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의 알리바이
作 영우 · 2026-10-27
모스크바의 저녁은 일찍 서늘해졌다.
범이는 호텔 정문 앞을 벌써 한 시간째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퇴근길 차들이 복잡하게 엉켜 요란한 경적을 울려 댔다. 저쪽에서 여기까지 차로 두 시간, 이 시간이면 더 걸릴 터였다. 상처 드레싱 때문에 하루 늦게 보낸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속이 까맣게 뒤집혔었지만,
범이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려 12년을 기다렸는데 그깟 하루쯤이야.
이제는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매일 볼 수 있는데.
그래서 그 하루 동안, 범이는 호텔 옆 백화점을 통째로 털어버렸다.
옷, 구두, 운동화, 화장품, 액세서리. 속옷까지. 혼자서 꼬박 12년 치 쇼핑을 몰아서 해치웠다.
최여화는 보나 마나 맨몸으로 대충 왔을 테고, 같이 쇼핑을 가자고 하면 아무거나 하나만 턱 짚고 집에 가자고 할 테니까. 덕분에 커다란 캐리어 두 개와 작은 캐리어 하나로도 모자라 커다란 쇼퍼백까지 하나 더 사야 했다.
15년 동안 외국에서 유학하고 번듯한 직장까지 다녔다는 여자가 맨몸으로 귀국하면, 여화 엄마가 먼저 의심할 일이었다.
까맣고 음울한 차 한 대가 범이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도어맨이 뒷문을 열자 차체만큼이나 어두운 사람이 천천히 내렸다. 어깨를 넘는 낯선 길이의 머리칼, 그러나 너무나 익숙한 단출한 차림. 검은 훈련복 위에 여미지 않은 검정 코트, 손에는 작은 구찌 클러치 하나.
12년 전, 범이가 용병단을 나오던 날 본 여화는 귀를 살짝 덮는 커트 머리였다.
그렇게 굴렀다는데도 여전히 하얗던 얼굴. 같이 가자고 울며 매달리는 범이를 발로 뻥 차고, 휙 돌아서던 당당한 뒷모습. 그 뒤로는 태진 형 아들 돌잔치에서 잠깐 스친 게 전부였다.
형이 한국에 그녀를 부를 때마다 일만 시키고 보냈으니, 바쁜 범이를 따로 부를 여화도 아니었다.
대신 범이는 형한테 틈만 나면 물었다. 형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살아 있어. 잘 지내." 다쳤다는 말은, 형도 한 번을 안 했다.
여화가 멀뚱히 서 있는 범이를 바라보더니, 웬일로 화사하게 웃었다.
몇 년 만에 보는 눈이 부신 미소였다.
아름다운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고, 깊고 검은 눈동자 속으로 범이가 점점 담겨 들어갔다.
"……여화야."
"그래, 나야."
범이는 더 참지 못하고 다가오는 여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키가 엇비슷해서 안기는 모양새가 묘하게 어색했다.
범이는 늘 자기가 쪼끔은 더 크다고 우겼지만, 막상 맞닿은 눈높이는 똑같았다.
여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범이는 또 코를 훌쩍였다. 여화는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여 쓸어 주었다.
그때 울며 매달리는 범이를 발로 뻥 차 버린 게 조금은 미안해서.
긴 세월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있어 준 범이가 고마워서.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 그리웠어서.
* * *
호텔 방문을 연 여화의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침대며 소파며, 나름 가지런하게 정리해 두었을 옷 수십 벌이 널려 있었다.
"아, 이거 너 입히려고. 그 음침한 꼴로 집에 갈 수는 없잖아."
"좀…… 많은데?"
"아니야, 야. 15년을 유학에 직장 생활까지 한 사람이야. 이 정도면 적은 거지. 내가 얼마나 고심해서 고른 건데."
여화는 팔짱을 끼고 범이를 찌릿 쏘아보았다.
"신나게 고른 거 아니고?"
"시, 신나게라니! 어울리는 거, 너한테 어울리는 것만 고른 거야. 그 땀내 나는 시커먼 옷들은 이제 태워 버리자.
너 씻는 동안 내가 태워 올게."
범이는 여화의 매서운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옷을 챙겼다.
"욕실에 새 속옷도 종류별로 갖다 놨어, 내가. 다 해 놨으니까 한번 볼래?"
여화는 혀를 한 번 짧게 차고는 검은 코트를 벗었다. 그러다 범이의 시선이 한곳에 꽂히는 걸 느꼈다.
오른쪽 허벅지. 훈련복 바지 위로 드레싱 테이프 자국이 허옇게 비쳐 들고 있었다.
"……환자라며. 어디야. 보여 줘."
여화는 말없이 바지 버클을 풀어 내렸다. 손바닥만 한 두꺼운 방수 드레싱이 허벅지를 온통 덮고 있었다. 범이는 쭈그려 앉아 그 주변을 살살 만져 보았다. 곧게 뻗은 다리에 눈에 띌 만큼 크게 흉진 곳만 여섯 군데가 넘었다. 스치고 긁힌 자국은 셀 수도 없었다.
"흉 지면…… 짧은 치마는 다 입혔네."
"왜 못 입어. 종아리에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범이의 눈에 눈물이 또다시 그렁그렁 차올랐다. 여화는 마주 쭈그려 앉아,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범이의 뺨에 닿는 감촉은 거칠기만 했다.
좋은 핸드크림도 하나 살걸. 범이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만 좀 울어. 나 씻는다."
여화는 옷을 한 꺼풀씩 훌렁훌렁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문 앞에 마지막 남은 속옷이 나뒹굴었다.
* * *
호텔 지하 소각장 거대한 화로 앞에서, 범이는 불길이 시커먼 훈련복을 집어삼키는 걸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저걸 입고 15년을 버텼구나 싶었다.
러시아어로 무어라 묻는 직원의 목소리에 범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제 닫으셔도 됩니다.
두둑한 팁을 쥐여 주고 돌아서며 다짐했다. 이제 여화에게 힘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꽃길만 걷게 해 주리라.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욕실 문이 열렸다.
무릎을 덮는 아이보리색 꽈배기 니트 원피스.
따뜻한 물에 폭 담겨 발그레해진 얼굴, 쇄골 근처에서 찰랑이는 젖은 머리칼.
범이가 마지막으로 본 여화는 검은 훈련복을 칭칭 감은 채 "빨리 꺼져"라고 내뱉던 귀신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래. 원래 이렇게 고운 여자였지.
"아, 이거 한번 발라 볼래?"
고른 옷이 잘 어울려 신이 난 범이가 화장품 파우치를 뒤집어 금장 립스틱 하나를 내밀었다.
여화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윤태범. 너 또."
"아니, 커리어 우먼이 립스틱 한두 개 없었겠어? 다 네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한 거야, 알리바이."
"한두 개? 한두 개애?"
파우치는 무려 다섯 개였고, 그중 하나에서만 립스틱이 열두 개가 우르르 나왔다.
윤태범은 인형 놀이를 좋아했다. 특히 최여화를 모델로 삼는 인형 놀이를.
그리고 꾸미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최여화는, 주는 대로 입는 게 제일 편했다.
어쩌다 보니 둘은 묘하게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동백 꽃잎을 머금은 듯한 붉은 립스틱이 여화의 하얀 얼굴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확실히 얼굴 전체에 생기가 돌았다.
한껏 뿌듯해진 범이가 이번엔 은빛 뷰러를 내밀었다. 여화는 군말 없이 받아 긴 속눈썹을 찬찬히 집어 올렸다.
거울을 보더니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지 피식 웃었다.
"배고프다. 가자."
* * *
스카이라운지 디너 코스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여화는 평소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맛있는 걸 좋아했다.
야경이 보이는 창밖을 내려다보는 옆얼굴이 점점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보였다.
"나 술 안 마신 지 3주 넘었어."
"네가?"
의뢰 중에도 술을 물처럼 마셔대던 애였다.
"빨리 나으려고. 빌어먹을 세룩이 술 마시면 더디게 낫는대잖아."
범이는 물잔을 들다 멈췄다. 이상했다.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부상이 낫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다음 의뢰를 나가던 애였다.
"……왜 빨리 나으려고 했는데?"
"하고 싶은 게 생겨서."
여화는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썰며 덤덤하게 말했다.
"내 학교 동기들 좀 찾아 줘. 같이 졸업한 애들이랑, 바로 아래 후배들까지.
졸업 작품 준비한다고 걔들이랑 같이 미쳐서 밤새웠던 일들이 불현듯 떠오르더라. 그걸 해 보려고."
참 다행이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니.
"아, 나 서울에 사무실 하나 얻을 돈 정도는 있지?"
"허……."
이런 무딘 놈을 봤나. 범이는 기가 막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최여화. 너는 그 용병단 단장보다 더 많은 의뢰를 성공했고, 더 훌륭하게 해냈어. 사무실 하나가 아니라 건물 몇 채야.
근데 그것도 네 목숨값이라기엔 너무 작아. 난 네가 지금이라도 관둬 준 게 너무, 너무 다행이라고."
타박에 가까운 다정한 잔소리였다. 여화는 대꾸 대신 잔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할 생각은 아니었어. 나름 재밌긴 했는데…… 몸이 둔해진 것 같더라. 반 박자씩."
여화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다시 무심히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얼마를 벌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엉망이 된 제 몸은 걱정도 안 하면서, 앞으로 할 일만 생각하는 얼굴.
그래, 그게 최여화였다.
"보고 기절하지 마라. 퇴직금은 아직 입금 전이니까."
그 말에 여화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쏘지."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덧붙였다.
"네 카드로."
* * *
여화는 술이 무척 셌다.
보드카 한 병을 따서 한 잔씩 채운 지 한 모금 만에 의자 옆으로 쓰러진 범이와는, 애초에 비교할 수 없었다.
"명색이 클럽 사장이란 놈이 주량이 이게 뭐냐."
여화는 스트레이트 잔을 천천히 비우고 턱을 괸 채 화려한 모스크바 야경을 감상했다.
오랜만에 그 어떤 위험도 경계하지 않은 채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일 때문에 온갖 나라와 도시를 다녔어도 야경을 온전히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발소리 하나가 여화의 테이블 뒤편으로 다가와 멈췄다.
"아름다운 레이디께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독특한 러시아 억양이 섞인 영어와 함께, 잔에 붉은 술이 따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화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이딴 하찮은 파리는 숨 쉬듯 무시할 수 있었다.
더 치근대면, 조금 귀찮지만 손을 쓰면 그만이었다.
나온 지 하루 만에 귀찮은 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 여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누나. 누나.
전장에서 덩치 큰 외국 놈들이 거칠게 부르던 콜네임 말고.
큰 키를 숙이고 졸졸 따라다니며, 귀가 빨개진 채 부르던 목소리.
여화는 저도 모르게 픽 작은 웃음이 터졌다. 서울에 가면, 또 그 귀여운 소리를 듣게 되겠지.
'……연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