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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표 말고 이름으로

by 장지호 · 2026-10-26

11:20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남자는 서류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고 여자는 휴대폰을 계속 확인했다. 잔금 치르러 가기 전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상기된 얼굴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다인은 젊은 부부가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 직접 오는 경우가 늘었다는 걸 알게 됐다. 수수료를 아끼려고 유튜브를 보고 오는 사람들이다. 영상에서 알려주지 않는 칸이 꼭 하나씩 있어서, 결국 창구에서 다시 묻는다.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서요, 이거 이렇게 쓰는 게 맞나 해서요."

집을 산 사람이 등기부의 주인 이름을 자기 것으로 바꾸는 서류다. 다인은 종이를 펼쳤다가 손을 멈췄다.

첫 장 상단, 등기권리자란에 인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등기권리자: 홍길동

그 밑줄에 볼펜으로 조은결이라고 덧쓰여 있었다. 주민번호 자리의 000000-0000000 위에도 숫자가 눌러 적혀 있었다.

"이거 어디서 가져오셨어요?"

"저기 꽂혀 있길래요."

다인은 종이를 한 번 더 봤다. 칸이 다 채워져 있었다. 취득세 영수증 번호까지 적어 왔다.

"...그건 견본이에요."

견본을 들고 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보다 이 견본을 틀에서 어떻게 빼왔는지가 더 의아했다.

"어떻게 쓰는지 보시라고 미리 채워놓은 거라서요. 여기 홍길동은 예시로 넣어둔 이름이고요. 견본 꺼내신 데 왼쪽에 보시면 진짜 신청서 있으세요. 지금은 여기서 드릴게요."

남자가 아, 하고 짧게 웃었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툭 쳤다.

"거봐. 내가 이상하다 그랬잖아. 그걸 꺼내냐."

다인은 빈 양식을 유리 아래로 밀어 넣고 볼펜을 뒤집어 잡고 쓸 자리를 짚어줬다. 어느 집인지, 왜 넘어왔는지, 뭘 할지. 칸은 각각 어렵게 쓰여 있지만 묻는 것은 단순했다. 다인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말했다. 인감은 언제 떼야 하고 유효기간이 며칠이고 취득세는 어디서 내고. 등기필정보는 특히 신경 써서 짚어줬다. 등기가 끝나면 종이 한 장을 받는데 은박 스티커 밑에 비밀번호가 숨어 있고, 그게 예전 집문서를 대신한다고. 진짜 쓸 일이 생겼을 때 처음 벗기는 거고 한 번 벗기면 다시 못 붙이니까 그전에는 절대 긁지 말라고. 남자는 몇 번이고 되물었고 여자는 휴대폰으로 열심히 메모를 했다.

남자가 한 칸씩 채우는 동안 다인은 덧쓰인 견본을 자기 앞으로 끌어와 수정테이프를 꺼냈다. 덧쓴 이름을 지웠다. 홍길동은 인쇄된 거라 지울 것도 없다.

다인은 그 이름을 잠깐 봤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이름이다. 아무 데도 없는 사람이라서 아무 칸에나 들어간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서류를 가장 많이 써본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홍길동일 것이다. 집을 사고 팔고 상속받고 빚을 지고, 그러고도 실제로는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다.

이렇게 지우고 다시 꽂아둔 견본이 서랍에 한 뭉치 있다. 덧쓴 이름은 다 지워지는데 홍길동만 남는다.

전산에도 홍길동이 있었다. 교육받을 때 연습용 화면에 뜨던 집. 진짜 사람에게 손대기 전에 시스템은 늘 그 이름으로 먼저 연습했다.

"잔금이 언제세요?"

"다음 주 화요일이요."

"법무사 통해서 접수하실 거죠?"

"저희가 직접 하려고요." 여자가 말했다. "수수료를... 아껴보려고요."

"칠 년 만에 됐거든요, 청약."

남자가 그렇게 묻지 않은 말을 던졌다. 그러고는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되어 축하를 받으려 했다. 옆에서 여자가 팔을 툭 쳐도 멈추지 않았다.

"열두 번 넣었어요."

"고생하셨네요."

"고생은 자기 부모님이 했지." 여자가 말했다.

"장인어른이 좀 보태주셨어요." 남자는 능청스럽게 받았다. "근데 열두 번은 제가 넣었잖아요."

남자는 웃으면서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귀가 빨개져 있었다.

직접 하는 사람은 열에 두셋이고 그중 절반은 뭔가를 빠뜨려 다시 온다. 그래도 말리지 않는다. 자기 집을 자기 손으로 등기하겠다는 사람을 말릴 이유는 없다.

"화요일에 오시면 제가 볼게요. 성함이 조은결님 맞으시죠."

"네. 덧써놨던 거."

부부가 나가고 다인은 오전에 띄워둔 조회 창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목록에 지번이 하나 떠 있는데 눌러도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모래시계가 돌다가 문장이 떴다.

해당 부동산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소를 다시 넣어봤다. 같은 문장이었다. 관할이 다른 데인가 싶어 확인했는데 관할은 맞았다.

다인은 발급 대장 여백에 적었다. 11:47, 조회 불가 지번 1건. 열람 안 됨.

적어놓고 잠깐 봤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서 주무관, 밥."

임 주사가 재킷을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인은 창을 닫고 따라나섰다.

12:30

등기소 뒤 골목 백반집. TV가 켜져 있었다. 볼륨은 거의 없고 자막만 흘렀다.

동유럽 어느 나라의 등기청이 해킹당했다고 했다. 토지 기록이 통째로 지워져서 일주일째 부동산 거래가 멈췄고, 집을 사고팔아도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적어둘 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화면에는 셔터 내린 관공서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장면이 나왔다.

임 주사가 국에 밥을 말다 말고 턱으로 TV를 가리켰다.

"우린 저럴 일 없지?"

"백업 있어요."

"그래?"

"매일 새벽에 한 번 돌아요. 근데 그건 같은 망에 붙어 있으니까 그것만 믿으면 안 되고요."

"안 되고."

"주 단위로 테이프에 따로 떠요. 망에서 아예 떼놓고, 건물도 딴 데 두고요."

"딴 건물."

"네. 그러니까 저쪽처럼 들어와서 지워도 테이프는 못 건드려요. 재작년에 훈련도 했어요."

"훈련."

"세 시간 반 걸렸거든요? 근데 그게 전체가 아니라 표본만"

"어어. 됐어. 밥 먹어."

"물어보셨잖아요."

"물어본 걸 후회하는 중이야."

임 주사는 계란말이 접시를 다인 쪽으로 밀어놨다. 반쯤 남은 것이었다. 다인이 계란말이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선배는 그럼 우리 백업 어디 있는지 아세요?"

"몰라. 알아야 돼?"

"IT 담당이시잖아요."

"겸직이야."

임 주사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화면이 다른 뉴스로 넘어갔다.

"근데 말이야. 아까 그 부부, 직접 한다 그랬지."

"네."

"등기 잘 되겠지 뭐."

"되겠죠. 서류만 맞으면요."

임 주사는 잠깐 창밖을 봤다. 골목 건너편 부동산 유리창에 매물 종이가 다섯 장 붙어 있었다.

"우리 등기는 말이야, 종이일 뿐이야. 믿으면 안 돼."

"...네?"

"언제 홍길동 같은 애가 나타나서 다 불태워버리면 없는 거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

다인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 시험 볼 때 외운 문장이니까. 나라가 적어주기는 하는데 보증은 안 해준다. 나중에 진짜 주인이 나타나면 등기부를 믿고 돈을 다 치른 쪽이 진다.

"알죠."

"아는 거랑 창구에서 그걸 알면서 당하는 거랑 좀 달라."

다인은 오늘 아침의 견본을 떠올렸다. 수정테이프로 지운 자리와, 지울 것도 없이 인쇄되어 있던 이름.

"왜 하필 홍길동이에요?"

"뭐가."

"...아니에요."

다인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그럴 때 선배는 어떻게 하는데요? 몰래 귀띔이라도 해줘요? 이거 사기인 것 같다고."

"난 아무 말 안 하지. 물어보지도 않는 걸 뭐하러."

다인은 그 말에 조금 찔렸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계산은 임 주사가 했다. 다인이 지갑을 꺼내는 동안 이미 문 앞에 나가 있었다. 이 사람은 밥 먹으러 가면 늘 더치페이를 거부했고, 가끔 다인에게 사라고 하는 정도였다.

15:02

모래시계가 열두 바퀴 돌았다.

증명서 한 통 떼는 데는 보통 3초가 걸린다. 아침에 권상호 것을 뽑을 때 여섯 바퀴가 돌았으니 두 배나 느려졌다.

창구 앞 남자가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손에 든 서류 봉투에 은행 로고가 찍혀 있었다. 대출 서류에 넣을 증명서일 것이다. 오늘 안에 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은행에 낼 거면 열람용이 아니라 발급용이어야 하는데, 봉투에 은행 로고가 찍혀 있으니 발급용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인은 묻지 않고 걸어뒀다. 삼 년이면 봉투만 봐도 안다.

다인은 화면을 봤다가 남자를 봤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새로고침을 누르면 요청이 처음부터 다시 들어간다는 걸 알아서 누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산이 좀 느리네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대개 정말 괜찮다. 문제는 괜찮지 않은 사람이 그 뒤에 서 있을 때다. 다인은 대기 인원을 확인했다. 두 명이었다.

문서가 떴다. 출력 버튼을 누르고 발급 대장을 폈다. 15:02, 48초 소요.

그 아래에는 적을 것이 없었다. 갑구에 한 사람, 을구에 은행 하나. 흔한 집이었다.

17:38

세 번째였다. 이번엔 임 주사 자리에서도 멈췄다.

"오늘 왜 이래."

"접수가 몰렸나 봐요."

"몰리긴. 오늘 한산했잖아."

다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아래 시계 옆에서 모래시계가 계속 돌고 있었다. 스물 몇 바퀴인지 세다가 놓쳤다.

"선배, 이런 건 어디다 알려요?"

"뭘."

"느린 거요."

임 주사는 자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작년에 반나절 걸릴 때도 나가서 커피 한잔하고 오니까 풀려 있던데."

"오후에 풀렸어요."

"그러니까."

"그래도 이건 세 번째인데요."

"전화해봐야 접수 몰렸다 그럴걸."

"안 몰렸잖아요."

"그럼 정기 점검 중이라 그러겠지."

임 주사는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다시 화면을 봤다. 다인은 잠깐 기다렸다. 겸직이라도 전산을 십 년 넘게 붙들고 있었으면 하루에 세 번 이러는 게 무슨 뜻인지 짚이는 데가 있을 사람이었다. 임 주사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문서가 떴을 때 다인은 발급 대장을 폈다. 17:38, 조회 지연 오늘 세 번째.

그러고는 그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18:00

민원 마감. 다인은 로비로 나가 무인 발급기 두 대의 전원을 내렸다. 아침에 손봐둔 1번기는 하루 종일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용지를 반쯤 빼두었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기분이 좋았다.

전산은 오후 내내 그대로였다. 결국 고쳐지지 않았고, 느리다는 항의 전화를 몇 통 받았다. 퇴근은 여섯 시 오십 분에 했다. 정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청원경찰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오늘 컴퓨터 느렸다면서요."

"들으셨어요?"

"민원인들이 그러대요."

다인은 웃고 지나갔다.

19:10

퇴근길 지하철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다인은 문 옆에 서서 휴대폰으로 자기 아파트 등기사항증명서를 열었다.

두 달 사이에 네 번째였다.

두 달 전에 창구에서 진정명의회복 이전등기를 한 건 접수받았다. 흔한 원인이 아니었다.

집주인 자리에 남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 그게 처음부터 잘못 올라간 것이라면, 매매나 상속으로 넘기는 게 아니라 원래 주인에게 그냥 돌려놓아야 한다. 그때 쓰는 게 진정명의회복이다. 다만 상대가 순순히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는 없어서 대개 소송을 거쳐 온다. 그날 접수받은 서류에도 판결문이 붙어 있었고, 소송이 시작된 날짜와 끝난 날짜 사이가 삼 년이었다.

다인은 그 서류를 두 번 읽었고, 두 번 읽는 동안 자기 집 등기부가 떠올랐다. 세 번째 줄에 같은 글자가 적혀 있다는 걸 다인은 알고 있었다. 십일 년 동안 알고 있었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집을 살 때 다인은 스물넷이었다. 법원에 들어간 지 반년이었고 등기는 배우기 전이었다. 그 집을 고른 것도 다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디서 보고 와서 데려갔고, 지하철 두 정거장에 남향이고 이 가격이면 없다고 했고, 사천만 원을 보태줬다. 다인이 한 일은 도장을 찍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줄은 십일 년 전에도 거기 있었다. 봤을 것이다. 봤는데 눈에 안 들어왔다. 자기 이름이 들어갈 칸만 봤을 것이다.

지금은 눈에 들어왔다.

소유권이전, 진정명의회복. 십일 년 전 이 집에도 남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누군가 그 이름을 지우려고 소송을 했고, 이겼다. 아침의 그 남자가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다던 바로 그 소송이다.

그 아래 줄이 문제였다. 소유권이전, 매매. 여덟 달 뒤 날짜.

몇 년을 걸려 되찾은 집을 여덟 달 만에 판 사람의 사정을 다인은 알지 못했다. 알 방법도 없었다. 등기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지 않는다. 무엇이 바뀌었는지만 적는다.

그 아래는 다인의 이름이었다. 갑구 맨 끝, 을구에 은행. 그 위로 전 주인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남아 있었다. 등기부는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는다. 취소된 것도 줄 하나 그어서 두고, 줄이 그어져도 밑의 글자는 읽힌다.

다인은 그 점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잊힐까 봐 집을 산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등기부는 그 두려움에 대한 국가의 대답 같은 것이었다.

두 달 동안 다인이 알아본 것은 없었다. 알아보려면 등기소에서 반나절이면 됐다. 그 여덟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찾은 사람이 왜 팔았는지, 지금 어디 있는지. 접수 서류를 열람 신청하면 나오는 것들이다. 다인은 그 신청서를 매일 창구에서 남에게 밀어준다.

반나절을 못 내는 것은 아니었다.

화면 위로 전화가 떴다. 어머니였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치 언제 가지러 올 거야."

"이번 주는 좀 어려워요."

"그럼 택배로 부친다."

"그러지 마시라니까."

"벌써 담가놨어."

환승역 안내방송이 나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다인은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로 안쪽으로 떠밀렸다.

통화가 끝났을 때 화면은 잠겨 있었다.

그 줄은 다시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