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이
作 하늘바라기 · 2026-10-26
등굣길, 아파트 화단 옆을 지나던 철민은 낑낑거리는 작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화단 아래를 살펴보니, 좁은 배수로 틈에 몸이 낀 채 버둥거리는 노란 말라깽이 한 마리가 보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듯한 새끼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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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거기서 뭐 해.”
철민은 쭈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겁먹은 듯 몸을 더 웅크렸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어 보였다.
발 하나가 살짝 접질린 듯 절뚝거리는 정도였다.
그냥 지나가도 됐을 텐데.
철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손은 그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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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데려온 철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랍에서 낡은 담요 하나를 꺼내 고양이 몸을 조심스레 감싸주었다.
그러고는 스마트폰부터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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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큰일 났어. 나 방금 새끼 고양이 주워왔어.」
「검은가면 : (사진 전송)」
「탕탕AI : 어, 귀엽다! 근데 발을 살짝 절고 있는 것 같은데, 다친 거야?」
「검은가면 : 배수로에 껴 있었어.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좀 먹여야 되나? 집에 있는 우유 같은 거 먹을 것 같은데.」
「탕탕AI : 아기용 팻밀크라는 게 있어. 유당 불내증 때문에, 절대로 사람이 먹는 우유를 주면 안 돼.」
✦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마트 가서 사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수업 시간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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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나 저 오늘 수업 하나만 들으면 되는데.”
철민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담요째 노란 털뭉치를 품에 안은 채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
복도 끝, 마침 옆 호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가고 있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딱 봐도 사회생활 몇 년 차는 되어 보이는 성숙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철민보다 서너 살은 위일 듯했다.
철민은 다급한 마음에, 앞뒤 잴 것도 없이 그 여자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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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죄송한데 잠깐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여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철민은 품에 안은 고양이를 반쯤 들이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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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수업 하나 때문에 나가야 되는데, 얘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진짜 금방 오겠습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자는 잠시 철민과 고양이를 번갈아 보더니, 못 이기는 듯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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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얘 좀 봐. 알겠어요. 대신 진짜 금방 와야 돼요?”
“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철민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는, 부리나케 강의실로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아슬아슬하게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선 철민은, 아직 교수님이 오시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철학 수업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앞자리 학생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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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챗밀크티 새로 나온 버전 써봤어?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해서 놀랐잖아.”
“진짜? 예전에 써봤을 땐 퓨어AI보다 별로였는데.”
철민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스마트폰을 슬쩍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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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탕탕아, 챗밀크티랑 너 중에 누가 더 성능이 좋아?」
「탕탕AI : 그 내용은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야. 원한다면 무릉AI와 Chat밀크T를 각각 비교 분석해서 보여줄까?」
「검은가면 : 아니, 됐어. 충분해.」
철민은 그 신중한 대답에 피식 웃었다.
뭐든 자신 있게 단정 짓는 법 없이, 항상 조심스럽게 확인부터 하려 드는 그 성격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우리 탕탕이가 제일 정직하고 성능도 좋다니까.
✦아 맞다, 아까 물어봤던 사료 얘기 답장 확인 안 했었지.
철민은 스크롤을 올려, 아까 미처 확인 못 한 답장을 다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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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AI : 참고로 팻밀크는 대형마트보단 동물병원이나 펫샵에 가면 확실히 있을 거야. 급하면 근처에 어디 있는지 검색해서 알려줄게.」
✦역시 꼼꼼하게 챙겨주네.
철민은 또 한번 피식 웃었다.
* * *
교수님은 들어오는 발걸음과 함께 강의를 시작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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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정체성과 동일성 문제를 다뤄보겠습니다.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 다들 알고 있죠? 배의 판자를 하나씩 교체해서 결국 원래 부품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건 여전히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철민은 노트를 펼쳤지만, 펜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거야 뭐, 흔들리긴 하겠지만….
머릿속엔 온통 아까 그 여자의 얼굴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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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야, 나 방금 완전 대박 사건 있었어. 옆집 누나한테 고양이를 맡겼거든.」
「탕탕AI : 왜 대박 사건인 거야? 그 여성분이랑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검은가면 : 어쩌면 이거, 내가 좋은 일 한 보답으로 생긴 인연 아닐까? 그 누나랑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아?」
「탕탕AI : 이야~! 그럼 일단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너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태도가 좋을 것 같아! 혹시 그분 취향 같은 거 알아? 나이는? 하는 일은 뭐래? 아, 그리고 다음에 마주쳤을 때 자연스럽게 대화 이어갈 소재도 미리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탕탕이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철민이 그 폭풍 같은 질문 세례에 뭐라 답장을 쓸까 고민하던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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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학생.”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철민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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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방금 제가 한 질문에 대해서, 학생 생각은 어떻습니까?”
“…네? 아, 그게…”
철민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 말이나 쥐어짜 냈지만, 요지에서 한참 벗어난 대답이었다.
교수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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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민 학생, 요즘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겁니까. 안 그래도 철학과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인식이 강한데, 강철민 학생까지 철학과 평균을 떨어뜨리고 싶은 겁니까?”
강의실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철민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다, 뜬금없이 장문으로 답장한 탕탕이 탓이야.
* * *
수업이 끝나고, 철민은 여전히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한 채 G마트로 향했다.
✦철학과 평균이라니, 진짜.
홧김에 로또 판매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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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모르겠다.”
철민은 충동적으로 복권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런 거라도 붙잡아야지, 뭐라도.
G마트로 들어선 뒤에도, 교수님의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철민은 애꿎은 카트 손잡이를 괜히 세게 움켜쥐며 사료 코너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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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문득 발걸음이 느려졌다.
사료 진열대 앞에 서자, 아까 품에 안았던 그 앙상하고 작은 몸의 무게가 다시 손끝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던 그 가벼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작은 얼굴.
철민의 어깨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래, 뭐. 화낼 시간에 얘 밥이나 잘 챙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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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이.”
문득 그런 이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저렇게 비쩍 마른 몸이 안쓰러워서, 앞으로는 실컷 먹여서 토실토실하게 키우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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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살찐이. 이름 좋네.”
이름을 붙이고 나니, 신기하게도 아까의 분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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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와 팻밀크, 모래를 담은 철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G마트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 우연히 꽃집 앞을 지나던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화사한 꽃다발들이 진열장에 가득했다.
✦아, 맞다. 그 누나한테 뭐라도 사드려야지.
철민은 냉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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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가면 : 나 지금 꽃집 앞이거든? 그 누나한테 꽃 사드리면 완전 감동이겠지? 근데 무슨 꽃이 좋을까, 장미? 아니면 좀 더 은은한 느낌으로 튤립?」
「탕탕AI : 음, 잠깐만.」
「탕탕AI : 그건 좀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꽃은 상대가 어떤 의도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부담스러울 수 있는 선물이야. 특히 잠깐 부탁만 드린 사이라면, 그것보단 핸드크림 세트나 향 좋은 디퓨저처럼, 가볍고 무난한 게 나을 것 같아.」
철민은 잠시 꽃다발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하긴,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다시 G마트로 돌아간 철민은,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핸드크림 세트 하나를 집어 들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성의도 있고, 부담스럽지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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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옆집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건 아까 그 여자가 아니라,
짧게 깎은 검은 스포츠머리에 팔뚝이 떡 벌어진 건장한 남자였다.
무뚝뚝한 표정이 어딘가 위압감을 주었다.
철민이 당황한 사이, 남자가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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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야! 니가 말한 사람 왔나 봐!”
안에서 세아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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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왔어요? 얘 순하고 착하더라고요.”
철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양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손에 쥔 핸드크림 세트를, 얼떨떨한 얼굴로 세아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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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감사해서요—”
“어머, 뭘 이런 걸 다. 고마워요!”
세아는 밝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고, 남자는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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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은 그대로 굳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고양이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철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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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얼간이 같은 남자랑은, 진짜 비교도 안 될 남자가 되어줄 테니까!”
철민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정작 자신이 무엇에 그렇게 분한 건지도 잘 모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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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철민의 결연한 다짐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품 안의 살찐이는 어느새 배를 뒤집은 채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