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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빛의 저격수

作 일곱날의빛

첫눈은 하룻밤 사이에 황궁 지붕 위에서 질척한 물이 되어 있었다.

처마 끝에서 녹은 눈이 똑, 똑 떨어졌다. 붉은 접견실의 높다란 창에는 성에가 고사리 무늬로 번져 있었고, 그 너머로 납빛 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실내는 지나치게 따뜻했다. 벽난로에서는 향나무가 타들어 갔고, 금박을 두른 거울마다 불꽃이 겹겹이 어른거렸다. 그 따뜻함이 오히려 사람을 질식시키는 방이었다.

그 창 아래, 맘몬의 수장 볼트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지하 도시의 포식자. 사람을 도륙하면서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던 사내였다.

그런 그가 황제의 은빛 구두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이마를 조아리고 있었다.

“전하. 제국 마도 무기의 정점에 선 아르카눔을…… 이 무지한 신하에게 맡겨 주신다면, 맘몬의 모든 자본과 어둠의 기술을 전하의 발밑에 바치겠나이다.”

높은 황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주인, 황제 에드워드였다.

그는 아르카눔의 어린 수장 레이너와 놀랄 만큼 닮은 체격과 키를 지녔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레이너의 얼굴이 벼려진 칼날 같은 절제된 고독이라면, 에드워드의 얼굴은 삐뚤어진 오만으로 번들거렸다.

전 황제의 정부에게서 태어나, 정적들을 피로 물들이며 황좌를 차지한 사내였다.

향로에서 피어오른 백단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느리게 갈라놓았다.

에드워드는 식어 가는 찻잔을 손끝으로 굴리며 볼트의 굽신거리는 정수리 너머, 먼 곳을 보았다. 4년 전 그 밤의 잔상이 겹쳐 올랐다.

‘피비린내 나는 비극은 소리를 지운 총구에서 새어 나온 마른 총성 한 발로 시작되었지.’

4년 전 첫눈이 내리던 밤, 황궁 깊은 별전. 낮은 소리와 함께 적통 황후의 가슴이 뚫렸다. 화려한 드레스가 붉게 젖어 대리석 위로 무너졌다.

곁에서 열다섯의 레이너가 어미의 피 묻은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어머니! 눈을 뜨세요, 어머니……!”

황후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도망쳐라, 내 아들아.

그것이 이 제국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곁에서 들은 사람은 어린 아들뿐이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울음 사이로 정부와 열일곱의 에드워드가 걸어 나왔다.

정부는 죽어 가는 황후를 향해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에드워드는 이복동생이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턱을 든 채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는 확신했다. 이 제국의 유일한 주인은 자신이 될 것이라고.

그날 밤 소년은 어미의 손을 놓고 별전을 뛰쳐나가, 막 쏟아지기 시작한 첫눈 속으로 사라졌다.

사냥개를 풀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누군가 그 소년을 눈 속에서 건져 간 것이다.

“그대의 충성은 늘 달콤하지, 맘몬.”

황제가 입을 열자 볼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하지만 달콤함 뒤에 숨은 피비린내는 어찌 지우려 하는가?”

“저, 저택 지하 창고에서 탈출한 불결한 계집…… 제 딸놈이 품은 오팔빛 마력이 제국을 어지럽히기 전에 처단하려 함이옵니다! 아르카눔의 무기 독점권만 주신다면 제국 최고의 저격단을 만들어……”

볼트는 쩔쩔매며 구걸했다. 황제의 눈 속에서는 서늘한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찻잔 속 홍차에 비친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에드워드는 손끝으로 잔 둘레를 천천히 쓸며, 상대가 얼마나 더 낮아질 수 있는지를 재고 있었다.

‘아르카눔을 네놈에게 넘겨주라고? 저의를 숨길 줄도 모르는 탐욕스러운 늙은 개.’

겉으로는 유유자적해 보였지만 속은 달랐다.

아르카눔은 단순한 황실 직속 기관이 아니었다. 어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 황궁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동생이 쥔, 무자비한 칼날이었다.

황제가 함부로 아르카눔을 해체하지 못하는 이유도, 레이너가 황궁을 정면으로 갈아엎지 못하는 이유도 분명했다.

아르카눔이 쥔 마도 저격 무기는 근위대가 함부로 정면으로 맞설 수 없는 위협이었다. 게다가 레이너의 곁에는, 마력이 말라 가는 시대에 쉽게 볼 수 없는 위험한 녀석들이 모여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너의 총구가 황궁을 향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황궁 깊은 지하에는 감시받는 ‘그 아이’가 있었다.

레이너의 방아쇠를 묶어 두는 거대한 닻. 황제가 쥔 가장 은밀한 약점이었다.

‘맘몬의 손을 빌려 그 어미와 불길한 핏줄을 깔끔하게 매장하려 했을 때…… 그 지옥에서 네놈을 건져 낸 자는 대체 누구였더냐, 레이너.’

황궁의 그늘 아래서 맘몬의 사냥개들에게 둘러싸여 죽어 가던 그 밤. 정체 모를 구원의 손길이 없었다면 레이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레이너가 아르카눔으로 맘몬을 집요하게 쫓는 이유도 그날의 일과 맞닿아 있음을, 황제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고 약점마저 끊어 내는 순간, 그 서늘한 방아쇠는 망설임 없이 이 왕좌를 향할 터였다.

“볼트.”

황제가 속마음을 완벽히 감춘 채 서늘하게 불렀다. 볼트가 황급히 이마를 대리석에 찧었다.

“예, 예! 전하!”

“개란 주인이 던져 주는 뼈다귀에 만족해야 하는 법이지. 감히 주인의 사냥개인 아르카눔을 탐내서야 쓰겠나?”

황제는 비열하지만 고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오래 연습한 것이었다. 웃음 아래에서 계산이 끝나는 소리를 아는 사람은 이 방에 아무도 없었다.

레이너를 직접 건드릴 수 없다면, 맘몬이라는 사냥개를 풀어 판을 흔드는 편이 나았다.

죽은 황후의 아들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칼이었다. 칼은 칼집에 넣어 둘 수는 있어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만…… 네 딸년이 품었다는 그 오팔빛은 흥미롭군.”

찻잔이 소리 없이 놓였다.

“마탄사는 모두 황실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거늘, 어디서 그런 괴물이 튀어나왔는지. 그 계집을 먼저 확보해 와라. 그것이 아르카눔의 일부를 떼어 줄지 결정할 내 조건이다.”

“전하의 뜻대로 하겠나이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볼트는 바닥을 구르며 절을 올렸다.

그러나 이마를 숙인 그의 입가에는 섬뜩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르카눔의 병기는 근위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 칼날을 제 손에 쥘 수 있다면 이 제국의 무기 시장은 통째로 맘몬의 것이 된다.

게다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오팔빛’ 계집까지 곁에 둘 수 있다면.

상상 속에서 그 계집은 이미 철창 안에 있었다. 오팔빛이 새어 나오는 눈을 열쇠 삼아, 닫힌 문이란 문은 다 열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쥔다는 상상만으로 소맷부리 안쪽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굴욕의 이마 아래에서, 그는 흥분으로 숨을 삼키고 있었다.

대리석에 비친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시종이 소리 없이 눈을 돌렸다.

시종은 이 방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 뒤에서 누군가의 목이 달아난 일이 몇 번인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 * *

붉은 접견실의 문이 닫히자 볼트는 허리를 폈다.

대리석에 쓸려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이를 갈았다. 개 취급을 받은 굴욕이 혀끝에서 쓰게 번졌다.

복도의 가스등이 그의 벨벳 슈트 소매 단추를 비췄다. 악마의 뿔과 톱니바퀴 문양. 맘몬의 상징이었다.

뒤따르던 철제 가면의 사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볼트 님. 황제의 조건은 ‘확보’입니다. 그 계집을 황궁에 넘기실 겁니까?”

“넘겨?”

볼트가 낮게 웃었다. 지하 창고에서 레나의 턱을 움켜쥐던 때와 같은 웃음이었다.

“황제는 내 사냥개가 물어 온 걸 그대로 받아먹을 줄 아는 모양이지. 계집을 찾는 즉시 내게 먼저 가져와라. 황제보다 먼저. 알겠나?”

“……예.”

“그리고 그 계집의 어미, 레나는 아직 살려 둬. 미끼는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그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쓸어 적셨다.

“들었나? 황제는 계집 하나를 가져오면 아르카눔의 일부를 떼어 주겠단다. 떼어 줘? 하하!”

웃음이 터졌다. 복도의 가스등 불꽃이 그 웃음에 흔들렸다. 사병이 반 걸음 물러섰다.

웃음 끝에 기침이 섞였는데도 볼트는 멈추지 못했다. 오래 눌러 온 허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아르카눔의 총 한 자루면 근위대 분대쯤은 앞마당에서 발이 묶인다. 그 설계를 쥔 공방까지 통째로 삼킬 수 있어. 거기에 오팔빛 계집이 더해지면…….”

볼트는 두 손을 맞잡고 비볐다. 장갑 안쪽에서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기도, 계집도 내 것이 된다. 이 도시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나야.”

말라 가는 시대에 가장 영롱한 마력을 쥔 계집. 그것을 가진 자가 이 도시의 다음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은 황제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필요한 것은 허락이 아니라, 황제가 눈치채기 전에 그 계집을 손에 쥘 시간뿐이었다.

* * *

그 시각, 접견실에는 황제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식은 찻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성에 낀 유리에 비친 제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곁에 선 시종에게 짧게 말했다.

“레이너를 불러라.”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폐하?”

“오팔빛의 소문이 내 귀에까지 올라왔다. 그 아이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가장 잘 아는 자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이다.”

황제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내 아우가 얼마나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지, 오랜만에 보고 싶구나.’

창밖에서 녹은 눈이 똑, 똑 떨어졌다.

그 소리를 세던 에드워드의 손가락이 창틀 위에서 멈췄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방 안의 따뜻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4년 전 같은 첫눈이 내린 밤. 그날의 눈은 아직 이 궁의 처마 어딘가에서 녹지 않은 채 얼어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