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당구대 앞에서는 누구나 초보다
지은이 앙상블 · 2026-10-22
# 《퍼펙트큐》
## 제1부 무너진 큐
### 제2화. 당구대 앞에서는 누구나 초보다
강민호는 큐를 내려놓고 당구대 위에 놓인 흰 공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시도는 빗나갔고, 두 번째 시도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공을 맞히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조금 더 주면 될 것 같다가도, 막상 큐를 뻗으면 공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갔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태성이 말했다.
“공 하나를 똑바로 보내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네요.”
“눈으로 보는 방향하고 큐가 나가는 방향이 꼭 같지는 않거든요.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큐가 비틀어지기도 하고요.”
태성은 민호의 자세를 살폈다. 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상체도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한 번 더 해 보세요. 이번에는 잘 치려고 하지 말고, 큐를 똑바로 보내는 데만 집중해 보세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회사에서 일을 잘하려고 노력한 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승진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그는 늘 잘하려고 했다.
그런데 당구장에서는 잘하려는 마음부터 내려놓으라고 했다.
민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큐를 뒤로 당기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팔에 들어간 힘을 빼고, 큐 끝이 공의 중심을 향하도록 신경을 썼다.
탁.
흰 공이 곧게 굴러갔다.
앞에 놓인 공을 맞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방금 전보다 방향이 안정적이었다.
“조금 나아졌네요.”
태성이 말했다.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 정도에도 나아졌다고 합니까?”
“처음부터 잘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당구는 한 번 잘 쳤다고 계속 잘 치는 것도 아니고요.”
태성은 큐를 민호에게 돌려주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무리해서 오래 치면 나쁜 자세부터 몸에 익을 수 있으니까요.”
그때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태성 형, 오늘도 손님 가르치고 있어요?”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마흔 후반쯤으로 보였고, 한 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당구장 안을 둘러보다가 민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처음 오신 분이야?”
“네. 강민호 씨입니다. 당구는 거의 처음이라고 하시네요.”
“아, 그러세요?”
남자가 민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김재식입니다. 여기 자주 옵니다.”
민호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강민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식은 민호가 들고 있던 큐와 당구대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이면 재미있으시겠네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나씩 알아 가는 재미가 있죠.”
그 말은 친절하게 들렸다. 그러나 재식의 눈에는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려는 듯한 기색도 있었다. 민호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식은 당구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형, 오늘 저녁에 사람들 오기로 했죠?”
“응. 일곱 시쯤 모일 거야.”
“그럼 저도 한 게임 치고 기다려야겠네.”
태성이 웃으며 말했다.
“너는 기다리는 것보다 치는 게 더 좋잖아.”
“당구장에 왔는데 기다리기만 하면 아깝죠.”
재식은 큐를 골라 들었다. 손에 익은 큐를 잡는 모습부터 자연스러웠다. 그는 초크를 가볍게 문지른 뒤 당구대 위의 공을 확인했다.
민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재식은 공의 배치를 확인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당장 칠 수 있는 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득점한 뒤 수구가 어디에 멈출지도 살피는 것 같았다. 몇 차례 몸을 숙였다가 다시 일어섰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긴 뒤에야 자세를 잡았다.
큐가 움직였다.
탁.
공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재식은 득점 여부를 확인한 뒤 다음 배치를 살폈다. 첫 득점에 기뻐하거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음 공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민호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당구는 단순히 눈앞의 공을 맞히는 게임이 아니었다. 한 번의 샷이 다음 샷을 결정했다. 눈앞의 득점만 생각하면 다음에 어려운 공이 남을 수도 있었다.
재식이 두 번째 샷을 준비할 때 태성이 민호에게 낮게 말했다.
“저 친구는 공을 잘 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공을 다 넣는 건 아니에요. 실수도 하고, 어려운 배치에서는 오래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망설이는 모습이 별로 없네요.”
“망설이지 않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만큼 고민하고 치는 거죠. 고민이 끝났으면 실행해야 하고요.”
민호는 재식의 손을 바라보았다.
재식은 큐를 쥔 손에 힘을 지나치게 주지 않았다. 스트로크는 일정했고, 샷을 하기 직전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공이 맞는 순간까지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세 번째 샷에서 재식은 득점에 실패했다.
수구가 적구를 맞힌 뒤 예상했던 경로와 조금 다르게 움직였다. 재식은 잠시 공의 위치를 바라보더니 큐를 세웠다.
“아깝네요.”
태성이 말했다.
“두께를 조금 잘못 봤습니다.”
재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실수를 변명하지도 않았고, 공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음에 어떤 공이 남았는지 살핀 뒤 당구대 옆으로 물러났다.
민호는 그 장면을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치는 사람이라면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공을 치기 전에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식도 틀렸다.
다만 틀린 뒤에 보이는 태도가 달랐다.
“한번 해 보실래요?”
재식이 민호에게 물었다.
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제가요?”
“네. 방금 제가 놓친 공이 어려운 배치는 아니니까요. 물론 처음이시면 득점하기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재식은 일부러 쉬운 공이라고 과장하지 않았다. 민호에게 잘할 수 있다고 빈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공의 배치를 보고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민호는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보세요. 안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민호는 큐를 받아 들었다.
당구대 위에는 수구와 적구가 놓여 있었다. 그는 공의 위치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 쪽으로 쳐야 할지 생각했지만, 공이 부딪친 뒤 어떻게 움직일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치면 됩니까?”
재식은 곧바로 답을 주지 않았다.
“먼저 어디를 맞힐지 생각해 보세요. 그다음에 수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보는 겁니다.”
민호는 다시 공을 살폈다.
“저쪽을 맞히면 되는 겁니까?”
“맞습니다. 다만 맞히는 것과 원하는 방향으로 보내는 건 다른 문제죠.”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큐를 뻗어 자세를 잡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조금 두껍게 맞혀야 할 것 같기도 했고, 힘을 더 주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결국 평소보다 강하게 쳤다.
탁!
수구가 적구를 맞혔지만, 예상했던 경로로 이어지지 않았다. 공은 쿠션을 타고 돌아 나왔고, 득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호는 큐를 세운 채 당구대를 바라보았다.
“힘이 너무 들어갔네요.”
태성이 말했다.
민호는 멋쩍게 웃었다.
“잘 치려고 하니까 더 안 되는군요.”
“방금은 잘 치려는 것보다 실패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은데요.”
태성의 말에 민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패하지 않으려는 마음.
회사에서도 그랬다. 자신이 맡은 일을 틀림없이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료를 여러 번 검토했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가능한 변수를 모두 고려했다. 그런데 정작 승진 심사에서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받아들었다.
당구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앞서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 더 해 보겠습니다.”
민호는 큐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득점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수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만 생각했다.
탁.
공은 적구를 비껴 갔다.
또 실패였다.
민호의 입술이 굳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큐를 당구대에 기대려다가 멈췄다. 초보자가 몇 번 실패했다고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왜 이렇게 안 되는지 답답함이 올라왔다.
재식이 그 모습을 보았다.
“처음부터 잘 맞히면 오히려 이상하죠. 저도 처음에는 공이 어디로 갈지 몰랐습니다.”
“지금은 다 알 것 같은데요.”
“지금도 모르는 공이 많습니다. 아는 공보다 모르는 공이 더 많을지도 모르죠.”
재식은 웃으며 말했다.
“다만 모르는 공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법을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민호는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날 저녁, 당구장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퇴근한 직장인도 있었고, 근처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이는 달랐지만 당구대 앞에 서면 모두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공의 위치를 살피고, 큐를 고르고, 상대가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크게 웃기도 했고, 좋은 샷이 나오면 감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다고 경기 중인 사람을 방해할 만큼 떠들지는 않았다. 샷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민호는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회사에서는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신경을 써야 했다. 말 한마디가 평가가 되기도 했고, 침묵이 의사 표시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공이 어디에 멈췄는지가 중요했다. 좋은 샷은 좋은 샷이었고, 실수는 실수였다. 적어도 당구대 위에서는 결과가 눈앞에 드러났다.
물론 사람 사이의 경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재식은 단골 손님 한 명과 경기를 시작했다. 상대는 오십 대 중반의 남자로, 이름은 오성철이었다. 성철은 말수가 적었지만 샷을 준비할 때마다 공의 위치를 꼼꼼하게 살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두 사람은 큐를 들고 마주 섰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재식이 먼저 인사했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성철도 고개를 숙였다.
짧은 인사였다. 누가 더 잘 치는지, 누가 이길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서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다는 뜻을 전한 뒤 두 사람은 뱅킹을 준비했다.
민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뱅킹을 마치고 초구를 정했다. 재식이 먼저 경기를 시작했다. 수구가 적구를 향해 나아갔지만 첫 샷부터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성철은 공의 배치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자세를 잡았다.
첫 득점은 성철에게서 나왔다. 어려운 각도는 아니었지만 수구를 정확한 두께로 맞혀 다음 공을 치기에도 나쁘지 않은 위치를 만들었다.
재식은 성철의 득점을 지켜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샷에서 성철은 조금 까다로운 배치를 만났다. 잠시 당구대 주변을 돌아보며 경로를 살폈고, 큐를 잡은 손을 풀었다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 번에 치지 않고 일어선 뒤 다시 공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조용했다.
성철은 마침내 샷을 했다.
수구가 첫 번째 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돌아 두 번째 적구를 향했다. 공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고, 득점이 완성되었다.
재식은 들고 있던 큐에 초크를 가볍게 두드렸다.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상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좋은 샷을 인정하는 표시였다.
성철은 짧게 웃고 다음 배치를 확인했다.
민호는 그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상대가 좋은 공을 쳤다고 해서 자신의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과 승부를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경기가 중반을 넘어서자 재식이 연속으로 득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철과 점수 차가 크지 않았지만, 몇 차례 샷이 이어지면서 간격이 벌어졌다.
성철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는 다음 배치를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다. 수구의 경로를 확인하고 자세를 잡았지만, 첫 스트로크에서 큐가 흔들렸다. 공은 적구를 맞히지 못하고 쿠션 쪽으로 빠졌다.
성철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식이 당구대 옆으로 다가가 공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유리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웃거나 상대를 의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샷을 준비하기 위해 조용히 큐를 들었다.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말했다.
“성철 형님, 점수 차가 너무 나는데 그냥 빨리 끝내고 한잔하러 가시죠. 게임비도 적게 나오게요.”
말한 사람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그러나 성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민호도 그 말을 듣고 어색해졌다. 점수 차가 벌어졌으니 빨리 끝내자는 말은 겉으로는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경기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진지하게 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재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아직 경기 중이잖아요. 끝까지 치셔야죠.”
말투는 차분했지만 분명했다.
농담을 한 사람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성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당구대 앞으로 걸어가 공을 살폈다.
민호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점수 차가 벌어졌다고 해서 경기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빨리 끝내라는 말은 상대의 노력을 가볍게 만드는 말이었다. 성철이 이길 가능성이 낮아졌더라도, 그는 자신의 경기 리듬을 유지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했다.
잠시 뒤 성철이 샷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사람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이러다 타임파울 걸리겠는데요. 좀 빨리 치시죠.”
이번에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성철은 큐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나치게 오래 시간을 끌고 있었다고 단정할 상황도 아니었다. 어려운 배치에서 경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재식이 다시 말했다.
“규정에 따라 진행하면 됩니다. 굳이 그렇게 재촉할 필요는 없어요.”
당구장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성철은 다시 공을 바라보았다. 잠깐 숨을 고른 뒤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수구와 적구의 위치를 확인하고, 큐가 나아갈 방향을 정한 뒤 샷을 했다.
득점에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성철은 큐를 거칠게 내려놓거나 상대에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공의 위치를 확인하고 조용히 옆으로 물러났다.
재식은 다음 샷을 준비했다.
민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식은 앞서고 있었지만 성철을 무시하지 않았다. 성철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민호는 당구 실력이 단순히 득점 숫자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예의를 지킨다고 경기에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성철이 정중하게 경기를 이어 간다고 해서 점수 차가 저절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기 경기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경기는 결국 재식의 승리로 끝났다.
성철은 큐를 세우고 재식에게 다가갔다.
“잘 쳤습니다.”
재식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재식은 이겼다는 이유로 자신의 운이 좋았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성철 역시 패배를 변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공을 정리했다.
민호는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이긴 사람이 반드시 겸손한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경기를 인정하는 짧은 말 한마디가 더 자연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때 태성이 민호 옆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셨어요?”
“재식 씨가 잘 치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성철 씨도 끝까지 집중하려고 하더군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점수 차가 벌어지면 마음이 급해져요. 빨리 만회하고 싶으니까요. 그러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실수를 하기도 하죠.”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빨리 치라고 하면 더 흔들릴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경기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리듬이 있습니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과 상대를 불필요하게 재촉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재식 씨는 왜 그렇게 차분합니까? 앞서고 있으니 여유가 있는 건가요?”
태성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앞서고 있을 때는 앞서고 있다는 이유로 방심하기 쉽고, 뒤지고 있을 때는 따라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서두르기 쉽습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쳐야 할 공을 놓치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지금 쳐야 할 공이라…….”
“당구는 결국 눈앞의 공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물론 그다음 공도 생각해야 하지만, 아직 치지도 않은 공 때문에 지금 공을 놓쳐서는 안 되겠죠.”
민호는 당구대를 바라보았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까.
승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당장 해야 할 일을 지나치게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대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평가만 의식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친 적은 없었을까.
그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당구장에 들어오기 전까지 민호는 오늘 하루를 실패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승진에서 탈락했고, 자신이 준비한 자료는 발표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집에 돌아가면 아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실패한 뒤에 무엇을 하느냐는 자신의 몫이었다.
민호는 태성에게 물었다.
“제가 당구를 배우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태성이 웃었다.
“얼마나 잘 치고 싶은지에 따라 다르겠죠.”
“잘 치고 싶습니다.”
민호는 곧바로 대답했다가 잠시 멈췄다.
“아니, 잘 치고 싶다는 말도 맞지만…… 오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태성은 민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은 출발입니다. 처음부터 이기려고만 하면 당구가 금방 힘들어질 수 있어요. 잘 맞는 날도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도 있거든요.”
“회사 생활하고 비슷하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다만 당구대 위에서는 적어도 공이 어디에 멈췄는지 숨길 수는 없습니다.”
민호는 웃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당구장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 왔다고 말해도 괜찮았고, 공을 놓쳐도 괜찮았다.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당구장 문을 나서기 전, 민호는 태성에게 물었다.
“내일도 와도 됩니까?”
“그럼요. 다만 내일 오신다고 갑자기 공이 잘 맞지는 않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민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오늘도 잘 맞지는 않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태성이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민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내겠다. 네 얘기부터 듣자.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민호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예전 같았으면 왜 답이 없느냐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기보다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늘 당구장에서 배운 것은 공을 맞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상대가 앞서더라도 경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태도, 실수했다고 서두르지 않는 마음, 이겼다는 이유로 상대를 낮추지 않는 자세였다.
물론 그는 아직 그런 것들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에 당구대 앞에 서면 또 힘을 줄 수도 있었다. 상대가 연속으로 득점하면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이 실수했을 때 변명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민호는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도 회사에 가야 했다. 승진 결과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고, 신규 사업 자료도 마무리해야 했다. 현우와의 대화 역시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 하루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완전히 실패한 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는 아직 공 하나도 제대로 맞히지 못하는 초보자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다음 날 다시 당구대 앞에 설 이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