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플러팅이 아니었어
作 루시엘 · 2026-10-19
## 10화. 플러팅이 아니었어
사랑하는 사람과 연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서하린은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 답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익숙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이고 확인하는 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는 것.
그 사람의 여자친구가 되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기뻐하는 것.
그 모든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설레고, 조금은 낯설었다.
하린은 아침부터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화면에는 어젯밤 이준과 주고받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이준
잘 자요, 내 여자친구.
오늘 많이 보고 싶었어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이 좋아할게요.
서하린
잘 자요, 내 남자친구.
저도 좋아해요.
내일은 꼭 안아 주세요.
하린은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읽고는 혼자 웃었다.
“아, 진짜…….”
얼굴이 뜨거워졌다.
분명 자신이 보낸 메시지인데, 다시 읽으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이준
여자친구, 일어났어요?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친구.
그 두 글자가 이렇게 사람을 간질일 줄은 몰랐다.
하린은 한참을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서하린
네, 남자친구.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하린은 깜짝 놀라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여보세요?”
\- 하린 씨.
“네.”
\- 방금 그거 뭐예요?
“뭐가요?”
\- 남자친구라고 했잖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이 들렸다.
\- 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은데요.
“……그걸로요?”
\- 네. 저 원래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봐요.
“강이준 씨.”
\- 네, 여자친구.
하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그렇게 부르지 마요.”
\- 왜요?
“부끄럽잖아요.”
\- 저는 좋은데.
“…….”
\- 그럼 오늘 하루 종일 불러야겠다.
“안 돼요!”
\- 왜요. 제 여자친구인데.
하린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이 남자는 정말 큰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을 흔드는 말을 하고, 자신이 한 말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처음에는 그저 능숙한 플러팅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에게나 웃어 주고, 누구에게나 설레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이준은 자신을 설레게 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설레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 하린 씨.
“네?”
\-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음…….”
\- 제가 좋은 곳으로 데려갈까요?
“어딘데요?”
\- 비밀.
“또 비밀이에요?”
\- 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하린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믿어 볼게요.”
전화기 너머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 잘했어요.
“뭘요?”
\- 저 믿어 줘서요.
그 말에 하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믿어 보겠다고 말하는 것과 정말 믿는 것은 달랐다.
하린은 아직 가끔 두려웠다.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면 언젠가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겁이 났고, 누군가의 다정함이 오래가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사랑을 미루고 싶지도 않았다.
하린은 조용히 말했다.
“이준 씨.”
\- 네.
“오늘 많이 안아 줘요.”
잠깐의 침묵.
그리고 이준이 웃었다.
\- 그건 제가 제일 자신 있는데요.
“……진짜!”
\- 이따 봐요, 하린 씨.
“네. 이따 봐요.”
통화가 끝난 뒤에도 하린은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 진짜 연애하네…….”
그 말이 어쩐지 꿈처럼 느껴졌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준은 먼저 와 있었다.
검은색 코트에 단정한 셔츠.
한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하린을 발견한 이준이 환하게 웃었다.
“하린 씨!”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하린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이제는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좋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거짓말.”
“왜요?”
“제가 십 분 전에 도착했는데, 그때부터 저기 서 있었잖아요.”
이준이 잠시 멈칫했다.
“……봤어요?”
“네.”
“그럼 조금만 더 멋있게 서 있을걸.”
하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멋있는데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린의 눈이 커졌다.
이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멋있다고 했잖아요.”
“못 들은 걸로 해요.”
“싫은데요.”
이준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말해 줘요.”
“안 해요.”
“한 번만.”
“싫어요.”
“여자친구가 남자친구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줘요?”
하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준 씨, 우리 사귄 지 하루도 안 됐어요.”
“그래서요?”
“벌써 이렇게 뻔뻔해요?”
“원래는 더 뻔뻔한데 참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이준은 웃으며 하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 사이를 맞물렸다.
깍지.
하린은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이 닿고, 손가락이 얽히고, 그 사이로 따뜻함이 번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금 망설였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준이 손을 내밀면 자신도 잡으면 됐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됐다.
그 단순한 일이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줄은 몰랐다.
“하린 씨.”
“네?”
“오늘 제가 데려갈 곳이 어딘지 궁금하죠?”
“엄청 궁금해요.”
“그럼 출발할까요?”
“네!”
하린은 이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여기요?”
하린은 눈앞에 있는 가게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한 간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따뜻한 조명.
저녁이면 사람들이 모여 웃고 이야기하던 작은 술집.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여기…….”
“기억나요?”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준을 만난 곳이었으니까.
그날 하린은 친구 채원과 함께 술집에 왔었다. 별다른 기대도,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그저 하루를 마무리하며 친구와 웃고 떠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러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은 채.
‘혹시 번호 물어봐도 될까요?’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하린은 가게 간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저는 꼭 다시 오고 싶었어요.”
“왜요?”
이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제가 하린 씨를 처음 본 곳이잖아요.”
“…….”
“여기서 하린 씨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손잡고 있지도 않았겠죠.”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그래서 고마운 곳이에요.”
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준을 바라봤다.
이준은 그런 하린을 보고 작게 웃었다.
“들어갈까요?”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에는 처음 만났던 날과 비슷한 음악이 흘렀다. 직원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고, 이준은 미리 예약해 둔 자리를 안내받았다.
창가 쪽 자리였다.
하린은 의자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 분위기 그대로네요.”
“그러게요.”
“그날 기억나요?”
“어떻게 잊어요.”
이준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저 그날 아무것도 제대로 못 했는데요.”
“뭘요?”
“하린 씨한테 다가가기까지 엄청 오래 걸렸어요.”
하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요? 저는 엄청 자연스럽게 다가온 줄 알았는데.”
“전혀요.”
“왜요?”
“친구가 계속 놀렸거든요.”
이준은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린 씨를 계속 보고 있었나 봐요. 도윤이가 옆에서 그만 쳐다보라고 하는데도 자꾸 눈이 갔어요.”
“……계속요?”
“네.”
“왜요?”
이준은 대답 대신 하린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진지한지, 하린은 괜히 물컵을 들었다.
“그냥…….”
“그냥?”
“그때 하린 씨가 웃고 있었거든요.”
“제가요?”
“네.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이준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몰라요. 무슨 음식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 안 나요. 그런데 하린 씨가 웃는 얼굴은 아직도 기억나요.”
하린의 손이 멈췄다.
“그날 처음 봤는데요?”
“그러니까요.”
“처음 본 사람을 그렇게 기억할 수 있어요?”
“저도 신기해요.”
이준이 웃었다.
“그런데 진짜 그랬어요. 처음에는 그냥 한 번 말을 걸어 보고 싶었어요. 번호를 물어보고 싶었고, 괜찮은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요.”
“…….”
“그다음에는 한 번 더 만나고 싶었어요. 만나고 나니까 또 보고 싶었고요.”
하린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중에 하린 씨 생각을 안 하는 시간이 없더라고요.”
이준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잘 잤는지 궁금하고, 밥을 먹으면 밥은 먹었는지 궁금하고, 재미있는 걸 보면 같이 보고 싶고요.”
“…….”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됐어요.”
그는 하린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때 알았어요. 아, 나 이 사람 진짜 좋아하는구나.”
하린의 눈가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이준은 그런 하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울어요?”
“아니요.”
“눈이 빨개졌는데요.”
“조명이 그래요.”
“조명이요?”
“네.”
이준은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 제가 조명을 바꿔 달라고 할까요?”
“강이준 씨!”
“네, 여자친구.”
하린은 결국 웃어 버렸다.
울컥했던 마음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준은 그런 하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사람처럼.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날의 이야기를 나눴다.
하린은 이준이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 얼마나 오래 망설였는지 물었고, 이준은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 제가 번호 안 줬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준은 잠시 생각했다.
“아마 후회했겠죠.”
“그냥 포기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우리는 못 만났겠네요?”
“네.”
하린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이상하다.”
“뭐가요?”
“그날은 그냥 평범한 날이었거든요.”
하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그날 특별한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친구랑 밥 먹고 술 마시고 집에 가려고 했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어요.”
하린은 웃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을 기다리고, 길을 걷다가도 이준 씨가 좋아할 것 같은 걸 보면 사진을 찍고, 맛있는 걸 먹으면 다음에는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해요.”
“…….”
“그리고 이제는 하루를 마무리할 때 이준 씨한테 잘 자라고 말하는 게 당연해졌어요.”
이준은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린은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렇게 되는 거였네요.”
“하린 씨.”
“네?”
“저도 그래요.”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저는 조금 더 심한 것 같아요.”
“얼마나 심한데요?”
“하린 씨가 뭐 먹었는지 궁금하고, 어디 갔는지 궁금하고, 지금 뭐 하는지도 궁금해요.”
“…….”
“그렇다고 매번 물어보면 부담스러울까 봐 참는 중이에요.”
하린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물어봐도 돼요.”
“정말요?”
“네. 다만 제가 답하기 어려울 때는 조금 기다려 줘야 해요.”
“당연하죠.”
“그리고 제가 혼자 있고 싶은 날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도 기다릴게요.”
“…….”
“하린 씨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제가 하린 씨를 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 말이 하린의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았다.
과거에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서운해했다. 연락이 조금 늦어지면 마음이 변한 거냐고 물었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부족한 거냐고 따졌다.
그래서 하린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숨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준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하린의 마음을 존중했다.
붙잡으면서도 숨 쉴 공간을 남겨 주었다.
하린은 조용히 말했다.
“이준 씨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이준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 말 정말 좋네요.”
“왜요?”
“제가 하린 씨한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어떤 사람이요?”
“좋아한다고 말해도 무섭지 않은 사람. 힘든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이 있어도 편안한 사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하린 씨가 힘든 날에도, 기쁜 날에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런 것 같아요.”
그 순간 이준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기쁘면서도 벅차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정말요?”
“네.”
하린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제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이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럴게요.”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오래오래.”
식사를 마친 뒤 이준은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이거요.”
“뭐예요?”
“선물.”
하린의 눈이 커졌다.
“선물이요? 오늘 무슨 날도 아닌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우리 사귀기로 한 날이요?”
“네.”
하린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는 작은 사진첩과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사진첩을 펼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이 처음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카페에서 마주 앉아 웃고 있는 사진.
공원에서 나란히 걷다가 찍은 사진.
영화관 앞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
그리고 사진 부스에서 찍었던 네 컷 사진까지.
하린은 한 장씩 넘기다가 웃었다.
“이거 다 언제 준비했어요?”
“조금씩 모았어요.”
“사진첩까지 만들었어요?”
“네.”
이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아직 사진이 별로 없어서 아쉽긴 해요.”
“…….”
“앞으로 더 많이 채우면 되죠.”
하린은 사진첩을 가슴에 꼭 안았다.
“너무 좋아요.”
“정말요?”
“네. 정말로요.”
그녀는 사진첩을 다시 펼쳐 한 장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아직 이준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설레는 사람.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
그리고 언젠가 이 사람이 자신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모든 것이 완벽하게 확신되는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다투는 날도 있을 것이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하린은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했을 때 서로에게 돌아오는 일이라는 것을.
서로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상처를 줬다면 사과하고,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물어보는 일이라는 것을.
하린은 편지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이건 뭐예요?”
이준이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편지요.”
“지금 읽어도 돼요?”
“네. 다만…….”
“다만?”
“조금 부끄러울 수 있어요.”
하린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준 씨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봐야죠.”
“그럼 읽어 봐요.”
하린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반듯한 글씨로 편지가 적혀 있었다.
하린 씨에게.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해요?
저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요.
하린 씨는 친구들과 웃고 있었고, 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말을 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어요.
괜히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싶었고, 갑자기 다가가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도 자꾸 눈이 갔어요.
하린 씨가 웃는 모습이 좋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고, 어떤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
번호를 물어봤죠.
그때는 몰랐어요.
그 짧은 질문 하나가 제 하루를 바꾸고, 제 생활을 바꾸고, 제 마음까지 바꾸게 될 줄은요.
처음에는 번호를 알고 싶었어요.
그다음에는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다시 만나고 나서는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린 씨의 하루에 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린 씨가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하고 싶었고,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견디지 않았으면 했어요.
하린 씨가 무언가를 좋아하면 저도 알고 싶었고, 하린 씨가 싫어하는 것은 조심하고 싶었어요.
하린 씨가 웃으면 저도 행복했고, 하린 씨가 불안해하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게 됐어요.
그렇게 저는 하린 씨를 좋아하게 됐어요.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그 마음이 얼마나 커질지 몰랐을 뿐이에요.
하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