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유보
作 장지호 · 2026-10-26
D+23 · 20:00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치는 지난주에 도착해 있었다.
"뉴스 보니까 난리던데. 너 그거 하는 데 갔다며."
"네. 당분간 바빠요."
"우리 집은 괜찮은 거니?"
우리 집. 어머니가 말하는 우리 집은 다인이 자란 지방의 스물네 평 아파트였다. 다인은 조회해봤었다. 그 집은 어느 목록에도 없었다. 인정에도, 불인정에도, 유보에도.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네 집은? 너 그 집 살 때 엄마가 보태준 거."
"제 집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
"네."
"목소리가 왜 그래."
"피곤해서 그래요."
다인은 거짓말을 했다. 괜찮은 것도 안 괜찮은 것도 아니래요, 라는 말을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꾸면 그게 곧 안 괜찮다는 말이 됐다.
"밥은 먹고 다니니."
"먹어요. 김치 잘 먹고 있어요."
"김치는 또 보내줄게."
"아직 많아요."
"많아도 보낼 거야."
통화를 끊었다. 창구 삼 년 동안 유리 너머의 사람들이 하던 거짓말을 자기가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그 거짓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유리 안쪽에서는 몰랐다. 이제 유리가 없었다.
그날 밤에 박세미에게서 문자가 왔다. 삭제가 있던 날 낮에 창구에서 명함을 받아 간 사람이었다.
*주무관님 안녕하세요. 은행 재심사 날짜 잡혔어요. 복원 시작되면 바로 접수할 수 있게 서류는 다 챙겨놨습니다. 혹시 접수 열리는 날 미리 알 수 있을까요?*
다인은 답을 세 번 고쳐 썼다. 열리는 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정해져도 알려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 복원이 어떻게 될지 다인 자신이 못 미더웠다.
*정해지면 공지가 먼저 뜰 거예요. 저도 그때 압니다.*
한참 뒤에 답이 왔다.
*네 알겠습니다. 저희 아직 그 집 못 봤어요. 열쇠를 못 받아서요. 그냥 앞에까지만 두 번 가봤어요.*
D+25 · 08:20
출근길에 다인은 피켓들 사이를 지나야 했다.
피켓에는 대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사 날짜, 잔금 날짜, 경매 기일. 제도가 멈춰 있는 동안 개인의 달력만 계속 넘어갔다.
그날 아침에는 한 남자가 피켓 대신 서류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오십 대쯤이었고 정장 상의를 입었는데 아래는 작업복 바지였다. 출입증을 찍는 다인에게 그가 물었다.
"공무원이세요?"
"네."
"이거 좀 안에 전해주세요."
"민원은 정문 옆 접수처에서,"
"거기 갔어요. 한 달 걸린대요." 그는 봉투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우리 경매 기일이 삼 주 뒤예요."
받으면 안 되는 서류였다. 접수 경로가 아닌 서류를 공무원이 개인적으로 받으면 그때부터 그건 접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다인은 그걸 삼 년 동안 유리 너머의 사람들에게 설명해온 사람이었다.
"제가 접수는 못 해드려요."
"그럼요."
"읽을 수는 있어요."
남자는 잠깐 다인을 봤다. 그러고는 봉투를 내밀었다.
"읽어만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봉투 안에는 A4 넉 장이 있었다. 손으로 쓴 것이었고 날짜순으로 정리돼 있었다. 첫 줄이 이랬다. 2019년 3월 4일, 은행에서 처음 전화가 왔습니다. 다인은 그날 점심시간에 그것을 다 읽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봉투는 그 뒤로도 이틀에 하나씩 다인의 손에 들어왔다. 얼굴이 알려진 것이다. 받아주는 공무원이 있다는 얼굴이.
D+25 · 10:00
부분 복원이 결정된 것은 그날 회의에서였다.
여론이 임계에 닿아 있었다. 거래 중단 한 달, 보증금 소송 만 천 건, 은행 대출 중단. 위에서 내려온 방침은 명료했다. 정합성 검증이 끝난 필지부터 순차 복원. 시작은 2주 뒤.
다인은 손을 들었다.
"검증이 끝났다는 기준이 뭔가요."
"필지별로 백업 시점 정합성 확인하고, 이상 없으면 복원 대상에 올립니다."
"필지 단위 검증으로는 안 됩니다."
"왜요."
"필지끼리 물려 있어요. 이쪽 지분권자가 저쪽 근저당의 채무자인 식으로요. 한 필지만 옛 시점으로 돌리면 옆 필지와 안 맞습니다. 안 맞으면 이름이 옆으로 밀립니다."
"밀린다는 게 무슨 뜻이죠."
"내 등기부에 남의 이름이 뜬다는 뜻이에요."
최민기가 자료를 넘기다 말았다.
"전수 교차검증은 몇 달이 걸린다면서요." 남 부장이 물었다.
"네. 걸려요."
"그 몇 달 동안 저 바깥의 달력들은요?"
"주무관님." 다른 자리에서 목소리가 왔다. "그 얘기 지난주에도 하셨잖아요."
"네."
"지난주랑 뭐가 달라졌습니까."
"아무것도 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또 말씀드리는 거예요."
황인선은 그 대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 끝에 한 문장만 말했다.
"기록해두세요. 반대 의견이 있었다는 것."
결정은 유지됐다. 다인의 발언은 회의록에 한 줄로 남았다.
서다인 주무관: 교차검증 선행 필요 의견. 검토 후 진행키로 함.
검토 후 진행키로 함. 다인은 퇴근길에 그 여덟 글자를 생각했다. 창구에서 민원인들에게 내밀던 문장들과 같은 재질이었다. 접수는 되었으나 반영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접수한 쪽만 모르게 적는 법을 이 조직은 알고 있었다.
D+26 · 09:10
다음 날 아침 다인은 회의록 담당 자리로 갔다.
"어제 회의록에 제 발언이 요지로 적혔는데요. 원문으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원문이 뭔데요."
"정합성 검증 없이 강행하면 소유가 뒤섞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담당자는 화면을 열었다가 다시 다인을 봤다.
"주무관님, 회의록은 발언 요지를 적는 거예요. 그리고 이거 어제 결재 올라갔어요."
"요지를 적는 건 아는데요, 요지가 반대로 돼 있어서요. 검토 후 진행키로 함은 제가 동의했다는 뜻으로 읽혀요."
"그런 뜻으로 쓴 건 아니고요."
"뜻으로 쓰신 게 아닌 건 아는데, 읽는 사람은 뜻으로 읽어요."
담당자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곤란한 얼굴은 창구에서 다인이 매일 짓던 얼굴이었다. 규정상 안 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럼 서면으로 주세요." 담당자가 말했다. "구두로는 못 고칩니다."
다인은 그날 오전에 서면을 썼다. 정정 요청서. 본인 발언 원문과 회의록 기재 문구를 나란히 놓고, 원문대로 기재해달라고 적었다. 지시자와 날짜도 적었다.
오후에 담당자가 다시 왔다.
"정정은 안 된다고 하시네요. 이미 결재가 나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 요청서를 붙임으로 남겨주세요."
"붙임이요?"
"네. 그것도 기록이니까요."
담당자는 잠깐 다인을 봤다. 그러고는 요청서를 받아 갔다.
정정은 반영되지 않았다. 대신 요청서 사본이 어딘가에 남았고, 그 뒤로 회의에서 다인의 이름이 불리는 횟수가 줄었다. 7급이 회의록에 이의를 다는 일은 흔하지 않다.
담당자에게 넘기기 전에 다인은 그 종이를 복사기에 한 번 더 넣었다. 두 장이 나왔고 하나를 냈다. 나머지 한 장은 접어서 가방 안쪽에 넣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때도 몰랐다.
한 달 뒤에 그 한 장이 국회 자료로 올라간다.
D+26 · 23:55
자기 전에 다인은 노트를 폈다. 서울 온 뒤로 매일 적고 있었다. 적던 대로 적으라던 말대로. 맨 위 숫자는 D-54였다.
오늘 자 마지막 줄을 적고 잠깐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복원이 시작된다. 되돌릴 수 있는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그 아래, 지우지 않을 것을 알면서 적었다.
내 집은 유보다. 나는 이 문장을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재난문자] 국토교통부
금일 등기 시스템 일부 표시 오류가 확인되어 열람 서비스를 재중단합니다. 표시된 권리관계는 법적 효력과 무관하니 이를 근거로 한 거래·소송에 유의 바랍니다.
[같은 시각 커뮤니티]
└ 내 등기부에 모르는 남자 이름 떠 있음. 실화냐
└ 저희 집은 주소는 맞는데 면적이 옆집 거예요
└ 등기부 뽑아보세요 지금. 로또보다 스릴 있음
└ 방금 뽑았는데 우리 집이 두 명 공동소유로 나옴. 나랑, 모르는 사람.
[엘리베이터 게시물 ·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안내】 등기부 확인 관련 주민 여러분께
1. 최근 우리 단지 세대 중 등기부에 타인 명의가 표시되는 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2. 문을 두드리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에게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십시오.
3. 방문 시 경비실(내선 100) 및 112에 즉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사무소는 세대 등기 상태를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 문의 자제 부탁드립니다.
※ 3번 관련 문의가 하루 40건을 넘고 있습니다. 저희도 모릅니다.
D+39 · 09:00
복원 첫날은 박수로 시작했다.
일차 대상 팔백 필지의 복원 완료 로그가 화면에 올라갈 때, 대책본부 사람들은 정말로 박수를 쳤다. 한 달 만에 처음 나온 좋은 소식이었다. 언론에는 정상화 첫걸음이라는 제목이 나갔다.
홍길동의 시한까지는 마흔한 날이 남아 있었다. 복원이 성공하면 그 시한도 의미를 잃는다고, 그날 아침 본부의 공기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상 신고가 처음 접수된 것은 오후 두 시였다.
복원된 필지의 소유자가 등기부를 떼봤더니 자기 이름이 아니었다. 육 년 전에 집을 판 전전 소유자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오입력이겠거니 했다. 두 번째 신고는 세 시였다. 다섯 시까지 마흔 건이 쌓였고, 마흔 건의 양상이 다 달랐다.
저녁에는 본부 직통으로 전화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다인이 받은 첫 전화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등기부에 있는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조회해보니까 육 년 전에 이 집 팔고 나간 사람이래요. 그 사람이 지금 우리 집에 자기 짐을 들이겠다고 문자가 왔어요. 등기부에 자기 이름 있다고. 이거," 여자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는데, 차분함이 한계에 닿은 사람의 차분함이었다. "누구 말이 맞는 거예요? 종이예요, 사람이에요?"
다인은 법적 효력과 무관하다는 안내 문구를 읽어주게 되어 있었다. 읽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맞습니다. 지금 그 등기부가 틀린 겁니다. 문자는 저장해두시고, 문은 열어주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다인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곱씹었다. 등기부가 틀렸다고 국민에게 말하는 등기 공무원. 한 달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문장이었다.
그날 밤 다인은 그 전화 한 통을 끝까지 따라가 봤다. 처음 그 여자의 집에 이름이 올라온 육 년 전 전 소유자. 그 사람의 현재 주소지 등기부를 열었다. 거기에도 낯선 이름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그 낯선 이름의 집을 또 열었다. 세 번째 집에서 다인은 손을 멈췄다. 거기 소유자로 올라온 이름이 처음 그 여자였다.
세 채가 고리처럼 엮여 서로의 주인을 바꿔 쥐고 있었다. 복원이 필지를 하나씩 되돌리는 동안, 붙어 있는 집들이 서로 다른 날짜로 돌아가면서 이름이 옆으로 한 칸씩 밀려난 것이다. 팔백 필지를 되돌렸는데 어긋난 고리는 팔백 개가 아니었다. 고리가 다른 고리를 물었고, 그 고리가 또 다른 고리를 물었다. 다인은 4천이라는 숫자가 왜 며칠 만에 수만이라는 말로 바뀌어 뉴스에 나오는지 그제야 알았다. 지운 것은 사천이었는데, 잘못 되살린 것은 세는 방법이 달랐다.
원인은 자정을 넘겨서야 잡혔다. 필지마다 백업 시점이 달랐다. 두 달 전 시점으로 돌아간 집은 그 두 달 사이에 그 집을 산 사람을 지웠고, 그 돈을 받은 판 사람은 소유자로 부활했다.
복구는 시점 단위로 한다. 매뉴얼 첫 장의 그 문장대로였다. 필지를 하나씩 되살리면서 그 하나씩의 시점을 서로 맞추라는 말은, 매뉴얼 어디에도 없었다.
D+40 · 10:30
"복원을 멈추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멈추면 팔백 건은 어떻게 합니까. 되돌려요? 뭘로요, 삭제된 상태로?"
"삭제된 상태가 지금보다 낫습니다."
"없어진 게 낫다는 얘기를 지금 하시는 겁니까."
"네."
"근거가 뭡니까."
"없으면 아무도 못 쫓아냅니다." 다인이 말했다. "틀리게 있으면 쫓아낼 수 있어요. 어제부터 그러고 있고요."
회의는 두 시간째 같은 자리를 돌았다. 다인은 창구의 권상호를 생각했다. 대화가 원을 그렸고, 원이 좁아졌다.
그날 하루 동안 복원 필지발 소유권 소송이 이백 건 접수됐다. 산 사람이 판 사람을, 판 사람이 은행을, 은행이 국가를 걸었다.
접수된 소장 하나가 회의 자료에 샘플로 올라왔다.
소장 (○○지방법원 접수)
원고 ○○○ · 서울 ○○구 ○○로 12, 302호
피고 ○○○ · 서울 ○○구 ○○로 12, 302호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에게 별지 목록 기재 부동산에 관하여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
청구원인
1. 원고는 6년 전 피고로부터 위 부동산을 매수하고 대금 전액을 지급하였으며,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2. 피고는 최근 위 부동산의 등기사항증명서를 근거로 원고에게 퇴거를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하였다.
3. 원고는 위 등기가 사실과 다름을 확인하였으나, 이를 정정할 방법이 없다.
"주소가 같아요." 정 사무관이 말했다. "원고랑 피고요."
방 안의 몇이 종이를 다시 봤다.
한 사람은 육 년 전 그 집을 산 현 거주자였고, 한 사람은 그 집을 팔고 근처로 이사 갔던 전 소유자였다. 복원이 전 소유자의 이름을 등기부에 되살리자, 전 소유자는 그 등기부를 근거로 현 거주자에게 집을 비우라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현 거주자는 계약서와 잔금 이체 내역을 들고 소송을 냈다. 둘 다 옳았다. 한 사람은 종이가 옳았고 한 사람은 산 것이 옳았다. 그리고 그 종이를 그렇게 적어놓은 것은 두 사람 중 누구도 아니었다.
"이 소장이," 정 사무관이 종이를 내려놨다. "오늘 접수분 중에 제일 점잖은 겁니다. 나머지는 문장이 이렇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