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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빛의 저격수

作 일곱날의빛

석판 복도는 신발 밑으로 냉기가 올라왔다.

복도 끝에서 장작 타는 냄새와 홍차 냄새, 가죽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낯선 냄새들이 한꺼번에 코끝을 감쌌다. 저택의 복도에서는 술과 향수, 숨기려 해도 새어 나오는 두려움의 냄새만 났는데.

터벅, 터벅.

거실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검은 들보가 지나는 낮은 천장 아래, 벽난로에서 장작이 탁탁 튀고 있었다. 서리 낀 커다란 창 너머로는 납빛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어릴 때부터 시선을 피하며 살아온 탓에, 사람들의 습관을 읽는 눈만은 빨랐다.

긴 탁자 끝에서 레이너가 도면을 보고 있었다. 도면에는 톱니와 약실처럼 보이는 선들이 빼곡했다.

안경을 쓴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도 서두르지 않고 안경을 벗어 도면 위에 내려놓았다.

안경 없는 얼굴이 어쩐지 더 어려 보였다. 연필을 내려놓는 손이 반 박자 느렸다.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눈 밑이 조금 어두워진 것 말고는 달라진 데가 없는데, 달라진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열흘 동안 베개 밑의 총을 확인하던 손이 오늘은 엉뚱한 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내려갔다.

“누더기를 벗겨 놓으니 이제야 사수 모양새가 좀 나는군.”

그는 도면을 슬쩍 뒤집어 놓으며 턱 끝으로 사람들을 가리켰다.

“앞으로 맘몬의 목에 총구를 겨눌 놈들이다. 이름 정도는 외워 둬.”

이름. 그 말에 걸음이 반 박자 느려졌다. 4년 동안 내 이름은 쭉정이였다.

이름을 외워 두라는 말은, 내 이름도 누군가 외워 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 생각이 스치자 목 안쪽이 간지러웠다. 나는 기대하지 않기로 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넘기던 줄리앙이었다.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사이에서 회중시계를 착, 착 굴리는 손놀림이 소름 끼치게 정확했다.

그는 내 걸음 수와 보폭을 눈으로 세며 정밀한 측정기처럼 나를 재단하고 있었다.

“체중은 기준 미달, 어깨 근육은 측정 불가. 훈련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겠군.”

칭찬도 비난도 아닌 말투였다. 이상하게도 그게 마음에 들었다.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라 쓰임을 재는 눈이었다. 쓰임이 있다는 건 적어도 버려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니까.

“우와, 진짜 깨어났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유격 사수 루체예요!”

백금발의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찻잔 위로 손가락을 튕기자 조그만 물방울이 공중으로 동그랗게 떠올라 굴러다녔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이지만 저 물방울을 다루는 속도는 방심할 수 없었다.

“루체, 그렇게 들이대면 놀라잖아요.”

창가에서 여자가 웃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화분에서 닫혀 있던 하얀 꽃봉오리가 살포시 터졌다. 겨울에 피는 꽃이었다.

어젯밤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 안쓰러움을 담고 있었다.

“신엘이에요. 어젯밤엔 이름도 못 알려 드렸네요.”

이 피비린내 나는 집단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하, 멀쩡히 걸어 나오는구먼! 반갑다, 꼬맹이! 난 지크다!”

떡 벌어진 어깨의 거구가 씨익 웃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가 진흙처럼 말랑해졌다가 다시 강철처럼 굳었다. 전방 중화기를 맡은 대지의 사내.

루체가 내 머리끝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머리는 왜 이렇게 삐뚤빼뚤해요? 누가 칼로 자른 것처럼.”

“루체.”

신엘이 낮게 불렀지만 나는 담담하게 답했다.

“칼로 잘랐어요. 도망 못 가게요.”

거실이 한 번 더 조용해졌다. 루체의 웃음이 입가에서 굳었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물방울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짧은 게 편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길면 잡아당길 곳이 되니까.

“나중에 제가 다듬어 드릴게요. 가위질은 제법 해요.”

신엘의 말이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누가 내 머리를 만져 주겠다고 한 것은 아주 오래전 어머니 이후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거칠었다. 겨울 빨래에 터서 갈라진 손끝이 머리칼에 걸릴 때마다 아팠는데, 나는 그 아픔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

벽난로 불빛이 닿지 않는 모서리에 짙은 다크서클의 사내가 기대 서 있었다. 이름은 아직 몰랐다.

그의 발치에서 칠흑빛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너머의 공기가 물속처럼 일렁이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려졌다.

눈을 깜박인 순간 그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연기에 일그러진 시야가 그의 윤곽을 놓친 것이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한 줄 내려갔다. 저택에도 소리를 죽이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아무 기척도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차가운 것이 목 옆에 닿았다.

숨결도 발소리도 없이, 어느새 내 뒤에 선 사내의 소매에서 가느다란 단도가 나와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살갗 한 겹 아래에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카론.”

레이너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흑청색 눈동자만 천천히 굴려 그림자 속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 울렸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오팔빛이 오로라처럼 번졌다가 사라졌다.

총을 들지도, 마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았는데.

카론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내 눈을 흐리던 연기가 오팔빛에 밀려 한 겹 벗겨진 듯했다.

“……흥.”

단도가 거두어졌다. 일렁이던 연기가 흩어지며 그는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단도 끝이 스치며 풀린 옷깃 사이로 별 모양 목걸이가 드러나 있었다.

지크가 숨을 내쉬며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허허,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구먼! 오, 마력 링 목걸이로구먼! 꼬맹이, 그거 잘 간수해라. 나는 그걸 다섯 개나 잃어버렸거든!”

“자랑이 아니다.” 줄리앙이 회중시계의 뚜껑을 닫았다. “덕분에 지크의 10년 치 급료는 이미 저당 잡혀 있고.”

“지크 형은 세 번째를 세탁물이랑 같이 삶았어요!”

루체가 물방울을 톡 터뜨리며 웃었다.

신엘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림자 속의 사내를 흘겼다.

“깜짝 놀랐잖아요, 카론! 아이 목에 칼부터 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신엘은 한숨을 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 목걸이는 처음 3년은 자는 동안에도 떼지 마세요. 마력이 몸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그 별이 닻이 되어 줄 거예요.”

나는 옷깃 위로 별을 감싸 쥐었다.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목에 칼을 대고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목에 칼이 닿았던 일보다 이 웃음소리가 더 낯설었다.

저택의 웃음소리는 늘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다. 이 방의 웃음은 누구를 향하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오래 생각했다.

웃음소리가 나를 비껴 지나가는 것도 신기했다. 그동안 나는 웃음이 들리면 먼저 몸을 웅크렸다. 그 웃음이 곧 내 쪽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때 창밖으로 흰 것이 스쳤다. 재인가 했다.

하나, 또 하나.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 눈이었다.

벽난로의 장작이 탁 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4년 전 그날도 첫눈이었다.

발목까지 쌓인 눈 속에서 차갑고 피에 젖은 손을 쥐고 달리던 밤. 나는 창 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탁자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이너가 창을 보고 있었다. 아주 짧게.

소매 아래 감춘 왼쪽 손목에 오른손 손가락이 한 번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처럼 그의 시선이 돌아왔다. 우리는 일 초쯤 서로를 보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벽난로의 장작이 가라앉으며 불꽃이 낮게 일렁였다. 그 일 초가 열흘보다 길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아마 그도 알았을 것이다.

“인사는 여기까지다.”

레이너가 먼저 눈을 거두며 일어섰다.

“지하 훈련소로 이동.”

그는 도면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덧붙였다.

“오늘 밤, 어깨뼈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게 될 테니까.”

“마도총으로요?”

내가 묻자 줄리앙이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다. 오늘 쏠 건 화약총이야.”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마력도 없는 쇳덩이로 무엇을 증명하라는 걸까.

“마력은 총을 타고 흐르지만, 총을 쥐는 건 몸이다.”

내 표정을 읽은 줄리앙이 말했다. 여전히 칭찬도 비난도 아닌 말투였다.

“몸이 못 버티면 마력이 네 어깨를 부수고 나간다. 그 가늘디가는 뼈로 그날 밤 같은 총성을 또 내면, 그다음엔 총이 아니라 네가 부러져.”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길고 서늘했다.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허리춤의 총이 다리에 부딪쳐 낮게 울렸다.

계단참의 좁은 창으로 눈발이 굵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이 쌓이기 전에 강해져야 했다. 어머니가 있는 그 저택의 지붕에도 같은 눈이 내리고 있을 테니까.

눈 속에서 어머니는 손을 비비고 있을까. 아니면 그 손으로 또 누군가의 몫을 대신 맞고 있을까. 그 상상이 계단 아래의 어둠보다 깊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투박한 쇳덩이가 내 어깨뼈를 얼마나 물어뜯을지, 그리고 그 아픔이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든 것을 어떻게 깨우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