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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쏟은 걸로 하자

by 영우 · 2026-10-27

"아니."

여화는 연무의 손목을 놓았다. 미련 한 톨 없는 손이었다.

"차 온다고. 비켜 서 있으라고."

연무가 골목을 돌아보았다. 차는커녕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누나, 여기 일방통행인데."

"그러니까 더 위험하지. 역주행하는 놈들이 제일 무서워."

여화는 그대로 앞장서 걸었다. 연무는 벽에 기댄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손목에 남은 체온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차가 왔든 안 왔든 상관없었다. 누나가 나를 끌어당긴 거. 그거면 되었다.

앞서 걷는 여화는 휴대폰을 꺼내 짧은 문자를 보냈다.

[성수동. 길 건너 오피스텔 4층. 벌써 붙었잖아!]

답은 1분도 안 돼서 왔다.

[확인했다. 비었다. 놈이 빠르네.]

여화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등 뒤가 미지근했다.

* * *

같은 주, 여의도 소속사 4층 대표실.

박 대표가 책상 위의 상자 하나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리본까지 묶인 명품 시계 상자였다.

"중국에서 왔다. 보낸 사람 이름 봐."

연무는 카드를 보지도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몇 년째 같은 필체, 같은 향수 냄새였다.

"류쑤징이죠."

"가문에서 쫓겨났다더니 돈은 아직 있나 보다. 몇 년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야. 너 괜찮냐?"

"돌려보내 주세요. 늘 하던 대로."

"그 기집애 눈빛 장난 아닌 거 알잖아. 조심해."

연무는 소파에 기대 휴대폰 화면을 켰다. 누나 프로필은 여전히 기본 이미지였다.

"괜찮아요. 제 눈엔 한 사람밖에 안 보여서, 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박 대표가 혀를 찼다. 그 한 사람이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아, 그리고 이번 광고 대행사 말이야. 알고 보니 진도원네 계열사더라."

연무의 손가락이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 공사장 구석의 그 난 화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누나랑 무슨 사이인데요."

박 대표는 대답 대신 시계 상자만 툭툭 쳤다.

"그나저나 너 요즘 얼굴 폈다? 현장 애들이 그러더라. 강연무 진짜로 웃는 거 처음 본다고."

연무는 대답 대신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귀 끝이 조금 붉었다.

* * *

촬영은 일주일 뒤로 잡혔다.

홍시는 투덜거리면서도 성수동 근처의 오래된 인쇄 공장을 구해 왔다. 출입구는 철문 하나. 창문은 전부 높고 좁았다. 그림이 안 나온다고 사흘 내내 우는소리를 하더니, 정작 조명을 깔아 놓고 보니 낡은 벽돌과 기계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봐라. 내가 하면 다 그림이 돼."

"응. 선배 최고."

"영혼 좀 담아서 말해 줄래?"

여화는 대꾸 대신 공장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철문, 화물용 승강기, 2층으로 이어진 철제 계단, 뒷마당으로 빠지는 쪽문. 쪽문은 홍시 몰래 안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카메라는 세 대였다. 전부 연무만 보도록, 여화가 서 있을 자리와는 등을 지게 놓였다. 홍시가 그 배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이거 15년 전이랑 똑같이 짰다. 졸업 작품 때."

"그때도 잘 나왔잖아."

"그러니까 짜증 나는 거야."

리허설 도중, 촬영 감독이 앵글을 보겠다며 카메라 한 대를 무심코 돌렸다. 렌즈가 여화 쪽으로 반쯤 넘어오는 순간, 목덜미에 바늘 같은 열기가 꽂혔다. 여화는 아무렇지 않게 한 걸음 옆으로 빠졌다. 기계 뒤 그늘 속으로. 열기가 꺼졌다.

그 걸음을 알아챈 건 홍시뿐이었다. 학교 때도 똑같이 피하던 걸음이었다. 홍시는 말없이 촬영 감독의 어깨를 두드려 카메라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게 했다.

철문 앞에는 홍매가 서 있었다. 검은 정장에 팔짱을 낀 채로, 들어오는 스태프마다 출입증과 얼굴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클럽 정문에서 덩치 하나로 줄 선 손님들을 얌전하게 만들던 실력 그대로였다.

"여화야, 명단에 없는 놈은 한 놈도 안 들인다."

"응. 부탁해, 홍매."

홍매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숙였다. 범이가 시킨 일이라면 이유는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모니터를 점검하던 홍시가 철문 쪽을 힐끗 보더니 여화 옆으로 다가왔다.

"저 덩치는 누구냐? 우리 현장에 경비를 다 세우고."

"홍매. 범이네 매니저."

"홍? 무슨 홍인데."

홍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돌렸다.

"남양."

"……나도 남양 홍인데."

두 남자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처음 보는 사이에 묘한 기 싸움이 붙었다.

"몇 대손이요?"

"그쪽은."

여화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쪽문 쪽으로 걸어갔다. 홍씨 집안 서열 정리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 * *

"누나!"

연무가 도착한 건 오전 아홉 시였다. 메이크업을 받고 나온 얼굴에 공장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스태프 몇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시아 톱스타라는 게 그런 거였다.

그 톱스타가 여화를 보자마자 대형견처럼 달려왔다.

"나 오늘 어때?"

"평소랑 똑같아."

"평소에도 이렇게 잘생겼다는 거지?"

여화는 대답하지 않고 큐시트를 넘겼다. 연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붙어 섰다.

"요즘 나 동선이 다 성수동 중심이야. 누나 회사, 홍시 감독님 스튜디오, 여기 공장까지."

"한남동 사는 애가 왜 성수동을 중심으로 사는데."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되잖아."

연무가 당당하게 웃었다. 여화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웃음 하나에, 연무의 입꼬리가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강연무 씨! 들어갑니다!"

홍시의 목소리가 공장을 울렸다.

* * *

연무가 카메라 앞에 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방금까지 누나 옆에서 꼬리를 흔들던 남자가 아니었다. 낡은 기계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연무의 눈빛은 서늘했고, 턱 끝은 오만했다. 홍시가 모니터 앞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래서 다들 강연무, 강연무 하는구나."

그런데 컷 소리가 날 때마다 그 서늘한 눈이 엉뚱한 데로 갔다. 카메라 세 대의 등 뒤, 어두운 구석. 연무는 거기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음 테이크에 들어갔다.

카메라 앞에 서면 수백 개의 눈이 나를 본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늘 렌즈가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공사장에서도, 골목에서도, 오늘도. 누나는 왜 늘 그런 데만 서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모르는 게 하나 늘 때마다, 이상하게 더 보고 싶어졌다.

"강연무 씨, 눈 어디 봐요? 카메라 여기 있어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연무는 하나도 안 죄송한 얼굴로 웃었다. 홍시가 모니터 너머로 여화를 노려보았다. 여화는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연무를 보고 있었지만 연무만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조명 스태프, 분장팀, 음향 보조, 케이터링 테이블. 공장 안의 모든 사람이 한 번씩 여화의 눈을 거쳐 갔다.

열기가 올라온 건 세 번째 테이크가 끝났을 때였다.

목덜미 왼쪽. 세 대의 카메라는 전부 반대쪽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 번째였다.

여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케이터링 테이블 앞, 커피를 따르고 있는 남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앞치마를 둘렀다. 남자의 셔츠 두 번째 단추가 조명을 받아 아주 잠깐 반짝였다.

단추가 아니라 렌즈였다.

여화는 홍시에게 받은 명단을 머릿속으로 넘겼다. 케이터링 업체는 두 명. 둘 다 여자였다. 오늘 아침 홍매가 철문 앞에서 확인한 것도 둘이었다.

그럼 저놈은 어디로 들어왔나.

쪽문이었다. 자물쇠를 채워 둔 그 쪽문 쪽 바닥에, 흙 묻은 발자국이 하나 찍혀 있었다.

여화는 휴대폰을 꺼내 홍매에게 한 단어만 보냈다.

[뒤.]

* * *

남자가 커피 쟁반을 들고 2층 철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연무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남자가 계단 중간쯤에 섰을 때, 여화는 이미 그 위에 있었다.

"커피 맛있어 보이네."

남자가 흠칫 돌아보았다. 모자 밑으로 문신 끝자락이 비죽 드러났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남자의 손이 앞치마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화의 손이 더 빨랐다. 남자의 손목을 꺾어 계단 난간에 눌렀다. 쟁반이 기울었고, 여화가 다른 손으로 그 쟁반을 받아 들었다. 커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래층에서는 홍시의 "컷! 좋아, 한 번 더!" 소리가 울렸다. 음악이 다시 흘렀다. 아무도 2층을 보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홍매가 올라왔다. 홍매는 남자의 다른 팔을 붙잡고,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손님. 뒷문으로 나가실게요."

둘은 남자를 양쪽에서 끼고 계단 뒤 창고를 지나 쪽문으로 나갔다. 멀리서 보면 컨디션이 안 좋은 스태프를 부축해 나가는 그림이었다.

뒷마당에는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시동을 걸고 서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고 태진의 얼굴이 보였다.

"빠르네."

"촬영 중이야. 빨리 가."

태진의 부하들이 남자를 차에 태웠다. 여화는 남자의 셔츠에서 뜯어낸 단추 카메라를 태진에게 던졌다. 태진이 그 안의 메모리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전부 강연무 사진이다. 납치할 놈이 아니라 정찰병이었어. 류쑤징이 아직 직접 움직일 준비는 안 됐다는 거지."

"그럼 끝난 거지?"

"이번 일은. 잔금은 범이 쪽으로 넣으마."

"이자 쳐서."

"이자?"

"홍매 몫도 챙겨 줘야지."

태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창문을 올렸다. 승합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홍매가 앞치마 하나를 주워 들고 여화에게 눈길을 주었다. 무슨 일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만 했다.

"이거, 범이한테는 말하냐?"

"커피 쏟은 걸로 해."

"알았다."

홍매는 정말로 그렇게 말할 사람이었다.

* * *

여화가 공장 안으로 돌아왔을 때, 마지막 테이크가 끝나고 있었다.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박수 소리가 터졌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카메라 앞의 서늘한 톱스타는 증발했다. 연무는 스타일리스트가 내민 수건도 지나쳐 여화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누나아, 어디 갔었어? 중간에 계속 안 보여서 나 속상할 뻔했잖아."

"커피 마셨어."

여화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흔들어 보였다. 2층 계단에서 받아 든 그 쟁반의 커피였다.

"치, 나 빼고 혼자 마시기야?"

연무가 입술을 삐죽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여화 손에서 컵을 쏙 빼앗아 갔다. 그리고 여화가 입을 댔던 자리 그대로 한 모금 마셨다.

"……야, 강연무."

"홍시 감독님 커피는 같이 마시면서, 내가 누나 컵으로 마시는 건 아까워? 누나는 맨날 나한테만……."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웃는 꼴이 영락없는 대형견이었다. 여화는 컵을 도로 빼앗았다. 살결이 또 뜨끈했다. 공장 안 카메라는 전부 꺼져 있었는데도.

연무가 슬그머니 허리를 숙여 여화와 눈높이를 맞췄다. 장난기가 싹 가신 짙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누나. 조건, 기억하지? 촬영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했잖아."

"응?"

"방금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