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전 남친이 나타났다
作 루시엘 · 2026-10-26
# 《두부참이슬》
루시엘 지음
## 19화. 전 남친이 나타났다
“서하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윤서하는 손에 들고 있던 행주를 내려놓았다.
두부참이슬의 저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주방에서는 김치 볶는 냄새가 퍼지고 있었고, 테이블 두 개에는 단골손님들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문 앞에 붙여 둔 작은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평범한 풍경 한가운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이민혁.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한참 동안 놓지 못했던 남자.
서하는 민혁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민혁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 장사 중이야.”
“오래 안 걸려.”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해졌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왜 찾아왔는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하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일상이 있었고,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서하는 주방을 한번 바라봤다.
“잠깐만 기다려. 주문 밀린 것만 처리하고.”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손이 조금 떨렸다.
도마 위에 놓인 두부를 자르다가 칼끝이 삐끗했다.
“아…….”
손님에게 나갈 두부 한 조각이 모양이 흐트러졌다.
서하는 잠시 칼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괜찮아.
그냥 전 남자친구일 뿐이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때 옆 가게에서 박미자가 들어왔다.
“서하야, 김치 좀 빌리러…….”
미자는 말을 멈췄다.
홀 한쪽에 앉아 있는 민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머.”
서하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미자는 서하를 한번 바라보고 민혁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서하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 그때 그 사람이야?”
서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로 또 왔대?”
“나도 몰라.”
“너 괜찮아?”
서하는 잠깐 웃었다.
“응. 괜찮아.”
미자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 질문에 서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이고, 자신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으니 아무렇지 않다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웠다.
민혁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다시 떠오르는 일이.
무엇보다 자신이 애써 정리한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미자는 서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힘들면 나 불러. 알았지?”
“응. 고마워, 언니.”
“그리고 네가 싫으면 이야기 안 해도 되는 거야. 전 남자친구라고 해서 네가 무조건 만나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서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제는 그가 찾아왔다고 해서 반드시 문을 열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 1. 우리가 헤어진 이유
밤 아홉 시.
마지막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서하는 문을 잠그고 영업 중 안내판을 뒤집었다.
민혁은 여전히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제 이야기해도 돼?”
서하가 물었다.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하는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물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민혁이 좋아하던 음료라도 꺼내 왔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우선 그가 편안하게 느끼도록 신경 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듣고, 필요한 대답을 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무슨 일인데?”
민혁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결혼하잖아.”
“응. 들었어.”
“다음 달이야.”
“그것도 들었어.”
“……그래.”
민혁은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네 생각이 나더라.”
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민혁은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결혼 준비하면서 예전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이 자꾸 생각나. 어디서 살고 싶다고 했는지, 결혼하면 어떤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는지…….”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둘이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던 밤들.
민혁은 작은 집이어도 좋으니 둘이 같이 살고 싶다고 했고, 서하는 주방이 넓은 집에서 아침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그 미래가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결국 그 미래는 오지 않았다.
“서하야.”
민혁이 그녀를 불렀다.
“우리 그때 왜 그렇게 됐을까?”
서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
“민혁아.”
서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정말 몰라?”
민혁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네가 바빠서 힘들다고 할 때 이해하려고 했어. 네가 약속을 취소해도 괜찮다고 했고, 연락이 늦어도 기다렸어. 네가 힘들다고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려고 했고.”
서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아픔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만 기다리고 있더라.”
민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너는 피곤하다고 했고, 내가 서운하다고 하면 예민하다고 했어. 네가 나한테 소홀해지는 건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서운해하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어.”
서하는 손끝을 꼭 쥐었다.
“내가 네 여자친구였는지, 그냥 네가 필요할 때 옆에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더라.”
“……미안해.”
민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서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 사과를 듣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혼자 울면서도 그가 한 번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날들.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주기를 바랐던 시간들.
그런데 막상 사과를 들으니 생각보다 마음이 조용했다.
기뻐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
서하가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 나는 아직 좋아하는데, 너는 이미 마음이 떠난 것 같아서.”
민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 내 생각만 했고, 네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어.”
“응. 그랬어.”
서하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알아도,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 2. 결혼을 앞둔 남자의 고백
민혁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 결혼을 앞두고도 네 생각이 났어.”
서하는 손가락을 멈췄다.
민혁은 마치 오래 숨겨 온 비밀을 털어놓듯 말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도 잘해 주고,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같이 있으면 편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
“그런데 결혼을 준비하다 보니까 문득 네 생각이 나는 거야. 우리가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네가 지금 내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하는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민혁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네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그건 지난번에도 물어봤잖아.”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혹시 나를 완전히 잊었는지도 궁금했어.”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혁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너는 나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
서하는 천천히 물었다.
“그걸 왜 알고 싶은데?”
“…….”
“내가 아직 너를 못 잊었다고 하면 뭐가 달라져?”
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결혼을 미룰 거야? 지금 만나는 사람한테 헤어지자고 할 거야? 아니면 그냥 네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아직 너를 생각한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싶은 거야?”
민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럼 무슨 뜻인데?”
서하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민혁아, 나는 네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했어. 우리가 헤어졌다고 해서 네가 불행하기를 바란 적은 없어.”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네가 결혼을 앞두고 내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건…… 나한테 너무 이기적인 일이야.”
민혁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하다면, 나를 다시 흔들려고 하지 마.”
서하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이제 겨우 괜찮아지고 있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태준을 만나면서 서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반드시 자신을 잃는 일은 아니라는 걸 배우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해도 괜찮고,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해도 괜찮고, 상대방에게 기대도 괜찮다는 사실을.
그런데 민혁은 아무렇지 않게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물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민혁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아직 나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아.”
서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걸 알면 네가 편해질 것 같았어?”
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민혁아.”
서하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한때 너를 정말 많이 좋아했어.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 네가 내 인생에서 소중했던 사람인 것도 맞아.”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서하는 눈물을 참으며 웃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날보다, 네가 다시 나타나지 않아서 편안하게 지내는 날이 더 많아졌어.”
민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이제 내 삶을 살고 싶어.”
서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민혁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러니까 네 결혼은 네가 알아서 잘 준비해. 나한테 와서 네 마음을 확인하지 말고.”
민혁은 물컵을 바라봤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할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서하야.”
“응?”
“너 지금 만나는 사람…… 좋은 사람이야?”
서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응. 좋은 사람이야.”
“……그래.”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왜 힘드냐고 묻는 사람이야.”
서하는 민혁을 바라봤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야.”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하는 가게 문을 열어 주었다.
“조심히 가.”
민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서하를 돌아봤다.
“서하야. 행복해.”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민혁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딸랑.
작은 풍경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서하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하…….”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민혁을 다시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그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을 뿐이었다.
서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아주 작게 울었다.
### 3. 이번에는 내가 먼저
밤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강태준은 회사에서 막 퇴근한 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서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서하]\
태준 씨, 지금 뭐 해요?
태준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강태준 ❤️]\
이제 퇴근했어요. 무슨 일이에요?
잠시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서하]\
오늘 가게에 민혁이가 왔어요.
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썼다.
[강태준 ❤️]\
괜찮아요?
한참 동안 답장이 없었다.
태준은 전화를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서하]\
사실 괜찮지는 않아요.
그 문장을 읽은 순간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태준 ❤️]\
지금 갈게요.
[윤서하]\
아니에요. 늦었잖아요.
[강태준 ❤️]\
늦어도 괜찮아요.
[윤서하]\
태준 씨도 피곤할 텐데……
[강태준 ❤️]\
서하 씨가 괜찮지 않다면서요.
잠시 뒤, 서하에게서 주소를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는 짧은 답장이 왔다.
[윤서하]\
응. 보고 싶어요.
태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차에 올라 두부참이슬로 향했다.
운전하는 동안에도 계속 서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괜찮지 않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서하는 평소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기대지 않았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서하가 먼저 보고 싶다고 말했다.
태준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지금 갈게요.
### 4. 괜찮지 않아도 되는 밤
두부참이슬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밤 열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게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태준이 문을 열자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요?”
“네.”
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붉었다.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조금 떨렸다.
태준은 아무 말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서하 앞에 멈춰 섰다.
“서하 씨.”
“응?”
“안아 줘도 돼요?”
서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서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의 셔츠를 꼭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태준은 놀라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왜 미안해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서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태준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울 수 있도록 가만히 안아 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하는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태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서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이야기했다.
민혁이 왜 찾아왔는지.
결혼을 앞두고도 자신을 생각했다고 말한 것.
자신이 아직 그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한 것.
그리고 자신은 이제 겨우 괜찮아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까지.
태준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었겠어요.”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와서 마음이 복잡해졌다고 해서, 서하 씨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예전 이야기를 꺼내면 당연히 마음이 흔들릴 수 있어요. 그게 꼭 다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서하는 그의 셔츠를 조금 더 꼭 붙잡았다.
“나 정말 다시 만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알아요.”
“정말이에요.”
“믿어요.”
태준의 대답은 흔들림이 없었다.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 믿어요?”
태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네. 서하 씨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누구의 손을 잡고 싶은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서하의 손을 잡았다.
“저잖아요.”
서하는 눈물을 머금은 채 웃었다.
“……맞아요.”
“그럼 됐어요.”
태준은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제가 바꿀 수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 서하 씨가 어떤 사랑을 할지는 같이 만들어 갈 수 있잖아요.”
서하는 그를 바라봤다.
“태준 씨.”
“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좋아하니까요.”
“그 말 말고요.”
“그 말이 전부인데.”
서하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가끔 내가 좋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사랑받으려고 너무 애썼거든요. 상대방이 떠날까 봐 싫은 것도 싫다고 못 하고, 서운한 것도 참았어요.”
태준은 조용히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싶어요.”
태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서하 씨.”
“응?”
“사랑받기 위해서 완벽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요.”
서하는 숨을 멈췄다.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고, 가끔은 아무것도 하기 싫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사랑받을 수 있어요.”
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저는 서하 씨가 늘 웃고, 늘 괜찮고, 늘 강한 사람이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서하 씨도 좋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서하 씨도 좋아요. 제가 서운하게 하면 서운하다고 말해 주는 서하 씨도 좋고요.”
서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러니까 저한테까지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요.”
태준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늘은 그냥 울어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서하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울고 싶어서 울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서 기댔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 서하는 조용히 말했다.
“태준 씨.”
“네.”
“나 오늘은 혼자 집에 가기 싫어요.”
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제가 데려다줄게요.”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줘요.”
태준은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요.”
그는 그녀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가게의 작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가게 안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작게 울렸다.
그리고 서하는 처음으로 알았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 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어도 괜찮고, 눈물을 흘려도 괜찮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그녀는 태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태준 씨.”
“네.”
“나 오늘도 태준 씨가 좋아요.”
태준은 웃었다.
“저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좋아할 거예요.”
“내일은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럼 내일 다시 좋아한다고 말할게요.”
서하는 웃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바보.”
“네. 서하 씨 바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