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끝내자
by 나츠하나 · 2026-10-27
모래시계 · 잔량 47시간 00분 · 여행 5일차
연필 소리는 도윤이 세는 것을 그만둔 뒤 언젠가 멎었다. 그 뒤로는 어둠 속에서 이 방의 소리들을 들었다. 낡은 라디에이터가 식는 소리와 복도 끝 승강기가 오르내리는 소리, 그리고 잠들지 않은 침대 쪽의 숨소리였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어둠에 익은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는데 불이 켜졌다.
"일어나 있지." 성하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알아. 당신 숨소리, 자는 숨이 아니었어."
성하는 도윤을 부르는 대신 침대 밑에서 캐리어를 꺼내 침대 위에 올리고 지퍼를 열더니 짐을 풀기 시작했다. 개켜 넣었던 카디건과 원피스를 꺼내 옷장에 걸고 세면도구를 도로 욕실에 가져다 놓은 뒤에는 그림 도구를 책상 위 원래 자리에 늘어놓았다. 접힌 면이 위로 오게 각을 맞춰 한 점씩 놓아 가는 손이 어제 짐을 싸던 것과 같은 정확함으로 반대의 일을 하고 있었다. 도윤은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이 결정에 자기 지분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자리로 돌아가는 물건마다 성하의 손이 잠깐씩 머물러서, 짐을 푸는 데는 짐을 쌀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마지막으로 성하는 초록 리본 상자를 협탁에 올려 모서리의 각을 침대와 나란하게 맞추고, 비어 버린 캐리어를 닫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바퀴가 어둠 속으로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길게 들렸다.
"로마는 안 가." 성하는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도윤을 마주 보았다. 밤을 새워 어딘가에 도착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밤새 저울에 세 개를 올렸어. 하나씩 말할게. 첫째." 성하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작년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골목을 걸었어. 무슨 일이 오는지도, 왜 오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번의 나는 알아. 날짜도 알고, 시간도 알고, 이유도 알아. 알고 고르는 밤은, 같은 밤이어도 다른 밤이야. 나는 모르고 당하는 쪽으로는 다시 안 돌아가."
"둘째." 손가락이 하나 더 펴졌다. "도망을 생각 안 해 본 게 아니야. 밤새 로마행 기차를 스무 번쯤 탔어, 머릿속에서. 그런데 그 사람들은 사백 년을 기다린 사람들이라며. 사백 년을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다른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어. 도망가면 그 밤은 취소되는 게 아니라 장소만 바꿔서 따라와. 나는 평생 문 두드리는 소리를 세면서 살 수는 없어. 당신도 그렇게는 못 살고."
"셋째." 성하의 목소리가 거기서 처음으로 흔들렸다. "당신 일 년. 나는 어제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내 죽음보다 그게 더 무서워졌어. 내가 도망가서 어딘가에서 살아도, 만약 잘못돼서 당신이 그런 일 년을 한 번이라도 더 살게 되면… 그건 둘 다 사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울은 끝났어."
"반대쪽 접시도 셌어." 성하가 편 손가락을 아직 접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림책 마지막 장이 아직 없고, 한 달 뒤에 우리 식이 있어. 그거 세는 데 제일 오래 걸렸어. 다 세고도 기울기는 안 바뀌더라."
방이 조용해지자 라디에이터가 식는 소리가 들렸다. 성하는 서두르지 않고 편 손가락 세 개를 접은 다음 도윤의 눈을 보았다.
"도망은 안 가. 우리가 끝내자."
도윤의 목에까지 차오른 말들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말과 네가 감당할 몫이 아니라는 말, 내가 어떻게든 하겠다는 말은 어젯밤까지의 그였다면 전부 입 밖에 냈을 것들이었다. 하나같이 이 사람의 저울을 모욕하는 말이어서,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삼켰다.
"반대하면?"
"기각." 성하가 말했다. "재심 없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둘 다 받을게." 성하는 그러고 나서 조금 웃었는데, 닷새 만에 온기가 다 돌아온 웃음이었다. "받는 김에 하나 더. 이제부터 이 보물찾기, 지분 절반이야. 서기 아니고 공동 대표."
도윤은 평생 확실한 쪽을 고르는 사람이었고 그 병을 고치려고 시간까지 거슬러 왔는데, 지금 눈앞의 사람은 그가 평생 못 하던 방식으로 확실한 도망을 버리고 불확실한 싸움을 골랐다. 그가 배우러 온 것을 이 사람은 처음부터 갖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성하는 수첩을 가져와 침대 위에 펴고, 라틴어와 별자리와 그림책이 뒤섞인 페이지들을 넘기다가 세 개의 날짜가 적힌 장에서 멈췄다. 1642. 1610. 1633.
"어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알겠어." 그 숫자들을 손가락으로 거꾸로 짚어 내려가며 성하가 말했다. "이 사람 인생을 거꾸로 걷게 만들어 놨어. 죽음에서 발견으로, 발견에서 배신으로. 무덤에서 시작해서 제일 아픈 데서 끝나. 이건 암호가 아니라 이야기야. 끝에서부터 읽어야 읽히는 이야기." 성하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지금 시간을 거슬러 왔네. 갈릴레오처럼, 거꾸로."
도윤은 대답 대신 놋쇠 판 위에서 그 세 단어를 처음 읽던 아침을 떠올렸다. 끝에서 시작하라. 그때는 죽은 사람의 문장이었다. 지금은, 하는 생각을 그가 채 맺기도 전이었다. "그 문장, 당신 문장이야." 성하가 도윤의 생각을 마저 말했다. "INCIPE AB EXITU. 사백 년 전에 누가 당신 몫으로 써 놓고 간 것 같아. 끝에서 시작한 사람이 읽으라고."
이야기의 뼈를 만지는 사람의 눈이었다. 같은 유리 앞에서 그가 값을 읽는 동안 이 사람은 구조를 읽고 있었다. 닷새 동안 그 눈을 놀이의 눈이라고만 여겨 온 것을 도윤은 고쳐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성하가 편 수첩의 다음 장에는 마흔세 개의 글자가 다시 정렬돼 있었다. "눈이 멀었어도 나는 여전히 보고 있다. 이 문장, 사백 년 동안 아무도 안 읽어줬어. 쓴 사람은 누가 읽어줄 줄 알고 썼을 텐데. 캄캄한 데서 사백 년을 기다렸을 텐데." 성하는 그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끝까지 가서 읽어주자. 그 사람 것도, 우리 것도."
내일의 일은 성하가 하나만 정했다. "내일 아침, 할머니한테 말하자. 전부." 도윤이 머뭇거리자 성하가 덧붙였다. "그 가게가 이 이야기의 한가운데야. 한가운데 있는 사람만 모르는 비밀은, 보호가 아니라 실례야."
그다음은 잠이었다. 날이 밝으면 8주년이었지만 성하가 꺼내지 않은 그 얘기를 도윤도 꺼내지 않았다. 성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오늘은 의자 말고. 여기 바닥에 담요 깔고 자. 가까이." 도윤이 담요를 끌어와 침대 옆 바닥에 눕자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내려왔다. 도윤은 그 손을 잡았다. 같은 온도의 손이었다. "잠은 자 둬." 성하가 말했다.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까. 공동 대표는 결재할 게 많아." 손은 한참 잡혀 있었고, 어느 쪽이 먼저 잠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잠들기 직전에 연필 소리가 짧게 한 줄만큼 나더니, 성하가 어둠 속에서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이는 별을 따라가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로 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멎고 수첩이 협탁에 놓였다. "결말은 아직 몰라. 그래도 방향은 정했어. 방향이 있으면 쓸 수 있어."
강 건너 도시의 다른 쪽, 불 꺼진 갤러리 위층의 서재에는 장서와 유리 진열장과 오래된 지도들이 있었고 늦은 시각에도 스탠드 하나가 켜져 있었다.
"사흘 만에 세 곳을 돌았습니다." 문석주가 보고하는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에서와 같이 부드러웠고, 오래 닦인 놋쇠 같았다. "속도가 예상을 넘습니다. 신원은 확인 그대로, 의견서의 저자 본인입니다."
"여자분은."
"동행입니다.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 문석주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 "그림을 그리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노인은 아무 무게도 싣지 않고 대답했고, 이름도 묻지 않았다.
창을 등지고 선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낮고 서두르는 데가 없는 목소리였다. "사백 년 봉인이 저절로 열리는 법은 없지요. 열쇠가 온 겁니다. 마침내." 노인은 진열장 쪽으로 반 걸음 움직였고, 유리 안에서는 오래된 천구의가 스탠드 빛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사람을 더 부르세요. 그리고 모두에게 전하세요. 아무도 서두르지 말 것. 안내인이 길을 다 걷기 전에 길을 밟으면, 길이 끊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날씨 이야기를 하듯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란은 봉인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여름을 다시 만들지는 마세요."
문석주는 잠깐 말이 없다가 목례로 대답했다. 스탠드가 꺼져 서재가 어둠이 되자 도시의 몇 군데에서 전화가 울렸고,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대대로 해 온 방식대로 서두르지 않고 짐을 꾸렸다. 그 전화 중 한 통이 닿은 강가의 초소에서, 다리오는 수화기 너머의 짧은 말을 듣고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창밖으로 호텔 삼층의 불이 꺼져 있었고, 그는 그것도 기록했다. 1시 10분, 소등. 조용한 도시의 밑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