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현으로
作 ミューズ · 2026-10-15
“우리만 떠날 수는 없소.”
방승환은 낡은 지도를 둘러싼 서른두 명의 얼굴을 보았다. 관리들은 짐을 싸 떠났으나 주민들 가운데는 노부모를 업고 갈 힘도, 며칠 버틸 식량도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을 두고 떠나자는 말 앞에서 사내들의 시선이 자꾸 지도 아래로 떨어졌다.
정윤재가 무릎 위에서 손을 폈다.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이 돕는 일은 아니오. 총도 탄약도 모자라오. 다른 동지들과 합쳐서 다시 싸워야 하오.”
일본군이 지나간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남는 쪽도 떠나는 쪽도 같은 기억을 품고 있었으므로, 어느 쪽이 더 동포를 생각하는지 따져서는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다.
승환이 동포들을 버릴 수 있느냐고 묻자 윤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지 않소.”
김준채가 두 사람 사이에 손을 내밀었다.
“마음까지 의심하면 밤을 새워도 결론이 안 나겠소.”
승환은 눈을 감았다 뜬 뒤 각자 판단하자고 했다. 남는 사람은 마을을 지키고 떠나는 사람은 다른 동지들에게 소식을 전하되, 어느 쪽이든 이곳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자고 덧붙였다. 손을 들어 보니 정확히 절반이었다. 윤재는 열다섯 명과 새벽에 떠나기로 했으며, 짐을 꾸리는 동안 남기로 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 * *
열차에서 탈취한 일본군 트럭들이 비포장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박한은 조수석에서 앞차의 적재함을 보았다. 식량과 의약품은 천막 아래에 묶었고, 미래에서 가져온 통신 단말과 무인장비는 평범한 군수품 상자에 넣었다. 항공 수송은 외부의 눈이 닿지 않는 집결 구역까지만 이용했다. 왕청현에 들어갈 때 보이는 것은 이 시대에도 돌아다니는 차량과 장비여야 했다.
출발 전 박한은 병사들을 모아 보안 지침부터 확인했다. 수송과 경계 보조에는 탈취한 트럭과 소총, 기관총을 우선 쓰되 정예 분대의 주무장은 유지하고 불필요한 노출을 막았다. 새 장비는 필요한 곳에서 쓰기 위해 가져온 것이지, 자기들이 얼마나 앞선 군대인지 구경시키려고 실어 온 것이 아니었다.
“드론은 마을 밖 지정 구역에서 띄운다. 로봇은 지시 전까지 상자에서 꺼내지 마. 주민 앞에 단말 펴 놓고 설명하는 일도 없도록.”
박한은 무기보다 먼저 식량과 구호품의 적재 상태를 살폈다. 도우러 왔다고 해 놓고 먹을 것부터 요구할 수는 없었다.
본부와의 연락 상태를 묻자 통신 지원병이 장비를 확인했다.
“현지에서는 자체망을 따로 구성해야 합니다. 왕청현까지 중계기가 줄곧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장거리 보고는 음성 위주로 시도하고, 여건에 따라 저장 보고와 다른 연락 수단을 함께 쓰겠습니다.”
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말의 창이 깨끗하다고 그 너머의 길까지 깨끗하게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비가 할 수 있는 일과 지금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이, 이곳에 온 뒤 새로 붙은 습관이었다.
전방 관측조가 마을에서 빠져나오는 무장 인원을 보고했다. 열여섯 명이었다. 드론 화면에서는 사람과 이동 방향이 표시되었으나 무슨 생각으로 어디에 가는 사람들인지까지 알려 주지는 않았다. 박한은 직접 접촉하기로 하고 앞으로 나갔다.
* * *
윤재는 풀숲에서 조선말이 들렸을 때 걸음을 멈췄다. 정지하라는 목소리는 가까웠지만 겨눌 대상은 보이지 않았고, 동료들도 총을 든 채 주위만 살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희도 조선인입니다.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총구를 내려 주십시오.”
윤재는 오히려 총을 더 단단히 잡았다.
“얼굴부터 보여 주시오. 그래야 내릴지 결정할 것 아니오.”
대답이 없었다. 윤재는 소리가 난 곳을 보았지만 풀과 흙, 관목의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맨 뒤의 동료가 떨리는 숨을 삼켰다. 그 소리까지 들릴 만큼 주위가 조용했다.
그때 길가의 풀이 사람의 어깨 모양으로 솟았다.
윤재는 자기도 모르게 총구를 들었다. 총을 든 상대가 앞에 서 있었는데도 방금 전까지는 그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낯선 얼룩무늬 옷과 그 위에 꽂힌 풀, 검게 칠한 얼굴이 땅의 빛깔과 겹쳐 있었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큰 몸이 바로 그곳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총구 내리시오.”
상대가 낮게 말했다. 위협하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윤재는 손목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것과 달리 상대의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싸우려 했다면 총을 쏘기도 전에 끝났을 거리였다.
뒤의 동료가 발을 옮기자 젊은 군인의 눈이 그쪽으로 갔다. 총구는 여전히 아래에 있었으나 그 눈길만으로 동료의 발이 멎었다. 윤재는 천천히 소총을 내리고 입술을 축였다.
“고려군 박한 중위입니다.”
“고려군? 임시정부 소속이오?”
“아닙니다. 비밀리에 조직된 독립 무력 단체입니다. 주민을 보호하고 이곳의 독립군과 협력하기 위해 왔습니다.”
실제 출신을 밝힐 수 없어 정한 대외 명칭이었다. 일본군이 오는 것을 아느냐는 윤재의 질문에 박한은 그래서 서둘러 왔다고 답했다.
박한이 손을 들었다.
윤재의 왼쪽에서 땅이 움직였다. 돌아보는 동안 오른쪽의 바위 그림자에서도 사람이 일어났다. 앞서 지나온 풀더미가 병사의 등으로 바뀌고, 나무뿌리 옆에서 얼굴 하나가 들렸다. 동료 하나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고 다른 사내는 허둥지둥 총구를 돌렸다가 윤재의 손에 붙잡혔다.
“쏘지 마!”
윤재의 고함에 소총이 내려왔다. 총을 든 사람들이 전후좌우에 있었지만, 누구도 성급히 움직이거나 웃지 않았다. 그 차분함이 더 무서웠다. 이들은 기다리던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자기들은 이미 전부 들켜 있었다.
윤재는 자기가 밟고 지나온 길을 보았다. 병사 하나가 신발의 풀을 털고 있었다. 조금 전 그가 누워 있던 자리와 윤재의 발자국 사이에는 한 걸음도 안 되는 틈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소?”
물어 놓고 나니 부끄러운 질문이었다. 박한은 길에 들어서는 것은 보았다고만 답했다. 윤재는 숲을 다시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일어난 사람이 전부라는 보장도 없었다.
“함께 돌아가 보겠소. 다만 아직 당신들을 믿는 것은 아니오.”
윤재가 말하자 박한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는 짧았다. 서로를 다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성 위에서는 돌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가 윤재의 이름을 듣고서야 문을 열었다. 승환은 일본 군용 표지가 남은 트럭과 그 위에 탄 동료들을 보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윤재는 직접 물어보라며 박한을 앞에 세웠다. 자기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박한이 다시 소개하자 승환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 단체가 있었소?”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함께 방어를 준비할 수 있을지 의논하고 싶습니다. 장비를 둘 건물도 필요합니다.”
승환은 낯선 군복을 살피다가 관리가 떠난 창고를 가리켰다. 허락인지 시험인지 모를 손짓이었다. 박한은 먼저 감사를 표하고 병사들에게 장비를 옮기게 했다.
* * *
창고에서 버려진 장부를 걷어 내는 사이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트럭과 일본군 소총은 낯설지 않았으나 짐을 내리는 군인들은 달랐다. 큰 체격과 말끔한 장구류, 얼룩무늬 옷을 살피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병사들은 상자에 덮개부터 씌웠다. 박한은 창고 안쪽을 통제 구역으로 정하고 경계병을 세웠다.
“곡식은 이쪽에서 나눕니다. 안쪽에는 위험한 군용 장비가 있으니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 설명으로 호기심까지 거둘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창문으로 목을 빼고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으며, 김 중사는 대답 대신 식량 상자를 앞으로 옮겼다. 보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주민을 함부로 밀칠 수도 없었으므로 통로와 출입 인원을 따로 정해야 했다.
승환과 윤재, 준채는 뒤편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포장을 걷은 비상식량 몇 봉지가 놓여 있었다. 승환은 얇고 번들거리는 봉투를 만져 보다가 박한이 뜯어 준 내용물을 내려다보았다. 눌린 밥에 잘게 썬 건더기가 엉겨 있었으니, 군인들이 급히 끼니를 때우려고 온갖 것을 섞어 넣은 모양이었다. 냄새는 제법 좋았지만 손님 앞에 낼 음식으로는 영 성의가 없어 보였다.
미안해하는 기색을 감추고 한 숟가락 입에 넣은 승환의 손이 멈췄다. 밥알 사이로 고기의 기름과 양념 맛이 퍼졌으며, 씹을수록 짭짤한 맛 뒤에 단맛이 돌았다. 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맛있을 때와는 달랐다. 이런 재료를 골고루 넣고 간을 맞춘 밥을, 이 얇은 봉투에서 꺼내 먹는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이런 것을 군인들이 먹는다는 말이오?”
박한이 그렇다고 하자 승환은 다시 밥을 보았다.
“고기도 들었구려. 이만한 것을 병사들에게 다 준다는 것이오?”
“야외에서 임무할 때 먹는 식량입니다. 오늘 나눌 곡식도 따로 가져왔습니다.”
승환은 옆에서 기다리는 윤재에게 봉투를 넘겼다. 한 숟가락 받아 먹은 윤재도 이번에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형편없는 밥을 내주었다고 생각했던 쪽은 자기들뿐이었고, 정작 저 젊은 군인은 대단한 것을 내놓았다는 얼굴조차 아니었다.
“고립된 지 오래라 식량이 많이 부족하실 겁니다. 우선 끼니부터 해결하시라고 급한 대로 가져왔습니다. 주민들께도 한 봉지씩 나누어 주십시오. 어떻게 먹는지는 저희 병사들이 알려 드리겠습니다.”
승환은 먹던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창밖의 트럭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만 먹으라고 내놓은 것이 아니었구려.”
“곡식도 따로 실어 왔습니다. 주민 수와 남은 식량을 알려 주시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함께 계산해 보겠습니다.”
승환이 준채를 불러 배급을 맡기자 문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트럭의 덮개를 걷고 식량 상자를 내려놓는 동안, 승환은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다가 목이 메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배급이 시작된 것을 확인한 박한은 승환과 윤재, 준채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닫고 나자 목소리가 한결 낮아졌다.
“이제 방어 준비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에 보안을 부탁드려야겠습니다.”
일본군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장비가 있으므로 작전에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보여 주겠다고 했다. 본 것과 들은 것은 동료들에게도 함부로 퍼뜨리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승환은 두 사람을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덮개를 벗긴 단말에 마을 밖 길이 나타났다. 윤재는 활동사진인가 싶어 들여다보다가 방금 성문을 나간 짐꾼이 화면 속을 걷는 것을 보고 몸을 굳혔다. 박한이 지금 정찰 중인 장비에서 보내오는 모습이라고 설명하자 준채는 창문과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저 밖을 여기서 본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다만 닿는 범위가 있고, 가려지면 보이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작동 원리를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세 사람은 이미 따라오기 벅찬 얼굴이었다. 멀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그것이 눈앞의 작은 판 안에 들어오는 일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윤재는 손을 뻗으려다 거두었고 승환은 무심코 의자를 뒤로 밀었다. 박한은 화면을 오래 켜 두지 않고 덮개를 닫았다.
“이 장비를 이용한 정찰과 화력 운용은 저희가 맡아야 합니다. 명령이 둘로 나뉘면 전력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왕청현에 있는 독립군의 작전 지휘권을 고려군에 맡겨 주십시오.”
윤재가 승환을 보았다. 일본군보다 탄약이 적어 철수하려던 사람들이었다. 어디에 누가 있는지조차 몰라 싸움을 피하려 했는데, 이들은 성 안에 앉아 밖의 길을 보고 있었다. 가져온 무장과 통신 장비의 차이를 확인한 뒤에도 자기들이 전투를 지휘하겠다고 할 근거는 없었다.
승환은 현지 사정은 자기들이 알려 주되 최종 전투 명령은 고려군이 내리는 것이냐고 확인했다. 박한은 고려군 최고지휘관 임영옥의 지휘 아래 자신이 현지 작전 지휘를 맡고, 독립군 지휘관들은 각자의 대원을 통솔하며 그 명령을 집행하는 체계라고 설명했다.
“주민 생활과 재산에 관한 일은 대표들과 의논합니다. 작전 중 병력 배치와 이동, 사격과 철수는 제 지시에 따라 주셔야 합니다.”
승환과 윤재가 동의했고 준채도 따랐다. 박한은 합의 내용을 짧게 적어 확인받은 뒤 독립군 전원에게 지휘권 위임을 알리게 했다. 마을을 나눠 지키는 두 군대가 아니라 하나의 작전 지휘 아래 싸우는 병력이 된 것이었다.
경계 구역과 대피 장소를 정할 때에는 현지인들의 설명을 들었다. 지휘권을 넘겨받았다고 지도에 없는 골목과 주민의 사정까지 저절로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 * *
의무병이 물을 끓여 달라고 부탁하자 노인은 평생 마신 우물물을 왜 낯선 사람이 의심하느냐고 했다. 전쟁 이야기를 하러 온 군인들이 물맛까지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의무병은 우물 탓을 하지 않고 사람이 모이면 물을 다루는 손과 그릇이 많아진다고 설명했으며, 먼저 자기 물통에 끓인 물을 받아 마셨다. 한동안 뒤에서 보던 주민들이 큰 솥을 가져왔다.
통신조는 창고 지휘소와 성벽의 관측 지점을 연결하면서 설치 위치와 예비 배터리를 기록했다. 왕청현 안의 화면이 살아나도 먼 기지까지 같은 속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윤재는 전자 장비가 닿지 않는 곳의 연락원을 따로 정했다. 최신 장비의 연락 계획 한쪽에 발 빠른 청년들의 이름이 함께 적혔다.
박한은 지원화기와 대피소 방호 장비도 가림막 안에서 준비하게 했다.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주민이나 적의 눈에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드론의 이착륙은 마을에서 보이지 않는 지정 장소로 제한했다. 운용병이 가까운 구간부터 시험한 뒤 범위를 넓히는 동안 지상로봇은 가림막 뒤에서 점검했다. 사람들 눈에 띄는 수송은 탈취한 트럭과 수레가 맡았다. 승환은 로봇 상자의 바퀴를 언뜻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다가, 필요한 때 설명하겠다는 대답에 더 캐묻지 않았다. 지휘를 맡겼다고 모든 비밀을 넘겨받은 것은 아니라는 약속도 함께 받아들인 터였다.
독립군의 소총은 정비병이 살폈다. 탈취한 무기 가운데 탄약 규격이 맞는 것부터 보충하고, 남은 수량은 따로 기록했다. 익숙한 총을 넘겨받은 대원들은 안도했으나 고려군의 통신 장비가 놓인 방 앞에서는 발걸음을 낮췄다. 같은 군사 장비여도 아는 물건과 모르는 물건 사이의 거리는 컸다.
윤재와 박한은 급할 때 쓸 신호와 지시를 맞추었다. 남북의 병사들끼리도 맞춰야 했던 일을 이제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다시 하고 있었다. 군사 교육을 언제 시작하느냐는 질문에는 그 뒤라고 답했다. 같은 조선말을 한다는 사실만 믿고 전투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 * *
기지에 도착한 보고에는 몇 시간의 시차가 붙어 있었다. 임영옥은 일본군의 이동이 기억하는 순서보다 빠르다는 설명을 듣고, 현장 확인과 지원 준비를 함께 진행하라고 했다. 차량과 연료, 도로와 중계 장비를 검토하는 동안에도 왕청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일본군의 빠른 움직임은 고려군에게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만주사변의 발발 시점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계산부터 틀릴 수 있었다. 부대를 재편하고 보급로를 확보하는 일조차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앞당겨진다면, 준비해 둔 작전들도 손을 쓰기 전에 기회를 놓칠 터였다. 압도적인 무기가 있다고 해서 병력과 물자를 원하는 곳으로 단숨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청현을 지키는 일은 그런 점에서도 중요했다. 동부 만주에서 진격해 오는 일본군을 이곳에서 한 차례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본대가 움직일 시간도 벌 수 있었다. 임영옥은 지도 위의 왕청현을 한동안 짚고 있다가 의무품을 더 싣게 한 뒤 본대의 출발 상황을 확인했다. 선발대가 벌어 주는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해서는 안 되었다.
* * *
왕청현의 두 번째 아침에는 탈취한 트럭이 구호품을 날랐다. 지장원은 주민과 대피 통로를 걸었고 김영철은 통제 구역에서 드론을 교대로 운용했다. 한 대가 돌아오면 점검하고 다음 것을 보내되, 필요한 관측 구간만 유지해 노출과 배터리 소모를 줄였다.
박한은 주민 대표들에게 안전을 장담하는 소문은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찾아오는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되, 현재의 병력과 식량으로 감당할 범위도 함께 알려야 했다. 승환은 주변 마을에 보낼 연락 내용을 고치고 대피 준비를 점검했다.
오후가 되자 관측 화면에 움직임이 들어왔다. 길을 따라 차량과 말이 나타났고 그 뒤로 병력이 이어졌다. 김영철은 확대 화면만 믿지 않고 별도 관측조의 보고를 기다렸으며, 가까운 구간을 살피고 돌아온 정찰형 지상로봇의 기록도 지도에 겹쳤다. 빈 구역이 줄어들수록 박한의 표정은 굳어졌다.
예상 도착일까지는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화면 속 병력은 지금 길 위에 있었다.
주민 대표들이 모였을 때 박한은 확인된 상황부터 설명하고 대피를 시작해 달라고 했다.
“일주일은 남았다 하지 않았소?”
“그렇게 예상했습니다. 지금 확인한 병력이 우선입니다.”
“그럼 다른 것도 틀릴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승환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사람들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우기지는 않는구려.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합시다.”
* * *
대피가 시작되자 전투 계획에는 없던 질문들이 쏟아졌다. 노인은 가축을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물었고 아이는 한쪽 신발을 찾으러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걷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하던 의무병은 연락원이 알려 준 뒷집으로 다시 뛰어갔다. 사람이 사는 곳을 지킨다는 일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하나씩 따라가는 일이기도 했다.
윤재는 동료들을 배치한 뒤 박한 곁으로 왔다.
“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했소. 우리는 중위의 지시에 따르겠소. 길과 주민 사정은 우리 연락원을 통해 물어 주시오.”
성 밖에서 먼지가 올라왔다. 화면으로 볼 때에는 표시와 거리였던 것들이 눈앞에서는 마을로 다가오는 군대가 되었다. 본대는 이동 중이었으나 언제 닿을지 확답은 없었으며, 김영철이 가져온 단말에서는 지역망 영상이 정상이라고 표시되고 있었다.
병사들이 손수레에 물통과 붕대를 실어 옮겼다. 가림막 뒤의 지원형 로봇은 위험 구역에 투입될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박한은 시계의 경과 시간을 켰다. 역사책에 적힌 날짜를 다시 확인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 병력이 성 앞에 닿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전원 준비한 위치로. 주민 대피 상태부터 확인한다.”
성 위와 골목에서 보고가 이어졌다. 익숙한 억양과 낯선 억양이 같은 무전 속에 섞였고, 윤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총의 장전 상태를 다시 살폈다. 떠나려던 길에서 돌아온 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을 문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어제와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