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단골 할인은 없습니다
作 루시엘 · 2026-10-20
## 3화. 단골 할인은 없습니다
밤 아홉 시 사십 분.
윤서하는 주방에서 두부를 썰고 있었다.
도마 위에 놓인 두부는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김치는 먹음직스럽게 볶아졌고, 프라이팬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적어도 서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사장님!”
옆 가게 미자 이모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오늘 그 잘생긴 총각 안 와?”
서하의 칼질이 멈췄다.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맨날 두부김치 먹으러 오는 총각 있잖아.”
“아, 그 진상요?”
“그래, 그 진상!”
미자 이모는 신이 난 얼굴로 손뼉을 쳤다.
“그 총각 말이야. 어제 검은색 차 타고 가는 거 내가 봤거든? 세상에, 차가 얼마나 번쩍번쩍한지. 운전하는 사람도 따로 있더라니까?”
서하는 다시 칼을 움직였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혹시 그 총각 돈 많은 집 아들 아니야?”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술값이나 제때 내면 됐지.”
“아이고, 우리 서하가 또 관심 없는 척은.”
“이모.”
“응?”
“나가세요.”
“어머, 무서워라!”
미자 이모는 입으로는 무섭다고 하면서도 전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남자가 그렇게 자주 오는 건 이유가 있는 거야.”
“두부김치가 맛있겠죠.”
“두부김치가 뭐 얼마나 맛있다고 매일 오겠니?”
“제 두부김치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아이고, 그래. 네 음식이 맛있긴 하지. 그런데 그 총각은 음식보다 네 얼굴 보러 오는 것 같더라.”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어젯밤부터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태준이 마지막에 했던 말.
사장님이 기다리실까 봐요.
그 말을 할 때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능글맞게 웃으면서도 어쩐지 진심처럼 들렸던 목소리.
서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강태준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을 놀리고, 반응을 살피고, 재미있어하는 남자.
그런 남자의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모, 진짜 나가세요. 손님 오잖아요.”
“손님이 어디 있어?”
“곧 올 거예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게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렸다.
딸랑.
서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검은 코트에 단정한 셔츠.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다른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를 든 남자.
강태준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태준이 환하게 웃었다.
“저 왔어요.”
서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안 물어봤거든요.”
“아, 그러세요?”
“네.”
“그럼 다시 말할게요. 저 왔습니다.”
“…….”
미자 이모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총각. 어서 와요! 오늘도 두부김치?”
“네. 두부김치 하나, 참이슬 하나요.”
“어머, 주문도 똑같네.”
미자 이모는 서하의 등을 툭 치고는 자기 가게로 돌아갔다.
“서하야, 잘해 봐!”
“이모!”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종이봉투를 올려놓았다.
“그건 뭐예요?”
서하가 물었다.
태준의 눈이 반짝였다.
“궁금하세요?”
“아니요. 테이블이 좁아서 치우라고요.”
“너무하시네.”
태준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조각 케이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제가 사장님 놀리다가 너무 많이 혼났잖아요.”
“매일 혼나시는데요.”
“그러니까 사과의 의미로 사 왔어요.”
서하는 케이크를 바라봤다.
“저 안 먹어요.”
“아직 맛도 안 봤는데요?”
“단 거 안 좋아해요.”
“정말요?”
“네.”
“그럼 제가 두 개 다 먹어도 되겠네요.”
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케이크 하나를 꺼냈다.
서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거 제 거예요?”
태준의 손이 멈췄다.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단 거 안 좋아하신다면서요?”
“안 좋아한다고 했지, 안 먹는다고는 안 했거든요.”
“아, 그렇구나.”
태준은 케이크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럼 사장님 거는 남겨 둘게요.”
“두 개 다 제 거예요.”
“네?”
“사과하는 사람이 케이크 두 개를 사 왔으면 두 개 다 주는 게 예의 아닌가요?”
태준은 잠깐 서하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님, 생각보다 욕심 많으시네요.”
“돈 내고 먹는 거 아니니까요.”
“그럼 제가 돈 내고 사 오면 한 개는 제 건가요?”
“그건 사장님 마음이죠.”
“아니, 방금까지는 사장님 거라면서요.”
“말이 많으시네. 술이나 드세요.”
서하는 케이크 봉투를 주방 안쪽으로 가져갔다.
태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귀엽다.
정말이지, 이 여자 앞에서는 별것 아닌 일에도 자꾸 웃음이 나왔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눈치 보느라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할 말은 다 했다.
아니, 이제는 알고도 똑같이 대할 것 같았다.
그게 좋았다.
“두부김치 나왔습니다.”
서하는 접시를 태준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참이슬은 냉장고에 있어요. 직접 가져가세요.”
“네, 사장님.”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때 서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이 테이블 위를 짧게 흔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서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야.”
순간 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태준은 냉장고 문을 열던 손을 멈췄다.
“……누구세요?”
“나야. 목소리도 잊었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낮게 웃었다.
“너 아직 그 가게 해?”
서하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일이세요?”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잘 지내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야, 잠깐만. 우리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없어요.”
서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사장님.”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왜요?”
“괜찮으세요?”
너무 뜻밖의 질문이었다.
서하는 순간 대답을 잊었다.
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 누구냐고, 무슨 일이냐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하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태준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저 두부김치 먹어도 되죠?”
서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사장님 표정이 무서워서요.”
“원래 무서워요.”
“알아요.”
“아는데 왜 자꾸 와요?”
태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좋으니까요.”
서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가요?”
“여기가요.”
태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낡은 테이블과 오래된 의자, 벽에 붙은 메뉴판.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김치 냄새.
“여기 오면 마음이 편해져요. 사장님은 무섭지만.”
“마지막 말은 빼면 안 돼요?”
“그럼 마음이 편해지는 건 맞으니까요.”
서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남자는 가끔 이렇게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장난만 치는 줄 알았는데, 어떤 순간에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서하는 고개를 돌렸다.
“술이나 드세요.”
태준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네. 사장님.”
그날 태준은 평소보다 조용히 술을 마셨다.
서하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자의 목소리가 걸려 있었다.
서하야.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밤 열한 시 십 분.
태준은 계산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평소라면 여기서 끝났을 인사였다.
하지만 태준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사장님.”
“또 왜요?”
“저 내일도 와도 돼요?”
서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님이 가게에 오는 걸 제가 어떻게 막아요?”
“그럼 내일도 올게요.”
“마음대로 하세요.”
태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 마음대로 할게요.”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서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요.”
태준이 돌아봤다.
“네?”
서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케이크…….”
“네?”
“맛있었어요.”
태준의 눈이 커졌다.
서하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냥 그렇다고요.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었어요.”
태준은 천천히 웃었다.
“다행이네요.”
“뭐가요?”
“사장님이 좋아하셔서요.”
“좋아한다고는 안 했거든요!”
“네. 맛있었다고만 하셨죠.”
“그러니까요!”
태준은 웃음을 참으며 문을 열었다.
“그럼 내일은 다른 걸 사 올게요.”
“안 사 와도 돼요!”
“알겠습니다. 꼭 사 올게요.”
“강태준 씨!”
태준은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딸랑.
문이 닫혔다.
서하는 한참 동안 문을 노려봤다.
“저 인간 진짜…….”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서하는 재빨리 표정을 굳혔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절대로.
한편, 술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
검은색 세단 옆에 서 있던 최도윤은 휴대전화를 확인하다가 태준을 발견했다.
“대표님.”
“왜?”
“이제 나오십니까? 내일 아침 회의 자료 확인하셔야 하는 거 아시죠?”
“알아.”
“그런데 오늘도 거기 다녀오신 겁니까?”
태준은 대답 대신 차에 올랐다.
도윤은 운전석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대표님이 왜 매일 작은 술집에 가서 두부김치를 드시는 겁니까?”
“맛있으니까.”
“호텔 셰프가 만든 음식도 드시잖아요.”
“그건 그거고.”
“도대체 그 사장님이 뭐가 그렇게 좋으신 겁니까?”
태준은 창밖을 바라봤다.
가게의 불빛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냥.”
“그냥이요?”
“나를 대표님이라고 안 부르잖아.”
도윤은 잠시 말을 잃었다.
태준이 작게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똑같이 받아치고, 잘난 척하면 혼내고, 장난치면 화내고.”
“그게 좋은 겁니까?”
“응.”
“……대표님 취향이 상당히 독특하시네요.”
“그런가?”
“네. 아주 많이요.”
태준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회사에서 온 연락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그는 화면을 끄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윤아.”
“네.”
“나 연애할 것 같아.”
도윤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예?!”
“왜 그렇게 놀라?”
“대표님이요? 연애를요?”
“내가 연애하면 안 되냐?”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도윤은 룸미러로 태준을 바라봤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벌써부터 걱정되네요.”
태준은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잘할 거니까.”
“대표님, 그 말이 제일 불안합니다.”
태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한참 동안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일도 찾아가면 되니까.
두부김치 한 접시를 주문하고, 그녀에게 한 번 더 말을 걸고, 오늘보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는 날이 올 때까지.
다음 날 오후.
윤서하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테이블을 닦았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왔다.
할 일이 많아서였다.
두부도 새로 주문해야 했고, 김치도 볶아야 했고, 냉장고 정리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오후 여섯 시.
아직 올 시간이 아니었다.
오후 일곱 시.
오늘은 조금 늦나?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남자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오후 여덟 시 삼십 분.
가게 문이 열렸다.
딸랑.
서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은 강태준이 아니었다.
동네에 사는 중년 남자 손님이었다.
“사장님, 김치찌개 하나요.”
“네. 잠시만요.”
서하는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괜히 실망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정말이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서른 살이었다.
사랑에 데인 적도 있었고, 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 자신이 고작 며칠 찾아온 단골손님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딸랑.
문 위의 종이 울렸다.
“사장님!”
너무 익숙한 목소리.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태준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아주 뻔뻔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서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왔네요.”
태준의 눈이 반짝였다.
“어?”
“왜요?”
“오늘은 반응이 좀 다르신데요?”
“뭐가요?”
“평소에는 오자마자 진상이라고 하셨잖아요.”
“오늘은 귀찮아서요.”
“그럼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에요?”
태준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저를 조금 덜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은 메뉴판을 펼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주문했다.
“사장님.”
“네.”
“두부김치 하나, 참이슬 하나요.”
“네.”
서하가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요.”
“또요?”
태준은 환하게 웃었다.
“저 이제 단골이잖아요.”
서하는 천천히 돌아봤다.
“그래서요?”
“할인해 주세요.”
“싫어요.”
“너무하시네.”
“정가 내세요.”
태준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사장님 마음이라도 할인해 주세요.”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서하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두부김치 가격 두 배입니다.”
태준의 눈이 커졌다.
“사장님!”
“왜요?”
“그건 너무 비싸잖아요!”
서하는 환하게 웃었다.
“마음값은 더 비싸거든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좋네요.”
“뭐가요?”
“그럼 평생 돈 벌어서 내야겠네요.”
서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매일 밤 가게를 찾아오는 이 남자가, 언젠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 3화 끝.
### 다음 화 예고 — 4화. 사장님, 저 잘생겼죠?
“사장님, 솔직하게 대답해 보세요.”
“싫어요.”
“저 잘생겼죠?”
“아니요.”
“그럼 왜 자꾸 저를 쳐다보세요?”
“……손님이 너무 시끄러워서요.”
“그럼 조용히 하면 저한테 반하실 수도 있겠네요?”
“강태준 씨.”
“네?”
“오늘부터 출입 금지입니다.”
“사장님, 저희 연애하기도 전에 이별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