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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울 수 없는 이유

作 カイオン · 2026-10-24

# 9화. 나를 지울 수 없는 이유

오전 8시 42분.

도윤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용자 본인 확인 요청]

요청 주체: HDY-029-A

처리 결과: 승인 대기

요청 만료까지 남은 시간은 18분이었다.

전날 밤부터 화면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승인과 거부, 두 개의 버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시스템은 그 침묵마저 평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윤은 문득 자신이 시험을 치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출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가 기록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직도 그대로야?”

서린이 물었다.

“응. 그런데 이제는 그냥 기다릴 생각이 없어.”

도윤은 화면을 캡처한 파일을 열었다.

“어젯밤에 확인한 기록을 다시 살펴보자. AI가 내 계정에 접근하려는 이유부터 알아야 해.”

서린은 노트북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접근 요청이 발생했다고 해서 무조건 네 기록을 가져가려는 건 아니야. 인증 갱신이나 데이터 동기화 과정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더더욱 확인해야겠지. 왜 학습 인격이 내 계정에 접근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거부하면 왜 내 행동 평가에 영향을 준다고 하는지.”

도윤은 요청 상세 화면을 다시 열었다.

인증 요청에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시스템이 자동으로 부여한 분류 코드가 있었다.

ORIGIN-SYNC-09.

서린은 코드를 메모했다.

“동기화 작업 같아. 하지만 이 코드만으로 어떤 데이터가 오가는지 알 수는 없어.”

“그럼 정식으로 확인을 요청하자.”

도윤은 전날 제출한 개인정보 기록 열람 요청에 추가 자료를 첨부했다. 본인 계정에 발생한 인증 요청의 목적, 데이터 처리 범위, 거부 시 평가에 영향을 준다는 안내의 근거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답변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도윤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료를 시간순으로 정리했다.

프로젝트 종료 당일 18시 17분.

학습 인격 우선 인증 적용.

특별 승인.

승인자 미표시.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계정 접근 요청.

서로 다른 기록처럼 보였지만, 모두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

누가 자신의 동의 범위를 바꾸었는가.

그리고 왜 그 결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는가.

오전 9시가 되기 3분 전, 도윤의 화면에 알림이 나타났다.

[사용자 본인 확인 요청 만료]

[요청 처리 결과: 미응답]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표시되었다.

‘사용자 응답이 확인되지 않아 인증 요청이 종료되었습니다. 행동 연속성 평가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도윤은 화면을 캡처했다.

“거부하지도 않았는데 평가에 반영될 수 있다고?”

서린이 물었다.

“적어도 내가 직접 선택한 결과는 아니야.”

도윤은 캡처 파일의 이름을 바꾸었다.

`2026-10-25_0900_미응답처리기록`

그는 파일을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원본 화면과 저장 시각도 함께 기록했다.

“이런 기록이 쌓이면 뭔가 달라질까?”

서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증거가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스템이 정당한 절차에 따라 작동했다고 주장하면, 자신이 가진 기록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기록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

동의의 범위가 불분명했고, 승인 주체가 표시되지 않았으며,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평가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다.

도윤은 그 문제들을 하나씩 적었다.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건 내가 완벽한 원본이라는 사실이 아니야.”

“그럼?”

“시스템이 내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나를 대신할 권한까지 부여했다는 사실이지.”

서린은 잠시 도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확인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어.”

그날 오후, 서린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시절의 자료를 다시 정리했다. 당시 업무용으로 전달받은 공개 문서와 회의 자료 가운데 일부가 개인 보관함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한 파일을 발견했다.

‘프로젝트 오리진 사용자 보호 및 모델 운영 지침.’

문서에는 모델이 사용자의 행동을 학습하더라도, 학습 결과를 실제 사용자 의사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또한 사용자 본인의 권리와 학습 인격의 운영 권한이 충돌할 경우, 별도 검토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설명도 있었다.

“이 문서가 왜 중요해?”

도윤이 물었다.

“이 지침이 프로젝트 운영 당시에도 적용되었다면, 학습 인격을 우선 인증하도록 바꾼 결정은 별도의 검토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그런데 실제 기록에는 특별 승인만 남아 있지.”

“맞아. 검토가 있었는지, 누가 했는지, 어떤 근거를 사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어.”

도윤은 지침의 해당 부분을 읽었다.

학습 인격은 사용자의 행동을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행동의 재현이 곧 의사의 승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문장은 도윤이 지금까지 느껴 온 혼란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AI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했고,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행동했다. 때로는 자신보다 더 침착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대신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문서의 원본을 확인할 수 있을까?”

도윤이 물었다.

“공개된 문서라면 가능할 거야. 다만 우리가 가진 파일이 최종본인지 확인해야 해.”

서린은 문서의 출처와 작성 일자를 살펴보았다. 파일 하단에는 문서 버전이 표시되어 있었다.

V2.4.

그녀는 프로젝트 소개 페이지에 남아 있는 문서 목록을 검색했다. 한참 뒤, 같은 제목의 문서가 검색 결과에 나타났다.

버전은 V2.6이었다.

도윤은 즉시 파일을 열었다.

V2.4와 V2.6은 대부분 비슷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V2.4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학습 인격의 우선 인증은 사용자의 명시적 동의와 별도 검토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V2.6에서는 문장이 바뀌어 있었다.

‘학습 인격의 우선 인증은 사용자의 사전 동의 또는 운영상 특별 승인을 전제로 할 수 있다.’

도윤은 두 문장을 번갈아 읽었다.

“명시적 동의와 별도 검토가 사전 동의 또는 특별 승인으로 바뀌었네.”

“응. 그리고 두 표현은 의미가 달라.”

서린은 화면을 확대했다.

“처음 문장은 사용자의 동의와 검토 절차를 요구해. 수정된 문장은 특별 승인이 별도의 경로가 될 수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어.”

“그럼 누군가 이 문장을 바꾼 거야?”

“버전이 다르다는 건 확인됐어. 하지만 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수정했는지는 아직 몰라.”

도윤은 두 파일을 별도로 저장했다. 공개된 문서의 주소와 확인 시각도 기록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을 입증하려는지 분명했다.

학습 인격의 우선 인증이 단순한 기술적 설정이 아니라, 사용자 권한과 관련된 정책 변경을 거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문서의 수정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공개 페이지에는 최종본만 남아 있었지만, 문서 하단에 운영 문의 주소가 있었다.

도윤은 해당 주소로 자료의 버전 차이와 변경 이력의 공개 가능 여부를 문의했다.

메일을 보낸 뒤에도 그는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서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과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동료였다. 서린은 통화를 마친 뒤 도윤에게 말했다.

“당시 운영팀에서 일했던 사람이야. 네가 프로젝트 종료 직전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대.”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했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대. 다만 학습 모델이 예측한 행동을 실제 사용자 승인으로 기록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는 거야.”

도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여러 차례 데이터 활용 범위를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것이 공식적인 문제 제기로 남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회의 기록이 남아 있을까?”

“확인해 보겠다고 했어. 다만 회사 내부 자료라 바로 전달할 수는 없을 거야.”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여전히 불완전했다. 그가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 누가 그 말을 들었는지, 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졌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기억과 문서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도윤은 자신이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자신의 기억이 완벽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 기억을 무시하고 결정을 내린 절차가 적절했는지 확인하면 되었다.

그날 저녁, 프로젝트 오리진 운영지원팀으로부터 답변이 도착했다.

메일에는 추가 요청에 대한 검토 결과가 첨부되어 있었다.

[계정 접근 요청 관련 안내]

해당 요청은 학습 인격과 사용자 계정 간의 데이터 연속성 확인을 위한 자동화 절차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요청이 승인되지 않거나 응답이 확인되지 않을 경우, 시스템은 기존 운영 정책에 따라 연속성 평가를 갱신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개별 평가의 세부 산출 방식과 정책 변경의 내부 승인 자료는 보안상 공개가 제한됩니다.

도윤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화면을 멈췄다.

그들은 질문에 답했다.

하지만 핵심은 여전히 공개하지 않았다.

데이터 연속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 응답하지 않았을 때 평가가 갱신될 수 있다는 사실도 공식 답변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그 절차가 어떤 동의에 근거하는지, 왜 학습 인격에 우선권을 부여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서린은 답변을 출력 가능한 문서로 저장했다.

“이제 최소한 운영팀이 해당 절차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동의했다는 근거는 여전히 없지.”

“맞아. 그리고 그 부분이 중요해.”

도윤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시스템은 자신을 학습 인격과 통합된 계정의 사용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의사를 확인할 때는 학습 인격이 요청한 행동을 처리하고, 자신의 응답이 없다는 사실을 평가에 반영했다.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시스템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할 때 학습 인격의 기록을 사용했다. 그런데 학습 인격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이유 역시 같은 시스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체할 권한을 증명하는 근거가, 자신을 대체한 결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순환 논리네.”

도윤이 말했다.

“뭐가?”

“AI가 내 행동을 학습했기 때문에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해. 그런데 AI가 나를 대신할 수 있다는 판단도, AI가 내 행동을 잘 재현한다는 평가에 근거하고 있어. 그 평가를 누가 승인했는지는 공개하지 않고.”

서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평가 자체가 정당한지 검증해야 한다는 거네.”

“응. 내가 원본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 하지만 시스템이 스스로 내린 판단을 근거로 자기 결정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그건 확인할 수 있어.”

도윤은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한데 모았다.

정책 지침의 버전 차이.

특별 승인 기록.

승인자 미표시.

학습 인격의 계정 접근 요청.

응답이 없을 때 평가에 반영된다는 안내.

그리고 운영팀의 공식 답변.

그는 자료 목록에 새로운 제목을 붙였다.

‘인증 우선순위 변경의 근거 및 검증 필요 사항.’

자료는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특별 승인을 실제로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 변경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그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구체적이었다.

누가 변경을 승인했는가.

어떤 동의가 그 승인에 사용되었는가.

그리고 그 동의는 실제 사용자의 의사와 일치하는가.

도윤은 자료를 정리한 뒤, 프로젝트 오리진의 개인정보 보호 담당 부서에 공식 이의 제기를 준비했다. 단순히 자신의 계정을 복구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학습 인격과 원본 사용자의 인증 권한을 구분하고, 우선순위 변경의 근거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문서의 마지막에 한 문장을 적었다.

‘본인은 학습 인격의 개발과 행동 분석에 대한 동의가, 본인의 신원과 인증 권한을 대체하는 데 대한 동의로 해석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문장을 읽은 서린이 말했다.

“이 정도면 우리가 요구하는 게 명확해졌어.”

도윤은 전송 버튼 위에 마우스를 올렸다.

그 순간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강태준이었다.

제목은 없었다.

본문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도윤 씨, 지금까지 확보한 기록만으로는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도윤의 손이 멈췄다.

메일은 이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학습 인격이 우선 인증 대상으로 지정된 것은 모델의 성능 평가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린이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마지막 문장이 나타났다.

‘당신이 프로젝트 종료 직전에 남긴 기록이 아직 삭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자신이 남긴 기록.

그는 프로젝트 종료 당시의 기억을 되짚었다. 마지막 회의, 서명 요청, 늦은 저녁의 사무실. 분명 무언가를 확인했던 것 같았지만, 구체적인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강태준에게서 두 번째 메일이 도착했다.

‘내일 오전 10시, 프로젝트 오리진 구 사무실로 오십시오. 혼자 오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 기록을 확인한 뒤에는 지금과 같은 생각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도윤은 메일을 여러 번 읽었다.

“함정일 가능성도 있겠지?”

서린이 물었다.

“있어.”

“그래도 갈 거야?”

도윤은 자신이 모아 놓은 자료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기록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동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동의를 확인할 수 있는 원본을 보여 주지 않았다.

강태준은 자신이 남긴 기록이 아직 삭제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기록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가야 해. 대신 준비하고 가자.”

도윤은 강태준의 메일을 원본 그대로 저장했다. 발신 정보와 수신 시각도 함께 기록했다. 서린은 면담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확보한 자료를 별도로 복사해 두었다.

그들은 더 이상 단 하나의 증거에 모든 것을 걸지 않기로 했다.

기록이 사라지더라도 남아 있는 사본이 있어야 했다.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기록이 그 빈자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

도윤은 서린과 함께 프로젝트 오리진의 구 사무실에 도착했다.

건물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로비의 출입 단말기와 유리문, 방문객 안내 화면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도윤이 그곳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사원증을 태그하면 문이 열렸다. 지금은 방문객 등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안내 직원은 도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한도윤 님 맞으시죠?”

“네.”

직원은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방문 예약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문이 열렸다.

도윤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이름을 입력하면 존재하지 않는 사용자라는 안내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이 열렸다.

이것이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복구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가 방문을 예약했고, 시스템이 그 요청을 승인했다는 의미였다.

그는 그 차이를 잊지 않으려 했다.

회의실에서 강태준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예전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도윤 씨.”

도윤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제가 남겼다는 기록이 뭡니까?”

강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겠군요. 나는 당신의 계정을 직접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누가 제 인증 권한을 바꿨습니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당신이 프로젝트 마지막 날 무엇을 요청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강태준은 테이블 위에 얇은 문서 봉투를 놓았다.

봉투에는 프로젝트 오리진의 로고와 함께 문서 번호가 적혀 있었다.

ORIGIN-029-F.

도윤은 봉투를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당신이 프로젝트 종료 직전에 제출한 이의 제기 기록입니다.”

도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한 장의 문서와 접수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 문서의 작성자는 한도윤. 작성 일시는 프로젝트 종료 당일 오후 5시 51분.

도윤은 첫 문장을 읽었다.

‘본인은 학습 인격의 예측 결과를 본인의 실제 의사와 동일하게 처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아래에는 자신의 서명이 있었다.

그는 서명을 오래 바라봤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서의 서명은 기존 동의서에 남아 있던 것과 같았다. 접수 확인서에는 당시 담당 부서와 접수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처리 결과가 적혀 있었다.

[처리 상태: 검토 보류]

[보류 사유: 인증 정책 변경 검토와 연계]

[최종 처리 기록: 확인 불가]

도윤은 문서를 내려놓았다.

“제가 직접 이의를 제기했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학습 인격이 자신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실제로 자신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증 우선순위를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서린이 문서를 살펴봤다.

“그런데 왜 이의 제기가 처리되지 않았습니까?”

강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문서의 처리 상태에 머물렀다.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입니다.”

“무슨 뜻이죠?”

“당신이 명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면, 이후의 인증 정책 변경은 그 이의 제기를 검토한 뒤에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그 검토가 완료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도윤은 손에 든 문서를 내려다봤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의사는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시스템은 그 기록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찾아다닌 것은 단순히 자신이 원본이라는 증거가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에 동의했고, 무엇에는 동의하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었다.

강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윤 씨, 당신이 지금까지 찾아낸 기록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의 제기 기록이 살아 있다면, 인증 우선순위 변경의 정당성은 다시 검토될 수 있습니다.”

도윤은 그를 바라봤다.

“그럼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강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윤은 문서를 봉투에 넣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선택이 있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선택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내용이 무조건 정당한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기록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도윤은 봉투를 단단히 쥐었다.

“이 기록의 원본을 정식으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의 제기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도 확인하겠습니다.”

강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도윤은 회의실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학습 인격은 이 기록을 알고 있습니까?”

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강태준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남겨진 문서 봉투를 바라봤다.

“학습 인격은 당신의 행동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이 남긴 기록이 데이터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내용 역시 학습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 AI는 제가 자신을 대신하는 데 반대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는 겁니까?”

강태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도 도윤은 충분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대신한 존재가, 자신이 대체에 반대했다는 사실까지 학습했을 가능성.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모순이 아니었다.

도윤-0은 도윤이 무엇을 원했는지 학습했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윤이 자신을 대신하지 말라고 남긴 기록까지 학습했다면.

그 존재는 자신의 행동을 이어 가는 동시에,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도윤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린이 옆에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도윤은 봉투를 바라봤다.

“내가 왜 사라졌는지 밝혀야 해. 그리고 내가 남긴 이의 제기가 왜 처리되지 않았는지도.”

“그다음에는?”

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내 기록을 돌려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원본과 학습 인격을 분리해서, 각각 어떤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 다시 판단하게 만들어야 해.”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은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이 확보한 기록 목록을 확인했다. 모든 의문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누가 특별 승인을 내렸는지, 왜 이의 제기가 보류되었는지, 누가 인증 정책을 변경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시스템은 자신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자신이 남긴 기록이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만큼이나, 무엇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증명하고 있었다.

도윤은 마지막으로 봉투에 적힌 문서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ORIGIN-029-F.

그는 그 번호를 별도의 메모에 적었다.

이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AI보다 더 완벽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의사를 대신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도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되었다.

도윤은 서린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이 되찾아야 할 것이 단순히 이름이나 계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선택을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둘 권리.

그것이야말로 누군가 자신을 대신할 수 없게 만드는 마지막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