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돈을 버는 법
by Jayu · 2026-10-27
4화 돈을 버는 법
“안 지친 상태로 상대해 줄 테니까.”
내가 검을 겨누자 노예상들의 얼굴이 굳었다.
조금 전까지 바닥을 기던 놈이 멀쩡히 일어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몽둥이를 든 남자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멀쩡한 척 허세부리는 속임수다! 겁먹지 말고 죽여!”
세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왼쪽에서 검.
정면에서 짧은 창.
오른쪽에서는 몽둥이.
조금 전에도 전부 보였던 공격이었다.
달라진 것은 내 몸이었다.
[직업 선택: 검투사 A]
나는 왼쪽으로 반걸음 파고들었다.
검날을 비스듬히 흘린 뒤 손잡이 끝으로 남자의 턱을 올려쳤다.
남자의 고개가 젖혀졌다.
그대로 몸을 돌리자 짧은 창이 옆구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당겼다.
창을 놓치지 않으려던 남자가 앞으로 끌려왔다.
무릎으로 복부를 찍었다.
“커헉!”
두 명이 쓰러지는 데 세 번의 숨도 걸리지 않았다.
몽둥이가 뒤통수를 향해 떨어졌다.
나는 피하지 않고 왼손을 들었다.
[직업 선택: 마법사 A]
“밀어.”
손바닥 앞에서 압축된 바람이 터졌다.
퍼엉!
몽둥이를 든 남자와 뒤에서 다시 일어서던 두 사람이 한꺼번에 밀려났다.
세 사람의 몸이 썩은 문짝과 함께 오두막 밖으로 굴러갔다.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숲으로 달아났다.
[직업 선택: 사냥꾼 A]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냥칼을 발끝으로 튕겼다.
칼자루가 손바닥으로 들어왔다.
숨을 고를 필요도 없었다.
달아나는 남자의 어깨와 나무 사이, 펄럭이는 옷자락만 보였다.
칼을 던졌다.
푹!
사냥칼이 그의 옷자락을 나무에 박았다.
남자는 갑자기 목이 잡아당겨진 것처럼 뒤로 넘어졌다.
나는 천천히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바람 마법에 나가떨어진 놈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나를 보자마자 몽둥이를 버렸다.
“사, 살려 줘.”
“조금 전에는 죽이라며.”
“우리가 잘못했다.”
“그 말은 나한테 할 게 아니지.”
내 시선이 오두막 안으로 향했다.
노예상들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저들이 아이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들을 굳이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놈들의 허리띠와 겉옷을 벗겨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검투사에게 사람을 쓰러뜨리는 법이 있다면, 사냥꾼에게는 짐승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묶는 법이 있었다.
매듭을 세 번 겹치자 멀쩡한 사람도 혼자 풀기 어려운 포박이 완성됐다.
“혹시라도 성기사가 오면 전해.”
나는 나무에 매달린 남자의 옷자락을 잘라 바닥에 떨어뜨렸다.
“목줄은 끊어졌고, 다시 채우러 오면 다음에는 목숨도 끊어 놓겠다고.”
그때 오두막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문자유….”
돌아보자 아이의 몸을 감싸던 흰빛이 꺼지고 있었다.
아이는 내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
나는 쓰러지는 몸을 받아 안았다.
아이의 얼굴은 종이처럼 하얬다.
[직업 선택: 의사 A]
목 옆에 손가락을 댔다.
맥박은 느렸지만 일정했다.
호흡도 안정돼 있었다.
몸 안의 힘을 한꺼번에 끌어낸 뒤 찾아온 탈진이었다.
죽을 위험은 없었다.
대신 당분간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지쳐 있었다.
“이번에는 네가 무리했네.”
대답은 없었다.
나는 아이를 업고 노예상들의 품을 뒤졌다.
짧은 검 두 자루, 부러진 나침반, 말라붙은 육포 조각.
쓸 만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돈주머니는 하나같이 비어 있었다.
성기사를 피해 달아나며 짐까지 버린 잔당들이었다.
동화 한 닢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만능이라도 빈 주머니에서 돈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가장 상태가 좋은 검 한 자루와 작은 물통만 챙겼다.
그리고 해가 기울기 전에 오두막을 떠났다.
아이의 목줄은 끊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살아남는 것.
그다음은 귀환법을 찾고, 엄마의 기억을 되돌릴 약을 찾는 것이었다.
갈 길이 멀었다.
숲을 빠져나올 무렵 아이가 등에 기대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여기는….”
“오두막에서 꽤 멀리 왔어.”
“그 사람들은요?”
“당분간 못 움직여.”
아이는 내 어깨 너머로 지나온 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기 목을 만졌다.
검은 목걸이는 없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붉게 쓸린 피부뿐이었다.
그제야 아이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걸을 수 있겠어?”
“네.”
아이를 내려 주자 두 다리가 잠시 휘청거렸다.
그래도 아이는 내 소매만 살짝 잡을 뿐, 업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숲길을 걸었다.
서쪽 하늘 너머로 밥 짓는 연기가 몇 줄기 올라오고 있었다.
사냥꾼 A의 감각으로 보면 사람이 사는 곳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나는 걷는 동안 아이를 흘끗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물어볼 게 있어.”
“뭔데요?”
“네 이름.”
아이의 걸음이 아주 조금 느려졌다.
“아이요.”
“그건 사람들이 널 부르던 말이잖아.”
“저는 계속 그렇게 불렸어요.”
아이는 발끝으로 작은 돌을 밀었다.
“다른 이름은 없어요.”
“그럼 새로 가지면 되지.”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정해도 돼요?”
“네 이름인데 남이 정할 이유가 있어?”
아이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저녁빛이 은빛 머리카락 위에서 흔들렸다.
아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몇 가지 소리를 만들어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아이가 편해요.”
“그래?”
“좋아서라기보다는… 제일 익숙하니까요.”
아이는 자기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조금 더 생각해 볼래요. 제가 정말 가지고 싶은 이름이 생길 때까지.”
“그래.”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정해. 아무도 재촉하지 않아.”
아이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생겼다.
“네, 문자유.”
이제 자연스럽게 아저씨란 말을 붙이지 않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쁘지 않았다.
숲 밖으로 나오자 낮은 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마을이 보였다.
입구의 낡은 팻말에는 ‘하르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뜻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신이 언어까지는 서비스로 넣어 준 모양이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작았다.
돌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과 가게가 스무 채쯤 늘어서 있었다.
빵 냄새와 가축 냄새, 장작 타는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피로 얼룩진 내 옷과 아이의 맨목을 번갈아 봤다.
다행히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성기사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적이 하나 생겼다.
밤이었다.
“저기 침대 그림이 있어요.”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황금빛 보리 이삭과 침대가 함께 그려진 간판이 걸려 있었다.
‘황금 이삭 여관.’
1층은 술집, 2층은 객실인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가격부터 물었다.
“방 하나에 동화 여덟 닢. 저녁 스튜 두 그릇까지 먹으면 은화 한 닢.”
덩치 큰 여관주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그대로 뺐다.
“외상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방을 외상으로 주면 내가 먼저 길바닥에서 자게 되겠지.”
맞는 말이었다.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여관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헛간에서도 잘 수 있어요.”
“그건 선택지가 없을 때 이야기고.”
“하지만 돈이 없잖아요.”
“없으면 벌면 돼.”
문제는 방법이었다.
가장 빠른 것은 도둑이었다.
[직업 선택: 도둑 A]
직업을 고르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돈주머니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느슨한 매듭,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 경계가 약한 가게 창문까지 보였다.
나는 곧바로 직업을 해제했다.
버는 것과 훔치는 것은 다르다.
검투사로 호위 일을 하려면 신분패와 길드 등록이 필요했다.
연금술은 재료를 살 밑천이 없었다.
마법을 보여 주며 돈을 받는 방법도 있었지만, 성기사가 쫓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마법사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밑천도, 신분도 없이 바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마을 끝에서 고함이 들렸다.
“오늘 안에 못 돌리면 내일 아침 밀가루가 없다니까!”
사람들이 개울가의 커다란 수차 앞에 모여 있었다.
물은 흐르는데 수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차와 연결된 방앗간 안에서는 타다닥, 나무가 헛도는 소리만 났다.
콧수염이 성긴 중년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세 시간째 이 모양이야. 이걸 고치는 사람에게 은화 세 닢을 주겠어!”
옆에 있던 목수가 혀를 찼다.
“주축을 전부 들어내야 해. 빨라도 이틀은 걸려.”
“내일 비가 오면 창고의 밀부터 상한다고!”
나는 멈춰 선 수차를 바라봤다.
[직업 선택: 목수 A]
나무의 결이 보였다.
물에 불어난 부분과 말라 갈라진 부분이 서로 다른 색처럼 구분됐다.
문제는 주축이 아니었다.
방앗간 안쪽의 큰 톱니바퀴에서 이빨 세 개가 부러져 있었다.
부러진 틈을 지날 때마다 작은 톱니가 헛돌며 충격을 만들었다.
그 충격 때문에 축을 잡는 쇠테까지 반 치쯤 밀려난 상태였다.
“이틀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방앗간 주인이 내 피 묻은 옷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방앗간을 고칠 줄 아나?”
“고치면 은화 세 닢. 못 고치면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시간은?”
나는 해의 높이를 확인했다.
“삼십 분.”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