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우리 잠깐 떨어져 있어요
作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21화. 우리 잠깐 떨어져 있어요
“윤서하 씨 맞으시죠?”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서하는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평일 오후 세 시.
점심 장사가 끝난 두부참이슬에는 손님이 없었다. 서하는 저녁 장사를 준비하며 테이블을 닦고 있었고, 문 앞에는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저는 태성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김성호라고 합니다.”
서하의 손이 멈췄다.
태성그룹.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강태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
“강태준 대표님과 교제하고 계신 분이 맞으시죠?”
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회장님께서 윤서하 씨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서하는 명함을 내려다봤다.
태성그룹 회장 비서실장.
그 밑에는 전화번호와 회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저를요?”
“네. 가능하시다면 내일 오후에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서하는 당황스러웠다.
태준의 아버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니.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태준은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었고, 그룹을 이끄는 대표였다.
하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혹시…… 태준 씨도 알고 계시는 일인가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회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사실상 모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서하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제가 생각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만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가능하면 오늘 안으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가게를 나갔다.
딸랑.
문에 달린 풍경이 흔들렸다.
서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태준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당장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태준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아버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태준은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명함을 바라봤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남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지금, 자신의 문 앞까지 찾아와 있었다.
### 1. 말하지 못한 비밀
같은 시각, 태성그룹 본사.
강태준은 회의실에서 보고서를 넘기고 있었다.
“다음 주 이사회 안건은 여기까지 정리하겠습니다.”
최도윤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추가로 검토할 부분은 오늘 중으로 보내 주세요.”
“네, 대표님.”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나갔다.
도윤도 서류를 챙기려던 순간이었다.
“최 실장.”
태준이 그를 불렀다.
“네?”
“오늘 아버지 일정 어떻게 돼 있지?”
도윤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오후에는 별도 일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태준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서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서하]\
태준 씨, 오늘 회의 잘하고 있어요?
태준은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강태준 ❤️]\
네. 이제 끝났어요. 서하 씨는요?
한참 뒤 답장이 왔다.
[윤서하]\
그냥 가게에 있어요.
짧은 메시지였다.
평소 같았으면 뒤에 웃는 얼굴이나 장난스러운 말이 하나쯤 붙었을 텐데.
태준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서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하 씨.”
“응.”
“무슨 일 있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아니요. 왜요?”
“그냥…… 목소리가 조금 이상해서요.”
서하는 애써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 없어요. 회의 끝났다면서요. 밥은 먹었어요?”
“아직요. 서하 씨는요?”
“먹었어요.”
“거짓말.”
서하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알았어요?”
“서하 씨는 밥 먹었으면 꼭 뭐 먹었다고 자랑하잖아요. 오늘은 그냥 먹었다고만 하니까요.”
서하는 작게 웃었다.
이 남자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알아챘다.
그래서 더 말하기 어려웠다.
“진짜 괜찮아요.”
“정말요?”
“응. 나중에 이야기해요. 태준 씨 일해야 하잖아요.”
태준은 잠시 망설였다.
“알겠어요. 대신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줘요.”
“응.”
전화를 끊은 서하는 휴대전화를 가슴에 꼭 안았다.
태준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었다.
당신 아버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대요.
그 말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 2. 회장님의 초대
다음 날 오후.
서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가게 문을 닫았다.
박미자는 그녀가 외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가니?”
“사람 좀 만나러요.”
“누구?”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태준 씨 아버님이요.”
미자의 손에서 들고 있던 봉투가 떨어졌다.
“뭐라고?”
“태성그룹 회장님이요.”
“아이고, 세상에!”
미자는 서하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럼 옷은 이걸 입고 가려고?”
“왜요? 이상해요?”
서하는 자신이 입고 있는 단정한 원피스를 내려다봤다.
미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예뻐. 그런데…….”
미자는 말끝을 흐렸다.
“왜 이렇게 갑자기 부르신대?”
“저도 모르겠어요.”
“태준이는 알고 있대?”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말 못 했어요.”
미자가 눈을 크게 떴다.
“왜?”
“괜히 태준 씨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서요.”
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하야.”
“네?”
“너 지금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태준이가 네 남자친구잖아. 이런 일은 둘이 같이 이야기해야지. 네가 혼자 알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야.”
“…….”
“네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겁먹고 있어?”
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미자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네 마음대로 해. 잘 보이려고 억지로 웃지도 말고, 네가 아닌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마.”
“언니…….”
“그리고 너무 힘들면 그냥 나와. 그 집이 아무리 대단해도 네가 무조건 고개 숙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
서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마워요.”
“아유, 고맙긴. 다녀와. 끝나고 전화하고.”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가게를 나섰다.
태준에게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3. 너무 다른 세상
태성그룹 본사.
서하는 건물 앞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유리벽으로 된 거대한 건물.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태준은 매일 어떤 하루를 보내는 걸까.
회의실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지시하고,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서하는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나는 그냥 나답게 이야기하면 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서가 그녀를 회장실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자 넓은 사무실이 나타났다.
창가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강현석.
태준의 아버지이자 태성그룹 회장이었다.
“윤서하 씨?”
“네. 안녕하세요.”
서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서하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회장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불러서 놀라셨겠군요.”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서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회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솔직하시군요.”
“숨길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회장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봤다.
“태준이가 요즘 많이 달라졌습니다.”
서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도 전보다 표정이 밝아졌고, 퇴근 후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려고 하더군요. 주말에도 업무 일정 대신 다른 약속을 잡는 일이 늘었습니다.”
회장은 찻잔을 들었다.
“그 이유가 윤서하 씨라고 들었습니다.”
서하는 손끝을 꼭 쥐었다.
“……네.”
“태준이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보는 일입니다.”
그 말에 서하는 잠깐 고개를 들었다.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회장은 서하를 똑바로 바라봤다.
“윤서하 씨는 태준이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서하는 잠시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서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태준 씨는 저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에요. 제가 하는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힘들다고 하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제가 불편하다고 하면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게 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회장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저는 태준 씨가 대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태준 씨가 저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서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태성그룹 대표라는 자리만은 아니에요. 가게에 와서 두부김치를 먹고, 매운 떡볶이를 먹고 울상을 짓고, 제가 손을 잡아 주면 좋아하는…… 그런 강태준 씨를 좋아해요.”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태준이가 그런 모습도 보입니까?”
“네.”
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생각보다 귀여워요.”
그 말에 회장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곧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윤서하 씨.”
“네.”
“태준이는 앞으로 이 그룹을 책임져야 할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행복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생계와 회사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서하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저는 태준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회장은 말을 이어 갔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겠지요.”
서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윤서하 씨는 작은 주점을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도 많으실 테고, 생활을 꾸려 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겠지요.”
서하는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회장의 말은 정중했다.
그런데 그 말 속에 자신의 삶이 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쉽지는 않아요.”
그녀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도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태준이가 앞으로 회사 일로 바빠지고, 지금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서하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네?”
“대표라는 자리는 언제나 개인의 시간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출장이나 중요한 회의가 생길 수도 있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겠지요.”
회장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서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을까.
태준이 지금보다 훨씬 바빠진다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연락도 지금처럼 자주 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괜찮을까.
그녀는 태준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가게를 비우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책임져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서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제 일이 있습니다.”
회장의 눈빛이 움직였다.
“태준 씨가 바빠지면 저도 제 일을 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요. 물론 보고 싶고 서운할 때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때마다 태준 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서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대신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바빠서 못 만난다면 언제쯤 만날 수 있는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주고요. 저도 제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는 손끝을 조금 더 꼭 쥐었다.
“저는 태준 씨가 가진 자리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자리를 빼앗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냥…… 태준 씨가 좋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해 주고, 저도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만나고 있는 거예요.”
회장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윤서하 씨.”
“네.”
“저는 태준이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랍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서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장은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은 서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길 겁니다. 가족, 책임, 생활 방식, 그리고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들까지.”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서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회장은 자신에게 태준의 연인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하는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태준을 좋아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서하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 회장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태준의 아버지는 자신을 모욕하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당장 헤어지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선택하라고 말한 것 같았다.
태준을 좋아하는 마음과, 그 사람의 현실을 함께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서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태준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강태준 ❤️]\
서하 씨, 오늘 뭐 해요? 저녁에 보러 갈까요?
서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장을 쓰려다 멈췄다.
지금 당장 태준을 만나면 울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4. 뒤늦게 알게 된 사실
그날 오후 네 시.
강태준은 회장실 앞에 서 있었다.
“아버지.”
강현석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왔느냐.”
“윤서하 씨를 만나셨습니까?”
회장은 잠시 침묵했다.
“누구에게 들었지?”
“비서실에서 연락받았습니다.”
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알면 미리 이야기했을 것 아니냐.”
“당연히 그랬겠죠.”
태준은 목소리를 낮췄다.
“서하 씨는 제 여자친구입니다. 만나시려면 저한테 먼저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래서 네가 함께 가서 모든 질문에 대신 대답해 줄 생각이었느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지?”
태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준아.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알고 싶었다. 네가 그 사람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그건 제가 직접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하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
“나는 그 여자를 반대한다고 말한 적 없다.”
“하지만 혼자 불러서 그런 질문을 하셨잖습니까.”
회장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 아이가 네 삶을 감당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태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서하 씨는 제 삶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라고?”
“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지, 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짐을 떠안는 사람이 아닙니다.”
태준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제가 바쁘면 서로 일정을 조율하면 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건 저희 둘이 함께 배워 가야 할 일입니다.”
회장은 태준을 한동안 바라봤다.
“네가 그 아이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네. 좋아합니다.”
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더 신중해야겠지.”
태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회장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곧바로 서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서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태준의 가슴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서하 씨, 어디 있어요?
그는 메시지를 보냈다.
[강태준 ❤️]\
서하 씨, 전화 좀 받아 줘요. 무슨 일 있었어요?
한참 뒤에야 답장이 왔다.
[윤서하]\
미안해요.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어요.
태준은 그 문장을 읽고 걸음을 멈췄다.
혼자 있고 싶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강태준 ❤️]\
알겠어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알려 주면 안 될까요?
답장은 오지 않았다.
### 5. 우리 잠깐 떨어져 있어요
그날 밤.
서하는 가게 문을 닫고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창가에는 태준이 선물해 준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초록색 잎이 여전히 싱그러웠다.
서하는 손끝으로 화분의 잎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태준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다고 했고, 자신의 삶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 말은 모두 진심일 것이다.
서하도 태준을 믿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회장실에서 들었던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은 태준을 좋아한다.
하지만 태준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도 괜찮을까.
태준이 바쁜 날, 혼자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도 괜찮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태성그룹 대표의 여자친구로 바라보면,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언젠가 태준에게 자신의 삶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날이 오면 어떡할까.
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준이었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하 씨.”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태준 씨.”
“네.”
“나 오늘 아버님을 만났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