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분은 건너뛰었습니다
by 받아적는사람 · 2026-10-22
대답을 고를 시간이 없었다.
"……석 달이라고 들었습니다."
카시안의 눈썹이 움직였다.
"들었다?"
입안이 말랐다. 들었다. 그 단어가 혀끝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대회랑에서요. 다른 분들이."
"아."
그가 몸을 돌렸다. 창가로 돌아가 북쪽 성벽을 내다봤다.
"석 달. 지난달 조언역은 넉 달이라고 했지. 그 전 조언역은 겨울을 못 넘긴다고 했고. 다들 날짜가 조금씩 달라. 재미있지 않나. 같은 책을 읽었다면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님들의 식탁이 떠올랐다. 은발파와 백금발파.
"그럼 어떻게 죽는지는?"
"……."
"그것도 들었나?"
들었다. 스물아홉 번째 공책, 서른 번째 공책. 황태자의 죽음은 손님들이 가장 크게 싸운 주제였다.
"겨울 사냥터야. 화살이지. 황태자는 사냥 나갔다가 안 돌아와."
장교는 그렇게 말했다.
"독이에요. 3권은 처음부터 독 냄새가 나요."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공증인은 1권만 읽어서 모른다며 빠졌다. 결론은 끝내 나지 않았다. 프롤로그의 한 줄 말고는 아무도 그 장면을 읽지 못했으니까.
그걸 그대로 말하면 들킨다. 1급은 자기가 읽은 걸 말해야 했다.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가, 앞의 조언역 셋이 단정적으로 떠든 게 있다면. 화살과 독 중 하나를 골랐다가 틀린다면.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말라 붙어 있었다.
"그 부분은." 혀가 먼저 움직였다. "건너뛰고 읽었습니다."
서재가 조용해졌다.
카시안이 천천히 돌아봤다.
"건너뛰었다."
"네."
"내가 죽는 장면을."
"……네."
"황태자 전담 조언역이. 황태자가 죽는 장면을. 건너뛰고 읽었다."
그가 한 마디씩 끊어 되물을 때마다 내 목이 한 뼘씩 졸아들었다. 뭐라도 덧붙여야 했다. 나는 백작 부인의 말을 빌렸다.
"우는 장면은 잘 못 봐서요."
그가 웃었다. 처음이었다. 짧고 메마른 웃음.
"좋아. 그럼 넌 앞으로 내가 우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전하가 우세요?"
"원작에선 안 우나?"
"그 부분도 건너뛰었습니다."
그가 의자에 털썩 앉아 종이 더미를 내 쪽으로 밀었다.
"일해. 내일 아침 회의 자료다. 북부 보급, 재무청 예산, 황녀궁 경비. 안건마다 원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적어 와."
"원작을…… 적어요?"
"그래. 매일."
"전부요?"
"아는 만큼. 모르는 건 모른다고 적고."
"건너온 이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거 하나잖아. 앞일을 말하는 것."
그 목소리에는 고마움이 한 톨도 없었다.
나는 종이 더미를 안고 일어섰다. 문으로 가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
"하나만 더."
카시안이 창밖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녁 해가 북쪽 성벽에 걸려 있었다. 성벽 한가운데 육중한 문이 보였다.
"저기. 원작에선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이건 알았다. 스물아홉 번째 공책, 장교가 가장 신나게 떠든 대목.
나는 그 밤의 장교가 됐다. 목소리를 낮게 깔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북문 화재요. 등불 축제 지나고 한 달, 보름밤. 달이 북문 탑에 걸릴 무렵 기름 창고에서 불이 올라요. 북문 수비대가 전하 직속이라 책임이 전하께 가고요. 거기서부터 내리막이래요."
카시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물었다.
"그게 언제지. 보름이."
"이번 달 보름이면…… 열흘쯤 뒤예요."
"그렇군." 그는 다시 창밖을 봤다. "가 봐."
등 뒤로 문이 닫힐 때까지 그는 북문만 보고 있었다.
* * *
그날부터 밤마다 궤짝을 열었다.
북부 보급은 열여덟 번째 공책. 재무청은 스물한 번째. 황녀궁 경비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각을 모아 「원작에서는」으로 시작하는 한 장으로 정리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지웠다.
페트라가 자다 깨서 물었다.
"언니, 외투 안에 뭐 넣고 다녀? 걸을 때마다 쇳소리 나."
"……열쇠."
"우리 집 열쇠 나무잖아."
"상단 창고 열쇠야. 아직 못 돌려줬어."
"상단주가 잘랐다며. 열쇠를 안 가져갔어?"
"……내일 돌려줄게. 자."
페트라는 대답 대신 돌아누웠다. 나는 벽에 걸린 외투를 내려 안주머니를 눌렀다. 동판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그 밤엔 외투를 베고 잤다.
* * *
회의는 매일 아침 황태자궁 작은 회의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재무청 차관, 북부 보급관, 근위대장. 셋 다 건너온 이였다. 붙박이는 차를 따르는 하인장뿐이었다. 노라라는 이름의 마흔 남짓한 여자. 웃지 않았다.
재무청 차관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북부 보급 삭감. 원작대로입니다." 그가 도장을 찍었다. "4권 전까지 북부는 조용합니다."
"조언역." 카시안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원작에선 올겨울 북부 첫눈이 빠르대요. 보급이 늦은 요새 두 곳이 겨울을 못 넘긴대요."
차관이 도장을 쥔 채 나를 봤다.
"그건 2권엔 없는 얘기인데. 3권 몇 장입니까?"
"……겨울 첫머리요."
"몇 장이냐고 물었습니다. 1급이면 장 번호는 다 외우던데."
등줄기가 식었다. 열여덟 번째 공책 어디에도 장 번호는 없었다.
"전하, 장 번호도 모르는 말에 예산을 다시 붙이시면 2권 다리 꼴 납니다." 북부 보급관이 끼어들었다.
"차관." 카시안이 펜을 내려놓았다. "요새 둘이 얼어 죽으면 그 장 번호를 부고에 적어 줄 건가?"
"……."
"삭감 철회. 다음."
그 회의실에서 나는 카시안의 칼이 됐다.
다만 칼은 가끔 무뎌졌다.
"조언역. 1권에서 내가 황녀 열두 살 생일에 뭘 선물했지?"
"……그 부분은 건너뛰고 읽었습니다."
"그럼 2권 근위대장 임명식에서 내가 한 말은? 거기 있던 사람이 지금 이 방에 있는데."
"그 부분도 건너뛰고……."
"넌 대체 책을 어떻게 읽은 거야. 목차만 봤나?"
근위대장이 킥킥 웃었다.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리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다음 안건은 근위대장이 꺼냈다.
"보름밤 북문 경비 말입니다. 원작대로 그냥 두시죠. 막아 봐야 다른 데서 터집니다. 2권 다리 때 다들 봤잖습니까."
모두의 눈이 카시안에게 갔다. 원작대로 두면 그 불의 책임은 황태자에게 간다. 이 방의 건너온 이들은 그걸 알면서 말하고 있었다.
카시안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그래. 원작대로."
"현명하십니다, 전하."
근위대장이 만족한 얼굴로 서류를 덮었다. 나만 그 대답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다.
노라가 내 잔에 차를 채웠다. 아주 잠깐, 잔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나는 알았다. 10년 동안 마르코의 서재 유리창에 비치던 눈. 식탁 뒤에 서서 모든 걸 듣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의 눈.
* * *
회의가 끝나면 복도에서 건너온 이들이 나를 붙잡았다.
"1급이시죠? 3권 중반이면 황녀궁 담 얘기 아세요?"
"서쪽 담이요?"
"역시! 거기 언제 무너져요? 차관님이 그거 알아 오라고 난리예요."
"……그건 저도 건너뛰고 읽어서."
"아, 진짜. 1급들은 다 왜 그래요. 백작 부인도 담 얘기만 나오면 건너뛰었다던데."
"……그분도요?"
"1급은 다 건너뛰는 데가 하나씩 있대요. 웃기지."
재무청 차관의 서기였다. 3급. 그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등에 땀이 흘렀다.
1급들은 다 그런 모양이었다. 다들 모르는 게 있었다. 모른다고 말하지 않을 뿐.
황태자궁을 나설 때마다 뒷문 쪽을 봤다. 마구간에서 말을 빗질하던 한스가 나를 보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규칙 넷을 떠올리고 그냥 지나갔다.
닷새째에는 비가 왔다. 정문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한스가 우산을 들고 뛰어왔다. 하인용 기름종이 우산이었다.
"조언역님, 이거."
"……고마워."
규칙 넷은 상대가 먼저 말을 걸었을 때는 어떻게 하라고 적혀 있지 않았다.
한스가 우산을 건네고도 가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그 애가 작게 말했다.
"조언역님은 다른 분들이랑 달라요."
등이 굳었다.
"뭐가?"
"다른 분들은 복도에서 우리를 안 봐요. 벽인 것처럼 지나가요. 조언역님은 꼭 하인 쪽을 먼저 봐요. 누가 서 있는지."
그건 버릇이었다. 10년 동안 방에 들어가면 하인부터 셌다. 누가 듣고 있는지. 누가 말을 옮길지.
"그게 이상해?"
"이상하진 않은데요. 처음 봐서요."
"……내일 우산 돌려줄게."
"안 주셔도 돼요. 마구간에 많아요."
"그럼 이건 내 거야?"
"네. 조언역님 거요."
한스는 빗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우산을 쓰고 걸으며 규칙을 하나 더 적어야 하나 생각했다. 여섯. 하인 쪽을 먼저 보지 말 것.
적지 않았다. 그건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열흘이 지났다.
건너뛰고 읽었다는 말을 열한 번 했다. 카시안은 그 숫자를 세고 있었다. 회의가 끝날 때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홉 번째."
다음 날.
"열 번째."
열하루째 저녁, 서재에 불려 갔다.
카시안은 등잔 하나만 켜 두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종이 한 무더기가 펼쳐져 있었다. 내가 열흘 동안 써 온 보고서였다.
"앉아."
"전하, 저는 서 있는 게……."
"앉으라고."
앉았다. 그가 보고서 한 장을 들었다.
"원작에선 올겨울 북부 첫눈이 빠르대요." 그가 내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다음 장을 들었다. "원작에선 재무청 금고가 두 번 털린대요." 다음 장. "원작에선 황녀궁 서쪽 담이 약하대요."
등잔 불꽃이 흔들렸다.
"대요."
"……네?"
"대요. 래요. 했대요." 카시안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네 앞에 셋이 이 자리를 거쳐 갔지. 다들 원작을 말할 때 이렇게 말했어."
"……어떻게요?"
"「원작에선 그렇다.」 「내가 읽었는데.」 자기 눈으로 본 걸 말하는 투로."
그가 나를 봤다.
"넌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 넌 늘 원작에선 그렇대요, 라고 해. 남한테 전해 들은 말을 옮길 때처럼."
심장이 멎는 소리가 귀에서 들렸다.
10년이었다. 10년 동안 나는 남의 말을 옮겼다. 상단주님이 그랬대요. 백작 부인이 그랬대요.
그 끝을 바꿀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끝에 붙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건너뛴 자리도 이상해."
그가 보고서를 넘겼다.
"생일 선물. 임명식 연설. 담이 언제 무너지는지."
"……."
"술자리에서 아무도 안 떠들 장면만 골라서 건너뛰었더군."
"그건, 그 부분이 지루해서……."
"화재는 안 건너뛰었지. 내가 몰락하는 장면도. 사람들이 신나서 떠드는 장면은 하나도 안 빼놓고 다 알아."
카시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등잔 불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거울 속 등불 너머 그림자에 가려 있던 바로 그 높이였다.
"네 말투는 책을 읽은 사람 말투가 아니야."
그가 낮게 말했다.
"들은 사람 말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