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세상에서 떨어진 군대
作 ミューズ · 2026-10-10
― 2045년 8월 15일, 판문점 ―
“하나, 두울, 세엣!”
천이 걷히자 함성이 터졌다. 오래도록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사람들이 이날만큼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남과 북의 정상이 나란히 잡아당긴 줄 끝에서는 평화의 동상이 여름 햇빛을 받고 있었다. 광복으로부터 꼭 백 년이 지난 날이었다. 백 년이면 나라의 이름도, 사람의 얼굴도 몇 번씩 바뀔 세월이었으나 휴전선만은 제자리를 지켰다. 사람보다 오래 사는 것이 사람이 그어 놓은 금이라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서글픈 일이었다.
상호 불가침 조약에 이어 종전 선언까지 이루어졌지만 사람들은 기뻐하는 일에도 얼마간의 여유를 남겨 두었다. 기대를 너무 크게 했다가 실망을 고스란히 떠안는 법을 이미 여러 번 배운 탓이었다. 그래도 이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노인 가운데는 오래전 두고 온 고향의 이름을 입 밖에 내보는 이가 있었고, 고향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동상이 드러날 때 함께 손뼉을 쳤다.
축하하는 나라가 많았다. 축하의 말이 모두 같은 뜻은 아니었지만, 그 차이를 따지기에는 아직 함성 소리가 너무 컸다.
― 2045년 8월 17일, 남한의 모처 ―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틀 전 함께 줄을 잡았던 두 정상이 이번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뒤에 선 실무 비서들은 메모할 준비를 마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창밖에서는 냉방기의 실외기가 부지런히 열을 내보내고 있었다. 방 안의 열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저 기계에 맡길 수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문제까지 맡길 기계는 없었다.
한국 대통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 국민이라고 모두 같은 생각은 아니지요. 통일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습니다.”
북한 정상은 모았던 손끝을 풀었다.
“그거야 각자 사정이 있을 겁니다. 오래 떨어져 살았으니 두려운 것도 많겠지요. 하지만 주변 국가들의 사정까지 우리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기다리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입니다. 문제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국지적인 군사 충돌까지 포함해서요.”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쪽의 반대 단체들에 외부 자금이 흘러들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북쪽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저쪽에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요.”
두 사람은 그 대목에서 함께 입을 다물었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내보낸 정보와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내준 권한들이, 이제 와서는 자기 집을 합치는 데에도 남의 허락을 구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총성이 사라지는 일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지만, 그 뒤에 다른 나라의 눈치를 덜 보는 강한 나라가 생기는 일까지 모두에게 좋지는 않았다.
“알려진 전력만으로는 부족하겠습니다.”
한참 뒤 대통령이 말했다. 북한 정상은 대답 대신 탁자 위의 얇은 서류철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표지에는 부대 이름도 창설 목적도 없었고, 다섯 자리 숫자 하나만 적혀 있었다.
2125.
축하 행사에서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동상을 세웠고, 이 방에서는 누구에게도 보여 주어서는 안 될 군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 * *
― 2046년 8월 20일, 대흥단 부근 ―
텔레비전에서는 땅이 사라진 자리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무주의 깊은 산중에 생긴 구멍은 지름만 오백 미터가 넘었으며, 화면 아래에서는 접근 금지라는 자막이 흘러갔다. 산을 오르던 사람이 발견했다고 했지만, 그 사람이 산을 오르러 간 것인지 세상이 비어 있는 자리를 보러 간 것인지는 이제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반이 내려앉은 보통의 싱크홀과는 다른 현상입니다.”
초청받은 교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전자기 이상이 관측되었고 한동안 방사선 수치도 높게 잡혔으나, 나무와 흙과 그 위의 구조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땅이 꺼졌으면 밑에 있어야 할 것들이 밑에도 없다는 설명에 앵커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태양 활동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평행우주로 이동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가능한 설명으로 제안된 가설입니다. 다만 사라진 것을 관측했다고 해서 도착한 곳까지 관측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로서는 모른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정확합니다.”
전문가를 둘이나 모셔 놓고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앵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청자들을 안심시킬 말을 더 찾고 싶은 얼굴이었고, 화면 바깥의 임영옥 준장은 리모컨을 들어 그 수고를 끝내 주었다.
틱.
검어진 화면에 피로한 얼굴이 잠깐 비쳤다. 마흔아홉에 단 별 하나를 두고 주변에서는 복이 많다고 했으나, 정작 그의 어깨에 올라앉은 것은 별보다 무거운 비밀이었다. 창설 중인 특수여단은 서류상 국방부 장관 직속이었고, 실제로는 남과 북의 정상이 함께 책임지는 통합부대였다. 나라가 합쳐지기도 전에 군대부터 한솥밥을 먹게 되었으니, 밥솥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걱정이 덜어질 리 없었다.
기지는 백두산 줄기가 뻗어 내린 대흥단 부근에 들어섰다. 깊은 산림과 골짜기를 이용해 주요 시설을 지하에 묻고, 지상의 건물들은 관광지 개발 시설로 위장했다. 위성에서 건물을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보이는 건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르게 짐작하도록 만들 수는 있었다. 휴양지로 신고된 곳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휴식이라는 사실만은 외국의 정보기관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남과 북에서 선발된 병력과 장비가 차례로 들어왔으며,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군인보다 늦게 잠들고 군인보다 먼저 불을 켰다. 정찰 드론과 소형 무인 지상차량, 이동식 중계기를 시험하는 동안 정비고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장비가 들어갈 자리를 비워 두었다. 완성된 부대를 받아 지휘하는 것과 부대를 만들면서 지휘하는 것은 달랐고, 임영옥의 책상에는 그 차이를 증명하는 서류들이 날마다 쌓였다.
무인 지상차량에는 총 대신 카메라와 센서, 물자 적재함과 부상자 운반대가 달렸다. 위험한 곳을 먼저 살피고, 사람이 메고 갈 짐을 나누어 지고, 쓰러진 사람을 데려오는 일만으로도 기계에게 맡길 임무는 충분했다. 병사 하나를 덜 위험하게 만드는 장비가 적 하나를 더 죽이는 장비보다 소박해 보일 수는 있어도, 지휘관에게 그 가치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위성에 의지하는 건 위험했다. 미국과 중국의 군사위성은 한반도 상공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자기 나라의 위성망을 갖추었다고 해도 전파 교란이나 관제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막아 주지는 못했다. 평소에는 가장 편리한 길이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끊기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고려군의 장비는 위성항법 신호가 사라졌을 때를 대비해 관성센서와 카메라, 저장된 지형 자료를 함께 쓰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통신이 닿지 않는 곳에는 이동식 중계기를 놓고, 외부망과 연결이 끊기더라도 기지 서버와 탑재형 인공지능은 독립적으로 작동하게 했다. 다만 설계서에 적힌 문장이 진흙 묻은 병사의 손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는 일은 따로 남아 있었다. 위성을 잃은 전장을 견디는 것도 이 부대가 받아야 할 시험 가운데 하나였다.
기술동의 김영 박사는 그 시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설명서 하나와 싸우고 있었다. 필요한 문서를 열려면 외부 인증 서버에 접속하라는 창이 떴는데, 외부망을 끊는 시험을 준비하던 사람에게는 몹시 성실한 농담처럼 보였다.
“통신망이 없어도 움직이는 장비를 만들었다면서 설명서는 통신망이 있어야 읽습니까?”
담당 연구원이 얼굴을 붉히자 박사는 더 꾸짖지 않고 화면을 가리켰다.
“우리 장비를 우리가 못 고치면 보안이 아니라 불편이에요. 필요한 자료는 안에서 열 수 있도록 해 둡시다.”
공작실에는 가공기와 측정 장비, 전자회로 수리대가 들어와 있었지만 없는 것이 더 많았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겠다고 감탄하는 장교에게 김영은 손톱을 깎을 줄 안다고 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공장은 이 산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정밀 부품 가운데는 당분간 재고에 기대야 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기술이 높아질수록 필요한 곳도 많아진다는 사실은 군수품 청구서에서 가장 정직하게 드러났다.
통신대대장 이참 소령은 옆 교육실에서 남북 병력의 보고 체계를 맞추고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다 군에 들어온 그는 어느 날에는 조직 운영을 설명하고 어느 날에는 화면이 나오지 않는 까닭을 설명했는데, 두 경우 모두 설명을 듣는 쪽은 당장 해결해 달라는 얼굴이었다.
“말투는 달라도 됩니다. 누가 보고받고 누가 결정하는지까지 달라지면 안 됩니다.”
기술자들이 병사에게 장비를 가르치면 병사들은 기술자에게 들판을 가르쳤다. 연구실 바닥에서는 얌전하던 운반로봇이 배수로에서 멈춘 날, 지장원 중사는 삽을 가져와 바퀴 대신 길을 손보았다. 연구원은 그 장면을 촬영해 두었고 지장원은 삽질까지 교재가 되느냐며 웃었다. 최신 장비와 오래된 연장이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 * *
보안 전화가 울린 것은 밤 열 시가 가까워서였다. 임영옥은 개인용 전화와 핫라인을 번갈아 보았다. 전자는 가족이 자신을 찾는 물건이었고 후자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물건이었는데, 이날도 반짝이는 것은 후자였다.
“임 준장입니다.”
“장관이오. 두 분께서 부대를 한번 보고 싶어 하십니다. 다음 주 초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대통령 한 사람의 방문에도 사라지는 잠이 적지 않은데 두 분이라면 얼마가 사라질지, 임영옥은 계산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병력과 장비가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합니다.”
“사열받으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준비된 대로 보여 드리면 됩니다. 조용히 다녀오실 겁니다.”
높은 곳에서 조용히 움직일수록 낮은 곳의 사람들은 분주해진다는 사실을 장관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임영옥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잠시 수화기를 들고 앉아 있다가 내려놓았다. 준비된 대로 보여 드리려면 준비되지 않은 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차량 대기시켜라. 부대 상황 점검하러 나간다.”
인터폰 너머에서 진 대위의 목소리가 반 박자 높아졌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많이 편해졌구나. 질문도 다 하고.”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급히 의자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임영옥은 웃다가 시계를 보았고, 웃음 한 번으로 부하의 밤을 갚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가를 거두었다. 그래도 점검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이 부대의 비밀은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었으나 준비가 덜 된 곳까지 자기 눈에 숨겨서는 안 되었다.
― 2046년 8월 25일, 2125부대 영내 ―
“단결!”
“됐어. 인원보고는 받았다.”
박한 중위는 김 중사의 보고를 손짓으로 끊고 소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두 정상의 방문은 소문 없이 끝났고, 전입한 지 사흘 만에 경호 임무를 치른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자신감이 나란히 남아 있었다. 서로 이름을 외우기도 전에 손발부터 맞춘 셈이었다.
특전사와 수색대에서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었으니 경호실의 칭찬을 받을 만했다. 다만 훌륭한 병사라는 말과 다루기 쉬운 병사라는 말은 어디서나 뜻이 달랐고, 남북의 명령 체계와 생활 습관까지 섞여 있는 소대를 맡은 박한은 그 칭찬을 자기 몫으로 받아 두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웠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같은 뜻으로 알아듣게 하려면 함께 보낼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전입하자마자 고생들 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영시 오십 분이 아니라 영오시다. 첫 수색훈련 준비에 지장 없도록 해.”
뒤쪽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김 중사가 지난번 집결 시간을 잘못 알아들었던 이야기는 벌써 소대 안의 공동 재산이 되어 있었다.
“우리 소대 첫 임무다. 장비 점검 빠뜨리지 말고, 몸이 이상한 사람은 참지 말고 보고해. 이상.”
“옛, 알겠습니다!”
박한은 병사들의 대답을 듣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막 손이 문틀에 닿으려던 순간, 발바닥 아래에서 무거운 무엇이 몸을 일으키는 듯한 진동이 올라왔다.
드드드드!
바닥이 옆으로 튀면서 어깨가 먼저 내무반에 부딪쳤다. 벽에 기대어 있던 물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사람의 비명과 쇠붙이의 소리가 뒤엉켜 어느 쪽에서 무엇이 떨어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박한은 훈련받은 대로 몸을 둥글게 말아 머리와 복부를 감쌌으나, 익숙한 동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익숙한 상황에 놓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머리 보호해! 낙하물 조심하고!”
고함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건물이 거대한 짐승의 등에 올라앉은 것처럼 뒤틀리더니, 이번에는 몸을 받치던 바닥이 먼저 아래로 사라지는 듯했다. 붙들 곳을 찾는 손이 허공을 저었고, 박한은 떨어지는 것이 자기 몸뿐이 아니라 벽과 천장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검은 구멍이 떠올랐다. 저 안으로 사라진 것들이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던 교수의 말도 함께 떠올랐으나, 이제 와서는 그 말의 뜻을 따져 볼 틈조차 없었다.
“싱크홀……!”
누군가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이 굉음에 묻혔다. 박한은 눈을 감으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돌아갈 집도, 지켜야 할 국경도 그대로 있다고 믿었던 군대가 그날 세상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