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렌즈가 너무 많다
作 영우 · 2026-10-27
인천공항 입국장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여화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여화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눈동자만 굴렸다. 천장 모서리마다 박힌 보안 카메라.
그리고 입국장 난간에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 손에 손에 스마트폰을 치켜들고 있었다.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탔던 모양이었다.
"어, 뭐야. 오늘 누구 들어오나?"
범이가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낑낑대며 밀고 나오다 고개를 빼 들었다. 여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기가 목에서 뺨으로, 뺨에서 다시 쇄골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사방의 렌즈 하나하나가 살결 위에 콕콕 따로따로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10분이면 얼굴부터 새빨간 반점이 온몸을 덮을 터였다.
사막의 조준경은 그래도 하나뿐이었는데. 한국은 징그럽게도 렌즈가 너무 많았다.
'……제주도로 들어올걸.'
여화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코트 주머니에서 길거리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고는 걸음의 각도를 아주 조금 틀었다.
천장 카메라가 비추는 범위의 가장자리. 스마트폰들이 일제히 향한 게이트 쪽과 완벽하게 비껴간 반대편.
기둥 하나, 안내판 하나, 단체 관광객 무리 하나.
몸을 숨길 만한 사각의 지형들을 정확히 징검다리처럼 가볍게 밟고 지나갔다.
그때 난간 쪽에서 누군가 "나온다!" 하고 소리쳤다. 수십 개의 스마트폰이 일제히 입국 게이트로 쏠렸다.
연예인 하나가 손을 흔들며 걸어 나오고, 사방에서 환한 플래시가 터졌다.
여화는 그 소란을 등지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무도 여화를 보지 않았다.
피부에 느껴지던 열기가 하나씩 식어갔다.
"야, 여화야. 여화야?"
범이가 캐리어를 붙잡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범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안 나오고."
여화는 이미 출구 앞에 서 있었다.
범이가 고른 네이비색 코트에 벨벳 단화 차림으로, 모스크바에서 산 지 이틀 된 옷들이 신기하게도 오래 입은 제 옷처럼 편하게 어울렸다.
"……너 방금 어떻게……."
"시끄러. 머리 울려."
출구 너머에서 키 큰 남자 하나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범이의 오른팔, 다들 홍매라고 부르는 홍 매니저였다. 홍 매니저는 여화를 깊게 끌어안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잘 왔어."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원래부터 곁에 있었던 사람처럼 느긋하고 편한 얼굴이었다.
그게 좋아서, 여화는 가만히 안겨 있었다.
홍매는 여화를 놓아준 뒤 범이가 끌고 온 캐리어 두 개를 노려보았다.
혼자 신나게 옷 입히기 놀이를 하고 왔다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괘씸해서 한마디 하기로 했다.
"범아, 그…… 주신희였나? 너 없는 동안 클럽에서 아주……."
범이가 번개처럼 홍매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아, 형은 참! 여화야, 집으로 갈 거지? 가자, 빨리. 엄마 기다리셔."
여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 * *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엄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이 기집애가, 이 기집애가……."
엄마는 그 말만 되풀이하며 여화의 등을 때렸다. 아프지 않게, 그런데 몇 번이고 반복되는 손길.
여화는 허벅지와 옆구리 상처가 당기는 걸 참으며 가만히 맞아 주었다.
15년 동안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평범하게 일했다고 믿는 엄마였다. 거짓말이 들킬 일은 없었다.
범이가 싸 들고 온 캐리어들이, 그 15년의 알리바이였다.
저녁상에는 여화가 좋아하던 반찬들만 올라와 있었다. 엄마는 연신 고기를 여화 밥 위에 얹었고,
남동생은 누나는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냐며, 혼자만 안 늙는 건 반칙이라고 입을 삐죽였다.
식탁 끝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빠 자리였다.
엄마도 동생도 그 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화는 그 빈 의자를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넣었다. 맛있었다. 15년 만에 먹는 엄마 밥이, 목이 메도록 맛있었다.
밤늦게, 거실 장식장 위 아빠 사진 앞에 여화는 잠시 서 있었다.
"……다녀왔어요."
대답은 없었다. 여화도 기다리지 않았다.
* * *
한국에서 범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화를 집이 아니라 강남 피부과 VIP실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까, 흉터 하나 색소 침착 하나 남기지 말아 주세요. 탄 데는 싹 다 지우고요."
의사에게 으름장을 놓는 범이를 보며, 여화는 침대에 누워 하품만 했다.
돈은 여화가 내겠다고 했는데 범이가 카드를 먼저 내밀었다.
네 퇴직금은 네가 차릴 회사에 쓰라면서. 여화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타고 온 최고급 1등석 비행기 표값도, 결국 범이의 카드였으니까.
문제는 피부만이 아니었다. 여화는 자타 공인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관심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대로 대충 주워 입었다. 결국 인형놀이에 신난 범이가 팔을 걷어붙였다.
여화의 옷장은 범이가 백화점을 통째로 털어 온 옷들로 채워졌고, 외출할 때면 범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뒤에야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머리핀 하나, 귀걸이 하나까지 범이 작품이었다.
레이저는 한 달에 한 번씩이었다. 허벅지 실밥을 풀고, 새살이 차오르고, 흉터가 조금씩 옅어지는 동안 봄이 지나갔다.
여화는 그사이 범이가 찾아 준 학교 동기들을 하나씩 만났다.
다들 사는 게 비슷했다. 캐릭터를 귀엽게 그리던 애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했고, 영상을 하던 애는 웨딩 스튜디오 촬영 보조를 뛰었다. 졸업 작품을 밤새 같이 만들고, 나중에는 이런 작품을 만들겠다 찬란한 꿈을 꾸던 그 똘끼 가득한 애들이, 먹고사느라 하고 싶은 걸 다 접어 두고 있었다.
"나랑 일하자. 하고 싶은 거 해. 월급은 밀리지 않고 줄게."
다들 여화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여화는 그 길로 동기들 모르게 성수동에 사무실로 쓸 건물을 계약해 버렸다.
석 달째 되던 날, 의사가 마지막 레이저 치료를 끝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원래 피부보다 더 하얗고 투명해졌다고.
거울 속 여화는 정말로, 언제 전장을 굴렀냐는 얼굴이었다.
딱 한 군데만 빼고.
"여기는 그냥 두세요."
오른쪽 허벅지. 베어를 넘어뜨리고 받아 낸 마지막 총상이었다.
범이가 펄쩍 뛰며 다 지워야 한다고 난리를 쳤었지만 여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우고 싶지 않은 흉도 있었다.
* * *
석 달.
강연무는 그 석 달 동안 휴대폰을 몇 번이나 집어 들었는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촬영장에서는 평소처럼 웃었고, 인터뷰에서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그 누구도 그의 무너진 속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쉬는 시간마다 메신저를 열어 누나 프로필 사진을 확인했다.
석 달 내내 기본 이미지였다. 바뀔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런 데 관심이 없으니까.
누나 번호는 있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하면 지는 것 같았고,
누나가 먼저 연락해 주길 바라는 건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서글픈 소원이었다.
"형. 누나 요즘 뭐 해요?"
결국 견디다 못해 박 대표에게 슬쩍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본을 무심히 넘기면서.
"여화? 피부과 다닌대. 윤태범이가 꽁꽁 싸매 놓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해."
윤태범. 연무는 대본 모서리를 저도 모르게 구겼다. 중학교 때부터 누나 옆에 붙어 다녔다는 그 놈은, 이번에도 누나 옆에 있었다. 18년을 짝사랑한 나는, 석 달째 바보처럼 프로필 사진만 보고 있는데.
"너 아직도냐?"
박 대표가 혀를 찼다. 연무는 못 들은 척했다.
"아, 그리고 사무실 공사 들어갔대. 성수동 쪽에. 너 이번 주 스케줄 비지 않아?"
박 대표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연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날 오후, 매니저에게 차 키를 달라고 했다.
성수동 골목 끝, 시멘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사 현장 앞에 검은 밴이 멈췄다.
대시보드 위 블랙박스에서 빨간 불이 조용히 깜빡였다. 짙게 선팅된 창문 안에서, 연무는 숨을 죽였다.
먼지 속에, 마침내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베이지색 오픈숄더 니트에 검은 스키니진. 어깨를 부드럽게 넘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범이 놈이 골라 입혔을 게 뻔한 예쁜 옷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석 달 만이 아니었다. 누나는 볼 때마다 매번,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연무의 숨통을 사정없이 막아버렸다.
범이네 클럽 직원들이 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여화가 뭐라고 한마디 하자, 덩치 큰 남자들이 줄줄이 고개를 숙였다.
곧 범이가 커피를 들고 다가와 여화 머리칼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여화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범이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연무는 그 손을 노려보았다. 누나 머리칼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대는 놈.
면회 한 번 와 준 걸로 군 생활을 통째로 버틴 나는, 저렇게 편하게 누나를 만져 본 적이 없는데.
저 손을, 당장……
그때였다. 여화가 돌연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스윽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연무가 숨어 있는 검은 밴을 향해.
연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홱 젖혔다.
들켰나?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선팅을 뚫고 안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냥 우연이겠지. 공사장 앞에 낯선 차가 서 있으니까.
여화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선글라스도 없는 맨눈이었다.
그 나른하면서도 깊은 눈은 유리창 너머에 숨은 연무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연무의 손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내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