로 당구대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태성이 민호에게 큐를 건넸다.
“오늘은 혼자 연습하시기 전에 저쪽 게임부터 잠깐 보시죠.”
재식이 성철과 경기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당구대 양쪽에 섰다. 재식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성철도 가볍게 인사했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두 사람은 뱅킹으로 초구 순서를 정했다. 공이 쿠션을 맞고 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며 민호는 자연스럽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재식의 초구 치기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히고 첫 번째 쿠션을 향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쿠션을 돌아 두 번째 목적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마지막 길이 조금 모자랐다. 공은 아깝게 비껴갔다.
재식은 아쉬운 표정을 잠깐 지었을 뿐, 곧바로 당구대에서 물러나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다. 큐를 쥔 손을 내려다보거나 방금 친 공을 탓하지 않았다. 성철이 차례를 준비하는 동안 재식은 조용히 다음 배치를 살폈다.
성철은 수구와 제1적구 사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무리하게 세게 치기보다는 두께를 맞춰 길을 만들려는 듯했다. 그는 자세를 잡고 큐를 천천히 밀었다. 수구는 첫 번째 목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따라 움직였지만, 두 번째 적구를 향해 들어가는 각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득점은 나오지 않았다.
“아깝네요.”
민호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태성이 옆에서 말했다.
“공이 맞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저 배치에서 무엇을 노렸는지 보셨습니까?”
민호는 당구대를 다시 바라봤다.
“두께를 얇게 맞춰서 쿠션을 길게 쓰려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득점이 안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에 비슷한 배치가 나왔을 때 무엇을 바꿀지 생각해야죠.”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라면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먼저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어떤 위험을 예상했는지, 왜 그 판단을 했는지,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었는지. 그러나 당구대에서는 변명할 시간이 없었다. 공은 이미 멈춰 있었고, 다음 차례는 상대에게 돌아가 있었다.
경기는 팽팽하게 이어졌다. 재식은 어려운 배치에서도 무리하게 힘을 쓰지 않았다. 공의 두께와 수구가 지나갈 길을 살핀 뒤, 득점 가능성이 있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몇 차례는 원하는 대로 공이 움직였고, 몇 차례는 마지막 각도가 어긋났다. 성철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득점이 나오지 않은 뒤에도 서둘러 다음 공을 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배치를 다시 살폈다.
그러던 중 재식에게 까다로운 배치가 남았다. 수구와 제1적구의 거리가 가까웠고, 두 번째 적구는 당구대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단순히 맞히는 것만 생각한다면 길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재식은 당구대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한쪽에서 보다가 반대편으로 옮겨 갔고,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큐 끝으로 공을 가리키며 머릿속으로 길을 그리는 듯했다.
민호는 재식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조금 전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던 경기가 이 공 하나에서 흐름이 끊길 수도 있었다.
재식은 결국 앞돌리기를 선택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돌아 두 번째 목적구로 향하도록 길을 잡았다. 스트로크는 짧고 단단했다. 수구가 첫 번째 적구를 맞히고 쿠션으로 향했다. 민호의 눈도 공을 따라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쿠션을 돌아 나온 수구가 마침내 두 번째 목적구를 맞혔다.
득점이었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쵸크를 들어 큐를 가볍게 두드렸다. 재식은 잠깐 민호 쪽을 바라보고 웃었다. 성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이네요. 굿 샷!”
성철의 말에는 억지가 없었다. 상대의 득점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사실과 그 공이 훌륭했다는 사실은 별개의 일이었다.
재식은 곧바로 다음 공을 준비했다. 방금 성공한 공에 취해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수구와 두 적구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큐를 잡은 손의 힘을 조절했다. 다음 공에서는 득점하지 못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힌 뒤 예상했던 경로보다 짧게 움직여 두 번째 목적구를 비껴갔다.
재식은 몸을 일으켰다.
“방금 공은 길을 너무 짧게 봤네요.”
성철이 자기 차례를 준비했다. 민호는 재식의 실패보다 그가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눈길이 갔다. 조금 전 좋은 공을 성공시켰을 때도, 방금 놓쳤을 때도 재식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공했다고 서두르지 않았고, 실패했다고 표정을 굳히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경기가 끝났을 때는 재식이 이겼다. 그러나 점수 차는 크지 않았다. 성철도 마지막까지 자기 공을 치기 위해 신중하게 당구대 주위를 돌았다.
“잘 쳤습니다.”
성철이 먼저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몇 공은 저도 긴장했습니다.”
재식의 대답에 성철이 웃었다.
“그런데 그 앞돌리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그 길이 안 보이더라고요.”
“저도 처음부터 확신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른 길을 생각하다가 그쪽이 조금 더 낫겠다 싶어서 쳤습니다.”
민호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재식은 방금 성공한 공을 자신의 대단한 실력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이 좋았다는 말로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어떤 선택을 했고, 왜 그 선택을 했는지 담담하게 설명했다.
태성이 민호에게 말했다.
“이제 연습해 보시죠.”
민호는 큐를 들고 빈 당구대로 향했다. 처음에는 공을 맞히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공을 맞힌 뒤 수구가 어디에 멈출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태성이 수구와 제1적구, 제2적구를 적당한 간격으로 놓았다.
“한 번 쳐보세요. 이번에는 득점만 생각하지 말고, 수구가 어디에 멈추면 다음 공을 치기 편할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민호는 당구대 위를 살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히는 것까지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원하는 곳에 수구를 보내려면 두께뿐 아니라 회전과 속도도 고려해야 했다. 재식이 조금 전 보여 준 공이 떠올랐다. 그는 단순히 공을 맞힌 것이 아니라, 공이 지나갈 길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민호는 큐를 잡고 브릿지를 한 다음 자세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방향으로 치면 제1적구는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하여 수구가 쿠션 가까이에 붙어 버리면 다음 공을 다루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민호는 한 걸음 물러섰다. 당구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다시 살폈다. 무슨 대단한 길이 갑자기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처음 선택한 방향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고, 그 중에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플레이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두께를 조금 바꾸고 스트로크의 세기를 낮췄다. 큐가 수구를 밀고 나갔다. 수구는 제1적구를 맞혔지만, 두 번째 적구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수구가 쿠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췄다.
“득점은 안 됐네요.”
민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태성은 당구대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다음 공을 생각하고 친 건 맞습니까?”
“네. 득점이 안 나와도 수구가 너무 멀리 도망가지는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 생각을 해낸 겁니다. 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또 다른 문제고요.”
민호는 수구가 멈춘 자리를 살폈다. 결과만 보면 실패였다. 그러나 아까처럼 무작정 세게 쳤다면 공이 어디로 튈지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적어도 무엇을 의도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같은 배치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스트로크가 너무 약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힌 뒤 원하는 경로를 만들지 못했다. 세 번째에는 힘이 조금 과했다. 수구는 예상보다 멀리 움직였다. 민호는 그때마다 당구대 주위를 돌며 공이 멈춘 위치를 확인했다. 실패가 반복되자 처음의 의욕이 조금씩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왜 생각한 대로 안 되는 거지?’
민호는 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서 중요한 보고서를 준비할 때도 그랬다. 한 번 틀어지면 빨리 만회하려고 했고, 일이 늦어지면 평소보다 더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민호는 큐를 당구대에 기대어 놓고 잠시 손을 폈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잠깐 쉬었다 하시죠.”
태성이 물을 건넸다.
“제가 너무 급하게 치나요?”
“조금 그렇습니다.”
태성은 웃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공이 안 맞으면 빨리 다음 공을 쳐서 만회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공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한 번 놓친 공을 다시 칠 수는 없어요. 다음 공이 남았을 뿐이지.”
민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건 회사 일도 비슷하네요. 이미 지나간 일을 만회하려고 서두르다가 다음 일까지 망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다만 당구장에서는 공이 어디에 멈췄는지 바로 볼 수 있잖습니까. 그걸 보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민호가 알아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민호는 다시 당구대 앞에 섰다. 이번에는 득점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공의 위치를 살피고, 가능한 길을 하나씩 떠올렸다.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장 무리하지 않을 방향을 골라 천천히 큐를 밀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혔다. 이어 쿠션을 돌아 두 번째 적구를 향해 움직였다. 공은 두 번째 적구에 닿지 못했다. 아주 조금 짧았다.
민호는 아쉬움에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큐를 내려치거나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수구가 멈춘 위치를 확인한 뒤, 자신이 예상했던 경로와 실제 경로가 어디에서 달라졌는지 살폈다.
“조금 짧았네요.”
“네. 다음에는 그 차이를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태성의 말에 민호는 작게 웃었다. 아직은 한 점을 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재식이 보여 준 앞돌리기처럼 멋진 공을 치려면 얼마나 더 연습해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았다. 공이 맞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고, 다음에는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조금씩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연습을 마칠 무렵 민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죠? 얘기할 게 있어요.’
민호는 메시지를 읽고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인지, 얼마나 걸릴 일인지, 자신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부터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짧게 답했다.
‘그래. 시간 비워 둘게. 네 이야기부터 들을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민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아들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그 이야기를 들은 자신이 어떤 기분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당구대 위에 놓인 공들을 바라봤다. 공은 한 번 움직이면 멈추고, 멈춘 자리에서 다시 길을 찾아야 했다. 방금 전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남아 있는 공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민호는 큐를 제자리에 정리했다. 오늘도 제대로 득점한 공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당구대를 떠나는 발걸음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보다 가벼웠다.
그는 아직 잘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기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공을 맞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다음 공을 어디에 남길 것인가.
민호는 그 질문을 마음속에 담은 채 당구장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