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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진실

by 나츠하나 · 2026-10-27

모래시계 · 잔량 50시간 00분 · 여행 5일차

저녁을 거른 밤, 가게에서 돌아온 뒤 성하는 피곤하다며 먼저 올라갔고 도윤은 골목에 서서 계산을 끝내고 올라왔다. 복도 끝 방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대답이 한 박자 늦게 왔다.

방문을 열었을 때 성하는 침대 위에 캐리어를 열어 놓고, 접힌 면이 위로 오게 각을 맞춰서 한 벌씩 옷을 개고 있었다. 성하는 화가 다 지나간 뒤에야 짐을 싸는 사람이었다.

"먼저 갈게." 성하가 개던 옷에서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내일 아침 기차로 로마 가서, 비행기를 알아보려고. 당신은 당신 여행 마저 해. 그게 뭐든."

"성하야."

"싸우자는 거 아니야. 어제오늘 생각했는데, 우리가 같은 데를 다니면서 다른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결론이면, 여행은 각자 하는 게 맞아. 결론까지 왔으면 짐을 싸야지. 그게 순서고."

성하의 목소리는 싸울 때보다 조용해서 훨씬 멀었다. 도윤은 문가에 선 채 어젯밤 로비에서 세웠던 두 갈래를 다시 보았다. 거짓말 아니면 전부였는데, 그때는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어서 반쪽을 골랐다. 캐리어의 지퍼는 반쯤 열려 있었다. 저 지퍼가 끝까지 닫히면 이틀 뒤의 밤에 이 사람은 혼자가 된다. 어느 도시에서든, 어느 시간선에서든, 혼자가 된다.

도윤은 전부를 골랐다.

"당신이 그랬지." 도윤이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거랑 숨는 거를 헷갈린다고. 맞는 말이었어. 평생 헷갈렸어. 오늘 밤엔 안 숨을게. 전부 말할 테니까, 끝까지만 들어줘. 듣고 나서 가겠다면, 그때는 짐 싸는 거 도울게."

성하는 개던 카디건을 내려놓았지만 앉지는 않았고, 팔짱을 낀 채 침대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는 것으로 십 분을 허락했다.

"어젯밤에." 도윤이 시작했다. "나랑 싸우고, 강 쪽으로 삼십 분 걷다 왔다고 했지. 당신은 화가 나면 편지를 쓰는 사람이고, 이 도시에는 느린 우체통이 있어. 그 삼십 분 사이에 거기 편지를 넣었지.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나한테는 더더욱 말 안 했고. 배송일은 내년 구월 십이일. 결혼식으로부터 딱 일 년이 되는 날로."

성하의 팔짱이 풀렸다. "……어떻게 알아."

"그리고 마지막 날, 당신은 강가에서 사진을 찍자고 할 거야. 어깨를 붙이고, 뒤로 강이랑 그 다리가 나오게. 셀프 타이머 말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그건 계획이 아니라 이미 정해 둔 거지. 수첩 어느 페이지엔가 구도까지 그려 놨을 거고."

"그만해." 성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구한테 들었어. 폰 봤어?"

"당신 폰은 이 방에서 한 번도 안 열렸어. 그리고 하나 더." 도윤은 숨을 골랐다. "팔 년 전 관측회에서, 당신은 소원을 여섯 개 만들었어. 다섯 개까지는 들었어. 크루아상부터. 여섯 번째는 말 안 하고 웃기만 했지. 언젠가 말해준다고 했어. 나는 아직도 당신 여섯 번째 소원을 몰라." 도윤의 목소리가 거기서 가라앉았다. "들을 사람이, 없어졌었으니까."

조용해진 방 안에서 성하는 그 문장의 시제를, 과거의 과거를 듣고 있었다. 없어졌었으니까.

"믿기 어려운 걸 보여줄게." 도윤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낸 종이 두 장은 일 년 동안 접힌 자리가 하얗게 일어난 편지지 한 장과 모서리가 닳은 사진 한 장이었다. 그는 벨벳 위에 놓듯이 그것을 침대 위 캐리어 옆에 내려놓았다.

성하가 먼저 집은 사진 속에서는 두 사람이 어깨를 붙이고 웃고 있었고, 뒤로는 강이 흐릿하게 뭉개져 있었다. 옷도 웃음도 성하가 아는 것인데 성하가 찍은 적은 없는 사진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답게 성하는 사진 속 자기 웃음이 연출로는 나오지 않는 웃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사진 속 도윤이 눈앞의 도윤보다 조금 야위어 있다는 것까지 보았다. 다음에 집은 한 장짜리 편지에는 반을 채우지 못한 몇 줄이 자기 글씨로 적혀 있었다.

우리가 서프라이즈로 만났던 이 주소로 와줘.

사랑해.

"이거 내 글씨야." 성하가 이상하게 평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 이거 안 썼어."

"아직은."

성하는 편지지를 불빛에 비춰 보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손이 종이의 결을 더듬었다. 도윤이 평생 물건에게 해 온 것과 같은 손길이었다. "종이가 낡았어." 성하가 중얼거렸다. "이 접힌 자국은 하루이틀 게 아니야. 이건…" 성하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도윤을 보았다. 물어보는 눈이 아니었다. 대답을 이미 받았는데 그 대답을 놓을 자리가 몸에 없는 눈이었다.

"나는 일 년 뒤에서 왔어."

그러고서 도윤은 감정 의견서를 읽듯 형용사 없이 말했다. 부고는 새벽 다섯 시에 왔고, 나는 가지 않았어. 갈 수 없는 게 아니라 가지 않았어, 그게 나야. 유골함이 왔고, 수취인 란에 서명을 하고, 장례를 치르고, 일 년을 살았어. 살았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시계태엽을 감지 않게 됐고, 당신 작업실 문을 일 년 동안 못 열었어. 당신 폰은 켜면 마지막 문자를 보게 될까 봐 일 년 동안 못 켰어. 그리고 결혼식 일 주년이 됐어야 할 날에 이 편지가 왔어, 이 사진이랑 같이. 나는 생전 처음 이탈리아에 왔고 그 가게에서 할머니가 모래시계를 내줬는데, 뒷방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일 년 전 여름이었어. 어떻게 그게 되는지는 나도 몰라. 아는 건 하나야.

"그 밤이 이틀 뒤야. 팔월 십삼일. 밤 열 시."

성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지를 든 손이 내려갔고, 도윤은 그 침묵 속에서 일 년 중 가장 긴 몇 초를 서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성하의 눈은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제 죽음이 아니었다. 숨이 얕게 끊겼다가 이어졌고, 편지를 놓은 손이 제 팔을 붙잡았다.

"당신." 성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걸 혼자 일 년을."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 장례를 치르고, 유골함에 서명을 하고, 일 년을…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나흘 동안 내 옆에서 웃었어? 보물찾기를 하고, 커피 내기를 하고, 그 강가에 앉아서?" 성하는 울면서 화를 냈고, 그러면서 도윤에게 다가왔다. "미쳤어, 당신. 그걸 어떻게 혼자 들고 있어."

"그날 밤의 대답, 반만 진실이었어." 도윤이 말했다. "너를 만나러 온 것만은 아니야, 너를 지키러 왔어."

성하가 도윤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어깨가 오래 조금씩 흔들렸다.

남은 것도 도윤은 전부 말했다. 일 년 전 그가 감정한 장부와 의견서에 적은 그 가게의 주소, 그 주소를 따라온 자들과 광장에서 스친 얼굴, 그리고 등 뒤에 붙은 걸음들이 그를 잡지 않는 이유였다. 그들은 그가 읽어 낸 문장이 자기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기다리고 있으니, 해독이 끝나 갈수록 그 밤은 가까워지고 어쩌면 이틀보다 가까울 수도 있다.

"너한테 숨긴 건 이제 없어." 도윤이 말했다. "어젯밤 규칙,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지킬게."

성하는 이마를 떼고 물러나 침대에 앉아서는, 세 개의 물건을 저울에 올리는 눈으로 캐리어를 보고, 편지를 보고, 도윤을 보았다. 도윤은 거기서 멈췄고, 이 저울에 그가 올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도망가자고도, 남아 달라고도, 어떻게 하자고도 말하지 않고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한참 뒤에 성하는 수첩을 꺼내 길을 잃은 아이의 페이지를 펴고, 그다음 장의 첫 줄에 연필을 댔다. 연필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두 글자를 썼다가 지우는 소리가 한 번 나더니 성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결말을 모르는 채로 쓰는 법은," 성하가 말했다. "배운 적이 없어."

"나도 그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성하는 수첩을 덮었다. "오늘 밤 안에 끝낼게. 당신은… 거기 있어. 그 의자."

도윤이 안락의자에 앉자 불이 꺼졌고, 두 사람 다 잠들지 못했고 서로 그것을 알았다. 이따금 침대 쪽에서 연필이 종이를 긁다가 멎는 소리가 났다. 도윤은 그 소리를 세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실패했고, 일곱 번째에서 그만두었다. 캐리어는 닫히지도 비워지지도 않고 반쯤 싸인 채 침대 밑에 내려져 있었다.

22시 정각, 변동 없음. 다리오는 저녁 여덟 시부터 불이 꺼지지 않고 있는 호텔 삼층 창을 올려다보며 기록했다. 커튼 너머로 사람의 그림자가 두 번 지나간 뒤로는 한참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다.

대상들이 오늘 밤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은 어딘가에 갈 준비가 끝나 간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다리오는 그 문장을 보고서에 적지 않았다.

본부도 서두르지 않았고,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 명령의 요지였다. 사백 년을 기다린 자들에게 하루 이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22시 50분, 변동 없음.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변동 없음이라고 적는 동안 그의 자리는 반 블록 옮겨져 있었고, 새 자리에서는 호텔 정문이 그 창과 같은 시야에 들었다.

다리오는 식은 커피를 마시며 창의 불빛을 오래 보았다. 내일은 다른 것을 적게 되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