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
by 장지호 · 2026-10-26
D+118 · 15:40
조은결과 박세미가 왔다. 이번에는 서류가 아니라 종이 상자 하나를 들고서였다.
잔금은 두 달 늦게 치러졌다. 매도인이 기다렸고, 은행이 재심사를 했고, 금리가 조금 올랐고, 그래도 계약은 살았다. 특별공급 지위도 살았다. 이전등기는 재개 첫날 접수분으로 들어가 있었다.
"저희가 직접 하는 건 포기했어요." 박세미가 말했다. "법무사님 썼어요. 이런 세상에 수수료 아낄 게 따로 있지."
"그 집은 어떠세요."
"좋아요." 박세미는 그렇게 대답하고 잠깐 웃었다. "좋은데 아직 좀 이상해요. 밤에 화장실 가다가 여기가 어디지 하고 서 있어요."
"저는 아직 문 열 때 두 번 봐요." 조은결이 말했다. "열쇠 맞나 하고."
상자에는 떡이 들어 있었다. 이사떡을 등기소에 돌리는 사람은 다인도 처음 봤다. 조은결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집들이에 누구 부를까 하다가, 생각해보니까 이 집이 되는 동안 제일 자주 본 사람이."
"저였어요?"
"네. 좀 슬픈가요, 그거."
다인은 떡을 받으며 아니라고 했다.
일어나면서 박세미가 말했다.
"주무관님. 저 열쇠 받은 날 기억나요."
"네."
"짐이 아직 안 왔으니까 앉을 게 없어서, 바닥에 그냥 앉아 있었어요. 둘이서 한 시간쯤."
"...한 시간 동안 뭐 하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박세미가 웃었다. "그냥, 우리 집 바닥이구나 하고 있었어요."
다인은 석 달 전에 올라가봤던 복도를 생각했다. 문이 팔십 센티미터마다 있던 층. 거기도 짐이 없다고 했다. 넣을 데가 없어서.
두 사람이 나간 뒤 다인은 접수 화면에서 그 집 등기부를 한 번 열어봤다. 갑구 맨 아래에 두 사람의 이름이 공동명의로 나란히 올라 있었다. 그 위로는 이 집이 겪은 일들이 회색 줄로 전부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바닥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D+119 · 12:30
백반집 TV에는 이제 다른 뉴스가 나왔다. 등기 얘기는 사흘에 한 번쯤, 복구 진행률 숫자로만 지나갔다.
"황인선이라고," 임 주사가 국에 밥을 말며 말했다. "그 본부장. 옷 벗었다며."
"사표 내셨어요. 청문회 발언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라는 말도 있고."
"서 주무관은 어느 쪽 같은데."
"모르겠어요. 마지막 날 인사드리러 갔더니 그러시더라고요. 지울 수 없는 말을 했으니 됐다고."
임 주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밥을 먹었다. 한참 먹다가 말했다.
"멋있네."
"네."
"나는 못 하는 거야, 그런 거."
"알아요."
"바로 안다고 하네, 이 사람이."
다인은 웃었고 임 주사도 웃은 것 같았다. 국그릇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있어서 확실하지는 않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반찬을 놓고 가면서 물었다.
"이제 등기 되는 거야?"
"돼요, 어머니."
"우리 아들네 이사 갔어. 지난달에."
"잘됐네요."
"잘되긴. 넉 달을 남의 집에 얹혀살았는데." 아주머니는 그러고 행주로 옆 테이블을 닦았다. "그래도 갔으니까 됐지 뭐."
건너편 부동산 유리창의 매물 종이는 그 주에 석 장이 됐다.
이백서른한 건은 공개됐고, 공개된 다음 달부터 그 필지의 옛 소유자 후손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명함에 컨설팅이라고 적힌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 이름이 등기부에 되살아나 있다고, 지금 소송하면 이긴다고, 착수금은 없다고.
되돌려진 이름 중 절반 이상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홍길동이 되살려놓은 그 이름들이 이제 남의 소송거리로 팔리고 있었다. 다인은 그 신고를 받아 정리하는 일도 맡았다. 정리하면서 그 로그를 생각했다. 마지막 구 초에 실행된 복원. 그 아홉 초가 옳은 일이었는지 다인은 여전히 알지 못했고, 아마 그것을 실행한 쪽도 몰랐을 것이다.
그 도장은 두 달쯤 유행하고 사라졌다.
봄이 끝나기 전에 커뮤니티에서 그 얘기가 없어졌고, 문방구 사이트에는 재고가 남았다. 아무 효력이 없다는 건 처음부터 다들 알고 있었으니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계약서와 자기 잔금일로 돌아갔다. 두 시간 서 있다가 집에 가서 라면을 먹었다는 그 글도 어느 날 지워져 있었다.
다인은 그때 하나를 샀다.
삼천 원이었고 인주는 따로 사야 했다. 서랍 맨 아래 칸, 감찰 통지서 두 장 밑에 넣어뒀다. 인주는 사지 않았다. 한 번도 찍지 않았다.
그래도 서랍을 열면 가끔 그게 보였다.
D+120 · 14:00
운영단 회의 안건 마지막이 서식 개정이었다.
신시스템에 맞춰 민원 서식을 새로 찍는데, 작성 견본의 예시명을 바꾸자는 의견이 올라와 있었다. 사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금번 사태 관련 명칭으로 국민 정서상 부적절. 대안: 김민준, 이서연 등 중립적 이름.
회의는 그 안건에서 삼 분을 썼다. 다들 지쳐 있었고, 바꾸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인이 손을 들었다.
"그대로 두면 좋겠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그 자리는 서류에는 있는데 실은 아무도 아닌 사람들 자리입니다. 지우면," 다인은 말을 골랐다. 넉 달 동안 고른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번 일이 무서워서 지웠다는 기록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지운 것도 다 남기기로 했잖아요. 그러면 처음부터 안 지우는 게 낫습니다."
말하고 나서 한 문장을 더 붙였다. 준비한 말은 아니었다.
"없다고 적으면 없는 것이 됩니다. 저희가 두 달 전에 그걸 봤어요. 반대로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되는 쪽으로 해보면 좋겠습니다."
회의록에는 그 뒤의 문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예시명 현행 유지. 발의자 서다인. 두 줄로 남았다.
다인은 그 두 줄을 확인하고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D+121 · 09:30
정부는 성명이 올라오고 스무여드레 만에 받았다. 셋째 줄 때문에 오래 걸렸다.
종이 원부는 그 사이에 검증 기준에서 빠졌다. 백진우가 압수 조서에 두 줄을 적었고, 그것으로 사천 권이 넘는 종이가 한꺼번에 증거에서 내려갔다.
대장은 압수물이라 반출 절차가 필요했다. 회의실에 갖다 놓는 데 사흘이 걸렸고, 백진우가 봉투를 열었다. 열 때 인수증 사본을 다인 앞에 놓았다. 넉 달 전 다인이 받았던 종이의 다른 쪽이었다.
"열람만 됩니다. 표시는 하지 마세요."
삼 년치 발급 건 중에서 삭제 목록과 겹치는 것을 뽑았다. 백구십사 건이었다. 그중 백서른 건은 다인이 창구에서 얼굴을 보고 받은 집이었다.
대조는 그날 하루가 걸렸다. 필지 하나에 줄 하나씩, 여백에 적힌 그날의 을구 상태와 홍길동이 보낸 원본을 나란히 놓았다. 근저당 이억 사천. 가압류. 조회 불가 지번. 삼 년 동안 자기 손으로 적은 것들이었다.
백구십사 건이 맞았다.
정 사무관이 그 자리에서 숫자를 다시 셌고, 백진우는 자기 수첩과 맞춰봤다. 방에서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대조를 시작할 때 이 방은 안 맞는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맞으면 데이터가 가짜라는 뜻이고, 그러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됐다.
D+121 · 18:40
사람들이 나가고 다인은 화면을 닫지 않았다.
검색창에 자기 아파트 주소를 넣었다. 표본에 없는 필지였다. 넣을 이유가 없었다. 석 달 전 사무실에 혼자 남았던 밤에도 없었다.
한 건이 떴다.
다인의 집은 그날 밤 삭제되지 않았다. 삭제 목록 사천십이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홍길동이 보낸 원본에는 그 필지가 들어 있었고, 갑구 맨 아래가 다인의 이름이 아니었다.
십일 년 전 이름이었다. 진정명의회복으로 이 집을 되찾았던 사람. 여덟 달 뒤에 팔고 소재를 알 수 없게 된 사람.
이백서른한 건에 한 것과 같은 처리였다.
다인은 그 줄을 한 번 읽고 화면을 껐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복도 끝에 백진우가 서 있었다.
"다 끝났습니까."
"...네."
백진우는 회의실 쪽을 한 번 봤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내일 대장 반납하겠습니다. 목록만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D+123 · 11:00
다인은 열람 신청서를 한 장 꺼냈다.
창구에서 남에게 밀어줄 때는 유리 아래로 미는 종이였다. 자기가 쓰려니 쓸 칸이 하나 더 있었다. 신청인과 이해관계인이 같은 사람일 때 적는 칸이었다. 다인은 삼 년 동안 그 칸을 채운 신청서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반나절이 걸렸다. 십일 년 전 사건이라 서고에서 올라오는 데 그만큼 걸린 것이고, 서류 자체는 얇았다.
소송은 사 년이 걸려 있었다. 원고 승소. 피고란에 법인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고, 다인은 그 이름을 두 달 전 노경환의 서류 더미에서 봤다. 이백서른한 건의 확인서에 등기권리자로 올라 있던 법인이었다.
원고는 이겼다. 감정평가비와 변호사 비용이 영수증으로 붙어 있었고, 소송 중에 근저당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이긴 뒤 여덟 달 동안 그 근저당은 그대로였다. 매도 시점의 실거래가는 그 무렵 같은 단지 시세보다 낮았다.
접수 서류에는 그 사람이 왜 팔았는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지금 어디 있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인이 십일 년 동안 몰랐던 세 가지 중에 반나절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매매는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다인은 정당하게 샀고 십일 년치 이자를 냈다. 홍길동은 그것도 지워진 사람으로 셌다.
D+124 · 19:10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인은 자기 아파트 등기사항증명서를 열었다.
직업병은 넉 달을 쉬고도 그대로였다. 갑구에 자기 이름, 을구에 은행, 세 번째 줄에 그 이름. 진정명의회복, 십일 년 전.
그리고 이제 그 아래 새 줄이 있었다. 소유권 관련 조사 계속 중. 유보 필지들은 신시스템에서 그렇게 표시하기로 했다. 덮지도 판정하지도 않고, 조사 중이라는 사실 자체를 등기부에 적기로. 다인의 집은 이제 장부 위에서 공식적으로 어정쩡했다.
변호사는 원소유자를 찾는 데 반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소송이 될지 화해가 될지, 다인이 이 집에 계속 살 수 있을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대출 이자는 매달 그대로 나갔다.
어머니에게는 지난달에 말했다. 어머니는 한참 잠자코 듣더니 물었다.
"그래서 그 집은 누구 거니."
"아직 몰라요. 알아보는 중이에요, 나라가."
"나라가 알아봐 주는 게 몇 년 걸린다며."
"그렇대요."
"그럼 그동안은 네 집이네."
다인은 그 논법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 나라 등기가 칠십 년을 그렇게 굴러왔다.
"엄마가 보태준 거는," 어머니가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되는 거니."
"그건 상관없어요."
"상관없어?"
"네."
상관없지 않았다. 십일 년 전 계약서에서 어머니 몫은 사천만 원이었고, 그게 없었으면 다인은 그 집을 못 샀다. 창구에 앉아 삼 년 동안 젊은 부부들의 서류를 받으면서 다인은 그 사천만 원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적혀 있는 칸을 본 적이 없다. 등기부에는 얼마에 샀는지만 적히고 그 돈이 누구 것이었는지는 안 적힌다.
어머니는 김치나 가지러 오라고 했다.
그날 밤 다인은 집에 돌아와 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베란다 화분에 물을 줬다. 둘 중 하나가 잎이 노래지고 있었는데 왜 그런지는 몰랐다. 위층은 아직 자지 않았다. 매트 왼쪽에 서서 컵을 씻었다.
씻고 나오면서 거실 벽의 못 자리를 잠깐 봤다.
십일 년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이 거기에 뭘 걸어놨는지 다인은 모른다. 그 사람은 이 집을 소송으로 되찾았고 여덟 달 뒤에 팔았고 그 뒤로 소재를 알 수 없다. 벽지를 두 번 발랐는데 두 번 다 그 자리를 메우지 않았다. 도배하는 사람이 물었을 때 다인은 그냥 두라고 했다.
이 집이 끝내 자기 것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문을 닫으면 그 안의 조용함은 오늘 밤 다인의 것이었다.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조용함이 예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등기부에 자기 이름이 언제까지 남을지 모르는 채로 사는 사람이 이 나라에 자기 하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인은 넉 달 동안 사천만 채의 등기부에서 봤다. 다인의 이름도 그중 하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이었다.
02:40
등기소는 비어 있었다.
로비의 발급기 두 대는 전원이 내려가 있었고, 1번기 급지함에는 용지가 반쯤 빼진 채 꽂혀 있었다. 비치대 오른쪽 칸에는 새로 인쇄된 작성 견본이 놓여 있었다. 새 서식, 같은 이름.
등기권리자: 홍길동.
그 아래 오른쪽에 네모난 칸이 있고 그 안에 (인)이라고 작게 인쇄돼 있었다. 새 서식에도 도장 자리는 그대로였다. 견본이니까 그 칸은 비어 있었다.
첫 장 위에는 아직 아무의 이름도 덧써지지 않았다. 내일이면 누군가 그 위에 볼펜으로 제 이름을 눌러 쓸 것이고, 다인이 수정테이프로 지울 것이고, 자국은 남을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뭉치가 서랍에 쌓일 것이다.
전산실 서버는 낮은 소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02:40:00이 02:40:01이 되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초에도, 그다음 초에도.
견본 맨 위의 홍길동은 그대로였다. 인쇄된 이름이라 지울 수 없었다.
02:40:02.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