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노집사의 사정
作 외인 · 2026-10-19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베르타의 뜨개바늘이 멈췄다. 오토 경은 카드를 쥔 채 그레고르와 레티시아를 번갈아 봤다. 늙은이들도 공기가 바뀐 것쯤은 알았다.
레티시아: 베르타, 바구니 좀 받아 줘요. 수프 식겠어요.
레티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레티시아: 그레고르는 저랑 잠깐 복도에서 이야기 좀 해요.
복도는 어두웠다. 그레고르가 들고 온 등잔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
레티시아는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봤다.
레티시아: 오늘 오후에 양초 장수한테 받은 거죠.
그레고르: ...보셨습니까.
레티시아: 2층 창에서요.
그레고르는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레고르: 그렇습니다. 십 년째 받고 있습니다. 양초, 포도주, 세탁. 세 곳에서.
레티시아: 선대 공작님이 돌아가신 해부터요.
그레고르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레티시아: 장부에 다 있어요. 그 해에 세 군데 값이 한꺼번에 뛰었어요.
노인은 한참 그녀를 봤다. 그리고 등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미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봉투 대신 손바닥만 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가죽이 다 닳아 귀퉁이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그레고르: 보시지요.
레티시아는 수첩을 받아 등잔 불빛에 펼쳤다.
그레고르의 글씨였다. 반듯하고, 작고, 한 줄도 틀어지지 않은.
날짜. 받은 곳. 받은 금액. 그리고 그 옆에, 나간 곳. 베르타 연금. 오토 경 연금. 얀 연금. 재봉사 할멈 약값. 겨울 담요. 장례비 한 줄. 그 이름 위에는 가는 줄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십 년 치였다. 받은 돈과 나간 돈이 동전 한 닢까지 맞았다. 그레고르 자신에게 간 줄은, 한 줄도 없었다.
그레고르: 선대 각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레고르가 낮게 말했다.
그레고르: 벨하르트를 위해 몸 바친 자는, 죽을 때까지 벨하르트가 돌본다. 그 자리에 저 혼자 있었습니다. 지금 각하께서는 북부 국경에 계셨고요.
레티시아: 아버지께는 말씀드렸어요?
그레고르: 드렸습니다. 각하께서는 당연히 돌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레티시아는 서재의 깨끗한 책상을 떠올렸다. 숫자를 안 보는 사람. 약속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약속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
그레고르: 그해 장부는 적자였습니다. 수비대 증원이 있었고, 마님께서는 사교계에 막 복귀하셨고. 연금 넷을 새 줄로 올리면 각하께서 무엇을 깎으셔야 할지 아셨습니다. 수비대 아니면 마님이었지요. 어느 쪽도 각하께서 깎으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레티시아: 그래서 납품업자들한테 부탁했군요.
그레고르: 값을 조금 올려 받고, 그 일부를 제게 돌려 달라고. 장부에는 비싼 양초값만 남습니다. 각하께서는 아무것도 깎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레고르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레고르: 부끄러운 방법이라는 건 압니다. 그래서 이 수첩을 썼습니다. 언젠가 누가 물으면, 한 닢도 제 것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 드리려고요.
레티시아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 대신 받은 금액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레티시아: 그레고르. 양초값은 삼 할이 올랐어요. 포도주도, 세탁비도.
그레고르: ...그렇습니다.
레티시아: 그런데 그레고르가 받은 돈은 일 할이에요. 세 곳 다요.
그레고르의 눈이 수첩으로 내려갔다.
레티시아: 나머지 이 할은 어디로 갔을까요.
대답이 없었다.
레티시아: 그 사람들 주머니로 갔어요. 연금 한 닢을 그레고르 손에 쥐여 줄 때마다, 자기들은 두 닢을 챙긴 거예요. 십 년 동안.
레티시아는 머릿속 주판을 끝까지 튕겼다.
레티시아: 연금 넷을 처음부터 장부에 올렸으면, 이 집은 매년 그 두 배를 아꼈어요. 작년 겨울에 하인 다섯을 내보내지 않아도 됐을 만큼요.
그레고르의 손이 떨렸다.
얼음을 쟀을 때보다 더 크게. 노인은 수첩을 쥔 레티시아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벽에 손을 짚었다. 등잔 불빛 속에서 그가 갑자기 열 살은 더 늙어 보였다.
그레고르: 제가... 그 아이들을...
레티시아: 그레고르.
레티시아는 그의 팔을 잡았다.
레티시아: 그레고르는 도둑이 아니에요. 장부 밖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에요. 방법이 틀렸을 뿐이에요. 틀린 방법은 고치면 돼요.
그레고르가 그녀를 봤다.
레티시아: 이렇게 해요. 연금 넷은 내일부터 장부에 올려요. 정식으로, 선대 공작님 이름으로. 세 곳 납품업자는 다음 계약 때 값을 시세로 돌려요. 안 된다고 하면 바꾸고요. 그러면 연금을 다 내고도 이 집은 돈이 남아요.
그레고르: 각하께는... 제가 십 년 동안 각하를 속였다고 말씀드려야 합니까.
레티시아: 보고는 제 일이에요. 매주 한 번. 아버지랑 약속했잖아요.
레티시아는 수첩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레티시아: 제가 같이 갈게요. 이 수첩 들고요. 아버지는 숫자는 몰라도, 이게 뭔지는 아실 거예요.
그레고르는 수첩을 받아 들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흰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눈가를 한 번 눌렀다. 아주 짧게.
그레고르: ...아가씨는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레티시아: 사람은 변해요.
그레고르는 장갑을 다시 끼었다. 목소리가 돌아와 있었다.
그레고르: 장부도 변해야겠지요.
방 안에서 베르타가 수프를 데우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오토 경이 카드를 섞는 소리가 났다.
사흘 뒤, 공작의 서재.
레티시아는 그레고르와 나란히 섰다. 책상 위에는 닳은 수첩이 놓여 있었다. 공작은 그것을 끝까지 읽었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숫자를 읽는 게 서툰 사람이었다.
다 읽은 뒤 공작은 일어나, 그레고르 앞에 섰다. 그리고 집사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오스윈: 아버님 약속을 십 년 동안 혼자 짊어졌구나.
그레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장갑을 벗을 틈도 없었다.
연금 넷은 그날로 장부에 올랐다. 공작은 직접 펜을 들어 첫 줄을 썼다.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그레고르는 그 줄을 오래 내려다봤다.
그날 밤, 레티시아는 장부 위에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얼음. 납품업자 세 곳. 별관 장작은 이제 정당한 줄이 되었다. 그 밖에 몇 줄 더. 장부를 보름 동안 뒤져 찾아낸 구멍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하나씩 더해 나갔다.
저택 살림의 12퍼센트.
연금을 다 내고도, 하인을 한 명도 내보내지 않고도, 이 집은 해마다 그만큼을 아낄 수 있었다.
공작에게 내밀 개선안이었다. 레티시아는 마지막 줄까지 쓰고 펜을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남아 있었다. 장부에서 약값 바로 다음으로 큰 줄.
'마님 사교비.'
숫자로만 보면 제일 먼저 깎아야 할 줄이었다.
레티시아는 그 줄을 오래 내려다봤다. 그리고 어머니의 찻잔을 떠올렸다. 드라벨이 밀어낸 기록지를 말없이 집어 들던 손을.
펜 끝에서 잉크 한 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