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는 있는 이름
by 장지호 · 2026-10-26
[대책본부 내부 요청서]
수신: 전국 등기소
제목: 전산화 이전 폐쇄등기부(종이 원부) 원본 이송 요청
사유: 백업 시점 분쟁 필지의 최종 대조 기준 확보
※ 종이 원부는 전산 기록과 법적 효력이 동일한 원천 기록임
D+58 · 10:00
청문회 이후 다인에게 온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감찰관실 출석 통지였다. 직무상 알게 된 사항을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표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다른 하나는 종이 원부 대조 작업이었다.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라, 아직 자리를 빼지 않은 사람에게 내려왔다.
다인은 둘 다 받았다. 통지서는 서랍에 넣고 장갑을 꼈다.
종이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시점 분쟁이 가장 심한 필지들의 원천 기록을 확보하자는 것은 다인의 제안이었다. 전산 기록끼리 싸울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전산 이전의 기록뿐이었다. 십오 년 전 전산화 때 스캔되고 창고로 들어간 종이 등기부. 폐쇄등기부라고 불리는 그 장부들이 전국에서 트럭에 실려 왔다.
서고 하나가 통째로 대조 작업실이 됐다.
첫 트럭을 따라 임 주사가 올라왔다. 원부 이송은 각 등기소 전산 담당이 인솔하게 돼 있었고, 그 등기소에서 종이 원부를 실제로 만져본 사람은 임 주사뿐이었다.
"서 주무관."
"선배가 왜 여기 계세요."
"종이 데리고 왔지."
임 주사는 장갑을 끼고 첫 장부를 폈다. 다인이 두 줄을 읽는 동안 그는 한 면을 넘겼다.
"이거 읽으실 줄 아세요?"
"읽는 게 아니라 보는 거야. 이 사람들 글씨는 규칙이 있어." 그는 손가락으로 한 획을 짚었다. "여기 이거. 이게 갑구 옮겨 적을 때 쓰던 표시야. 요즘 사람은 오타인 줄 알지."
"저도 오타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를 부른 거지."
"제가 부른 거 아닌데요."
"그럼 종이가 불렀나 보지."
종이 원부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무겁고, 먼지 냄새가 나고, 세로쓰기 붓펜 글씨는 읽는 데 두 배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넘기다 보면 화면에는 없는 것들이 보였다. 급하게 쓴 글씨와 공들여 쓴 글씨. 같은 필체가 이십 년을 이어지다가 어느 해부터 다른 필체로 바뀌는 것. 등기관 하나가 정년을 맞고 다음 사람이 앉은 자리가, 잉크의 농담으로 남아 있었다. 전산은 그 모든 것을 지우고 내용만 옮겼다.
"선배는 이거 쓰던 시절에 계셨어요?"
"막차 탔지. 내가 들어와서 한 이 년 쓰다가 전산으로 넘어갔어."
"어느 쪽이 나으세요."
임 주사는 장을 한 번 더 넘겼다.
"종이는 느리고 틀리면 못 지워. 전산은 빠르고 틀려도 지워져." 그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때는 전산이 낫다고들 했지."
최민기가 오후에 한 번 내려왔다. 대조 진도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는데, 서고 문간에서 장부 더미를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저는 종이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그런 것도 있어요?"
"먼지요." 그는 문간에서 진도표만 받아 갔다. "그리고 저거 잘못 만지면 제 책임 되잖아요."
경찰 쪽은 아침부터 서고 안에 있었다. 백진우는 장갑을 끼고 이송 목록과 실물을 한 권씩 맞춰보고 있었다. 압수 목록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점심시간에도 나가지 않았다.
지루한 작업이었다. 지루한 채로 끝났어야 했다.
D+58 · 16:20
다인의 손이 멈췄다. 경기 남부 지분 임야의 원부였다.
종이에는 있는 이름이 전산에 없었다.
임야 초입의 작은 필지 세 개. 종이 원부에는 육십 년대부터 이어져온 소유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밭을 일구고 물려주고 나눠 가진 기록이 갱지 위에 세로쓰기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전산 최초 스냅샷, 그러니까 십오 년 전 이관 완료 직후의 기록에는 그 필지들의 소유자가 다른 이름이었다. 지역 개발 법인.
종이의 마지막 줄과 전산의 첫 줄이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인은 오타이기를 바랐다. 105동이 1005동이 되는 종류의, 사람을 갈아 넣으면 바로잡히는 오류이기를. 그래서 그 개발 법인이 취득했다는 인접 필지들을 전부 뽑았다.
열일곱 개 필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열일곱을 지도에 찍자 다인도 아는 형태가 나왔다. 지금은 신도시가 된 택지지구의 진입도로 부지였다.
등기 원인란을 열었다. 매매가 아니었다.
확인서.
다인은 그 세 글자를 알고 있었다. 시험에 나온다. 전쟁으로 등기부가 타버린 땅, 등기가 뭔지 모르고 산 땅, 산 건 맞는데 증빙이 없는 땅. 그런 필지를 정리해주자고 나라가 한시적으로 만든 법이 있었다. 보증인 세 사람이 이 사람이 이 땅을 산 게 맞다고 서명해주면, 그걸로 확인서가 나오고, 확인서로 등기가 된다. 매매계약서도 전 소유자의 도장도 필요 없다. 서명 세 개면 된다.
좋은 법이었다. 종이가 불타 없어진 나라에서 그건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다인은 그 법으로 등기된 필지를 창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방의 논밭이었고 할머니가 아들 이름으로 정리하러 온 건이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여기서는 열일곱 건이 같은 달에 나왔다.
[대조표 발췌 · 경기 ○○리 산 42-3]
종이 원부(폐쇄등기부)
소유자: 김○○ (상속) → 김○○ 외 2인 (협의분할)
최종 기재: 이관 3년 전
원인증서: 협의분할서 편철됨
폐쇄 여부: 폐쇄되지 않음
전산 최초 스냅샷 (등기용지 별도 개설)
소유자: ○○지역개발 주식회사
최초 등기: 소유권보존
근거: 확인서 (보증인 3명 서명)
접수일: 이관 완료 2개월 전
비고: 기존 등기 없음으로 처리
다인은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비고란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기존 등기 없음으로 처리.
확인서로 등기를 하는 데는 두 길이 있다. 등기부가 있으면 거기에 한 줄을 더 붙이고, 등기부가 없으면 새로 하나를 만든다. 새로 만드는 쪽이 소유권보존등기다. 등기부가 아예 없는 땅에만 쓰는 것이라 창구에서는 거의 볼 일이 없다.
이 필지는 등기부가 있었다. 손으로 쓴 세로쓰기 갱지가 창고에 그대로 있고 마지막 기재가 이관 삼 년 전이다. 그런데 서류에는 없다고 적혀 있었다.
없다고 적으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 새 등기부를 만들 수 있다.
한 필지에는 등기부가 하나만 있어야 한다. 삼 년 동안 그 원칙을 어긴 서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필지에는 두 개가 있었다. 종이 등기부는 닫히지 않은 채 창고로 들어갔고, 확인서로 만든 새 등기부는 전산으로 넘어왔다.
다인은 종이 원부로 돌아가 열일곱 필지의 마지막 소유자들을 한 명씩 읽었다. 세로쓰기 붓펜 글씨였다. 김. 박. 다시 김.
읽으면서 노트에 옮겨 적었다. 필지 번호, 이름, 마지막 기재 연도, 원인. 시킨 사람은 없었다. 원부는 언젠가 각 등기소로 돌아갈 물건이고, 돌아가고 나면 이 방에서 본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진다. 한 필지는 삼대가 이름을 물려 적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밭을 사고, 아들에게 넘기고, 손자 대에서 형제 셋이 지분으로 나눈 기록이 갱지 위에 사십 년을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줄 다음에, 종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팔았다는 기록도 넘겼다는 기록도 없이 이야기가 그냥 끝나 있었다.
파는 장면이 없는데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대신 옆에서 다른 종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서명 세 개로.
"선배."
임 주사는 두 자리 건너에서 다른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이것 좀 봐주세요."
다인은 종이의 마지막 줄과 화면의 첫 줄을 나란히 놓았다. 임 주사는 장갑 낀 손으로 장부를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오래 봤다. 그동안 다인은 세 번쯤 말을 걸 뻔했다.
"이거 이상하죠."
"...이상하네."
"오탈자일 수도 있을까요."
"열일곱이 다?"
"네."
임 주사는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장갑 낀 손이었다.
"이거 협의분할이야."
"네."
"형제가 셋이면 도장이 셋이지. 셋이 한자리에 앉아서 정한 거야. 그거 정하는 데 몇 년 걸리는 집도 있어." 그는 손을 다음 줄로 옮겼다. 옮길 줄이 없었다. "여기서 끝나 있잖아. 팔았으면 파는 줄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요."
"밭 팔면 잔칫상은 아니어도 뭐라도 있어. 동네가 알아." 임 주사는 종이에서 손을 뗐다. "아무것도 없이 이름만 바뀌었네."
임 주사는 장부를 덮었다. 덮고 나서 장갑을 벗었다. 벗을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
"위에 보고해."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생각 안 해."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보고해."
그날 임 주사는 저녁을 같이 먹지 않고 내려갔다. 원부 인솔은 이틀 일정이었는데 하루 만에 갔다.
D+59 · 09:00
"이관 오류일 수 있습니다. 단정하지 마세요."
황인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회의실 문을 잠갔다. 참석자는 넷뿐이었다.
"오류면 패턴이 없어야죠." 최민기가 화면을 넘겼다. 밤새 전수 대조를 돌린 결과였다. "이관 전후 불일치 필지가 전국에 이백서른한 건입니다. 무작위가 아니에요. 전부 그 시기 개발지구 언저리고, 전부 등기부가 없다고 처리돼서 보존등기가 새로 났고, 근거는 전부 확인서입니다."
"이백서른한 건이 전부요."
"네."
"보증인은요."
"세 명씩 있습니다. 서명도 다 있어요. 서식대로요." 최민기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이게 제일 이상한 부분인데, 서류가 하나도 안 틀렸습니다."
방이 잠깐 조용해졌다. 다인은 사 년 전 권상호의 확인서면을 생각했다. 그것도 서식대로였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최민기가 다음 화면을 띄웠다. "이 이백서른한 건이요. 이번에 삭제된 4,012건에 한 건도 안 겹칩니다. 대신 사건 당일 마지막 구 초에 실행된 별도 작업이 있어요. 저희가 여태 로그 정리 흔적인 줄 알았던 겁니다. 다시 보니까," 그는 잠깐 말을 골랐다. "복원입니다. 이백서른한 건을 종이 원부 내용대로 되돌려놨어요."
"되돌려놨다는 게," 정 사무관이 물었다. "우리 시스템 안에서요?"
"네. 지금 그렇게 떠 있습니다. 두 달 동안요."
"두 달 동안 아무도 몰랐고요."
"그 필지들은 아무도 안 봤으니까요. 산이고 도로고, 주인이 법인이라 민원이 없습니다."
최민기가 마우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속도가 이제 설명이 됩니다."
"속도요?"
"두 달 전에 제가 이 회의실에서 왜 십 분이나 걸렸느냐고 했었는데요." 그는 로그를 띄웠다. "순서대로 지웠어요. 목록 순서 그대로요. 정렬을 안 바꾸고, 위에서 아래로, 한 줄씩."
"그게 느린 이유예요?"
"그게 유일한 이유예요. 목록을 통째로 넘기면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한 줄씩 순서대로 하면 그 속도가 나옵니다." 최민기는 화면에서 눈을 뗐다. "저희가 만든 정렬을 그대로 따라간 거예요."
다인은 성명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목록은 귀 기관이 만들었다. 우리는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두 달 동안 그 문장을 수사로 읽었다. 그건 수사가 아니라 로그였다.
다인은 그때 노트를 폈다. 숫자만 적어온 페이지였다.
"사천십이에 이백서른하나요."
"네?"
"더하면 사천이백사십삼이에요." 다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날 밤에 손댄 필지가 사천이백사십삼 건인데, 저희가 발표한 건 사천십이 건입니다."
"삭제가 사천십이니까요."
"네. 삭제가요." 다인은 말을 골랐다. 고르는 동안 목소리가 낮아지는 걸 스스로 들었다. "첫 회의 때 피해 규모를 확정했잖아요. 삭제 필지 사천십이 건, 추가 삭제 징후 없음. 그렇게 적혀 있어요."
남 부장이 자료를 넘기다 말았다.
"저희가 두 달 동안 센 건 지워진 것뿐이에요. 되돌려진 건 세지 않았어요. 세는 칸이 없었으니까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다인은 02:40의 로그를 처음 본 밤을 생각했다. DELETE, OK, DELETE, OK. 그 뒤에 이어지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마지막 줄들. 그것들은 두 달 동안 화면에 떠 있었다. 아무도 안 봤을 뿐이다.
홍길동은 지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되돌려놓기도 했다. 그리고 되돌린 내용이 종이 원부와 일치한다면, 지금까지 나라 전체가 원본이라고 믿고 살아온 등기부 쪽이.
"우리가 십오 년 동안," 황인선이 문장을 대신 끝냈다. "사본을 쓰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사본이 아닙니다." 다인이 말했다. "사본은 원본이 있어야 사본이에요. 이건 둘 다 원본이었어요. 하나는 폐쇄가 안 됐고 하나는 전산에 올라갔고요. 십오 년 전에 우리가 한 건 편집이 아니라," 다인은 잠깐 멈췄다. "고르기예요."
넷 중 아무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백서른한 집이 서명 세 개로 남의 것이 됐다. 대부분은 그걸 몰랐다. 등기부가 하나 더 열린 것을 알려주는 우편물은 오지 않고, 그들은 다른 데로 밀려가거나 이미 세상을 떴다. 아무도 항의하지 않은 건 억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억울한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에 신도시가 섰다.
"그러면 이걸 발표합니까." 정 사무관이 물었다.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요." 황인선이 되물었다.
"그 지역 거래가 전부 멈추겠죠. 그리고,"
"그리고요."
"...전국 등기를 아무도 안 믿게 됩니다. 이백서른한 건이 나왔으면 다른 데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있을까요."
"모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다인은 회의실 창밖으로 서울을 봤다. 저 아래 어느 집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고팔리고 있을 것이다. 이백서른한 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위에 그어진 도로가, 그 도로를 낀 신도시가, 그 신도시를 담보로 나간 대출이, 지금 다인이 앉아 있는 이 건물의 등기부까지가 같은 서명의 후손이었다. 되돌리려면 그 후손 전부를 무효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맞는 쪽은," 최민기가 물었다.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방금 우리가 트럭으로 실어 온 종이들이요." 황인선이 말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십오 년 전에 덮어둔 사람이 있을 거고, 두 달 전에 그걸 열어서 되돌려놓은 손이 따로 있고요. 우리는 그 둘을 다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