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언제 이렇게 컸어
by 영우 · 2026-10-27
"그러니까 이제 바라도 되는 거지?"
연무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여화는 컵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뭘."
"오늘 저녁. 나랑 밥 먹자. 둘이서만."
"안 돼."
연무가 눈꼬리를 시무룩하게 축 늘어뜨리며 웅얼댔다.
"……왜애."
여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쫑파티 있어."
그새 홍시가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자, 다들 수고했고! 오늘 저녁은 샤아트 대표님이 쏩니다! 이태원으로 집합!"
스태프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여화가 매서운 눈으로 홍시를 쏘아보았지만, 홍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메가폰을 내려놓았다.
"내가 쏜다고 한 적 없는데."
"범이가 쏜대. 아까 전화 왔어."
그럼 됐다는 듯 여화의 새하얀 얼굴이 금세 나른하게 풀어졌다. 연무는 그 얼굴을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나도 스태프야?"
"넌 모델이잖아."
"모델도 스태프지. 그것도 누나를 위한 노개런티 특급 스태프."
여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기며 툭 던졌다.
"늦으면 고기 없다."
연무의 입꼬리가 다시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 * *
이태원 클럽 VIP룸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샤아트 동기들, 홍시 스튜디오 스태프들, 그리고 구석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은 홍매. 홍시는 들어서자마자 홍매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둘 사이에 아직 끝나지 않은 족보 전쟁의 기운이 흘렀다.
"그래서. 몇 대손이냐니까."
홍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홍매는 대답 대신 홍시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삼십일."
홍시의 손이 멈췄다.
"……삼십이."
정적이 흘렀다. 나이는 홍시가 대여섯 살은 위였다. 그런데 항렬로 따지면 홍매가 아저씨뻘이었다. 홍매가 말없이 제 잔을 들어 보였다. 홍시는 한참을 노려보다가, 결국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부딪쳤다.
"……형님이라고 불러야 됩니까?"
홍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동기들이 배를 잡고 넘어갔다.
범이는 여화가 들어오자마자 위아래로 훑었다.
"촬영장 먼지 다 묻혀 왔네. 머리는 또 왜 이렇게 묶었어."
범이가 여화의 머리끈을 풀어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여화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연무는 그 손을 노려보았다. 공사장에서도 오늘도, 저놈 손은 너무 자연스럽게 누나 머리칼에 닿았다.
"여화 자리는 여기. 너는 저기."
범이가 여화를 제 옆자리에 앉히고, 연무에게는 맞은편 끝자리를 가리켰다. 연무는 못 들은 척 여화 옆, 범이의 반대쪽에 털썩 앉았다. 범이의 미간이 꿈틀했다.
"야, 거기 내 자리……."
"형 자리는 거기 있잖아요."
여화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눈을 맞췄다. 여화는 그 사이에서 메뉴판을 펼쳤다.
"이모 비빔국수 되지?"
둘 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 * *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홍시가 소주와 맥주를 섞어 테이블 가득 소맥을 말았다. 동기들이 박수를 쳤다. 범이가 눈짓하자 바 팀장이 여화 앞에만 따로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여화는 그 잔을 들어 연무의 잔에 툭 부딪쳤다.
"수고했어. 꼬맹이."
"……꼬맹이는 좀."
"싫으면 마시지 마."
연무는 웃으며 잔을 비웠다. 꼬맹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누나가 먼저 잔을 부딪쳐 왔으니까.
그날 밤 나는 술보다 누나를 더 많이 마셨다. 동기들 농담에 소리 내어 웃는 얼굴. 홍시 감독님 얘기에 눈을 흘기는 얼굴. 범이 형이 국수 그릇을 밀어 주자 군말 없이 젓가락을 드는 얼굴. 그 얼굴들은 전부 내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누나는 이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웃는구나. 나는 그게 좋으면서도,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새로 들어온 지 이틀 된 알바생이 쟁반을 들고 VIP룸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의 빈 잔들을 치우고, 새 잔을 채웠다. 조명이 어두웠다. 여화의 위스키 잔도 비어 있었다. 알바생은 친절하게도, 테이블 가운데 남아 있던 소맥을 그 잔에 찰랑찰랑 부어 놓았다.
여화는 홍시의 졸업 작품 얘기에 고개를 돌린 채로 잔을 들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색은 거기서 거기였다.
한 모금.
잔을 내려놓는 여화의 손이 멈췄다.
"……범아."
목소리가 이상했다. 낮고, 조금 갈라져 있었다. 범이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연무가 먼저 여화의 얼굴을 보았다.
목덜미부터 붉은 반점이 번지고 있었다.
"누나?"
여화가 목을 짚었다. 숨이 가빠졌다. 연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누나 집 식탁에서 어머님이 번개처럼 낚아채던 맥주 캔이 떠올랐다. 누나 앞에 맥주 놓지 말랬지.
"누나, 왜 그래. 누나!"
연무가 여화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범이가 테이블을 넘어왔다. 범이는 묻지 않았다. 여화의 잔을 들어 냄새를 한 번 맡더니 그대로 벽에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음악이 멈췄다.
"홍매! 약!"
홍매가 이미 안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던지고 있었다. 범이가 알약을 여화 입에 밀어 넣고 물을 먹였다. 그다음 여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사무실로 간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연무가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가요."
"따라오지 말랬다."
범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연무가 아는 철없는 클럽 사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연무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범이가 여화를 안고 나가는 뒷모습을, 연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만 보았다.
누나가 아픈데. 나는 약이 어디 있는지도, 무슨 약인지도, 왜 아픈지도 몰랐다.
저놈은 알았다. 묻지도 않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 * *
연무는 박 대표와 매니저의 다급한 전화를 전부 무시한 채, 어두운 클럽 복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 벽의 한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연무는 주먹을 더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누나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있을까. 18년 전 소속사 비상계단에서 처음 마주친 새하얀 얼굴, 군대로 면회를 와 주었던 날의 애틋한 미소, 단둘이 와서 밥 먹으라던 나른한 목소리. 그게 고작 전부였다.
그 사이의 15년을, 나는 단 한 조각도 알지 못했다. 누나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다 돌아왔는지, 왜 그토록 카메라를 피해 그늘에만 서 있으려 하는지, 왜 맥주 한 모금에 숨도 쉬지 못하고 쓰러지는지.
모르는 게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더 알고 싶고 깊어지던 갈증이, 오늘 밤엔 처음으로 무섭고 서러웠다.
클럽 사무실 문이 열린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던 연무가 고개를 들었다. 범이가 나왔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지친 얼굴이었다.
"괜찮아. 자."
범이의 그 덤덤한 한마디에, 빳빳하게 긴장하고 있던 연무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렸다. 벽을 짚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연무는 가까스로 숨을 골라내며 낮게 읊조렸다.
"형."
"응."
"누나 맥주 못 마시는 거, 형은 알았어요?"
"응."
"왜 못 마시는지도?"
"응."
"그거 말고 또……. 형은 누나에 대해서 다 알아요?"
범이가 멈춰 서서 연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웃음은 없었다. 그 눈빛에는 오히려 지독하게 눈이 멀어 버린 이 불쌍한 톱스타를 향한 깊은 안쓰러움이 머물러 있었다.
"응. 아마도?"
연무는 입술을 짓씹었다. 범이를 한 대 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약을 먹이고 누나를 안아 올린 범이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는데, 저 남자는 누나를 살렸다. 그 잔인한 현실이 연무의 심장을 가장 비참하게 난도질했다.
"들어가 봐."
범이가 문 옆으로 비켜섰다.
"……네?"
"옆에 있고 싶으면 있어. 대신 깨우지 마."
범이가 연무의 어깨를 툭 쳤다.
"착각하지 마라, 강연무. 나는 쟤 친구야. 20년 넘게 딱 그거였고, 앞으로도 그거야. 쟤 옆에서 손잡고 밤새울 놈은, 이제 내가 아니어도 돼."
연무는 멍하니 범이를 보았다. 질투로 날을 세우던 상대가, 처음으로 그냥 누나의 오랜 친구로 보였다.
범이는 그 말만 남기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홀 쪽에서 범이의 고함이 들렸다. 그 알바생, 누가 뽑았냐고.
연무는 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돌려 밀었다.
사무실 안은 은은한 스탠드 불빛 하나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커다란 가죽 소파 위, 범이의 재킷을 이불처럼 덮은 채 누나가 잠들어 있었다. 발그레했던 뺨은 뽀얗게 가라앉았지만, 붉은 반점의 흔적이 남은 하얀 목덜미가 숨을 쉴 때마다 아주 작게 오르내렸다.
연무는 소파 옆 딱딱한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 주고 싶었고, 차가운 이마를 짚어 보고 싶었다. 오랜 세월 참아 왔던 갈망들이 한꺼번에 손끝으로 찌릿하게 몰려들었지만, 연무는 끝내 손을 거두었다. 깨우지 말라던 범이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연무가 제게 허락한 건 단 하나였다.
재킷 자락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누나의 새하얀 오른손. 연무는 제 커다란 두 손으로 그 가느다란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유리알을 다루듯 포개어 감싸 쥐었다. 손끝이 너무 차가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연무는 누나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만히 기댄 채, 숨죽여 입술을 베어 물었다.
다시는, 내가 모르는 데서 아프지 마.
* * *
희뿌연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 즈음, 여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목 안쪽이 여전히 따끔거렸지만, 다행히 온몸을 덮쳤던 화끈한 열감과 반점은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15년 동안 전장에서 빗발치는 총알은 귀신같이 피해 다녔으면서, 서울 한복판에서 맥주 한 모금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오른손 끝에 묵직하고 뜨끈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여화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소파 옆 좁은 바닥에 덩치를 구긴 채, 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잠든 연무가 있었다. 여화의 손등에 이마를 묻은 채 잠든 얼굴이 어딘가 애처로웠다. 속눈썹 끝이 눈물로 살짝 젖어 있는 게 보였다.
화면 속에서 오만하게 빛나던 톱스타도, 제 앞에서 꼬리를 흔들던 대형견도 아닌, 그저 상처받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여화는 굳이 겹쳐진 손을 빼내지 않았다. 대신 연무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이 참 컸다. 제 손을 통째로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마디마디가 단단했다. 기억 속의 그 손은 이렇지 않았다. 열아홉 살, 소속사 비상계단에서 처음 봤던 그 손과도,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늑한 침대 위에서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그 유약했던 손과도 완전히 달랐다.
꼬맹이.
언제나처럼 속으로 그렇게 부르려던 여화는, 문득 숨을 멈추고 제 입술을 다물었다.
제 손을 이토록 뜨겁고 억세게 감싸 안은 남자의 커다란 손 앞에서, 그 단어는 어쩐지 기묘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여화는 제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연무의 단단한 손길을 아주 오래 바라보다가, 잠든 남자의 뺨을 향해 아주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강연무. 너 언제 이렇게 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