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by 앙상블 · 2026-10-22
# 제1부 무너진 큐
## 14화.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월요일 아침, 민호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기 전에 책상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지난주 금요일, 당구장에서 돌아온 뒤 적어 둔 문장이 첫 페이지에 남아 있었다.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해낼 수 있도록 준비할 것.
민호는 그 아래에 새 문장을 적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분명히 할 것.
며칠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막상 무엇을 원하는지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승진을 다시 하고 싶은 것인지, 지금 맡은 업무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명확한 답을 듣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도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아마 세 가지가 모두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민호는 팀장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팀장님, 이번 주 중에 제 담당 업무와 향후 역할에 대해 잠깐 면담할 시간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괜히 손이 어색해졌다. 대단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오래 참아 온 불만을 한꺼번에 쏟아 낸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수요일 오후 세 시 어떻습니까? 회의실에서 이야기합시다.
민호는 짧게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화면을 닫고 나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작 면담 시간을 잡았을 뿐인데 마음이 이토록 무거울 줄은 몰랐다.
그날 오전, 박준호가 일정표를 들고 찾아왔다.
“선배님, 외부 검토 일정이 또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는 이틀 정도 늦어질 것 같습니다.”
민호는 일정표를 받아 살펴보았다. 검토가 늦어지면 최종 보고서 작성 기간이 줄어들고, 그다음 단계에 참여하는 부서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럼 최종 제출일은 그대로인가?”
“아직은 그렇습니다.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제출일을 바꿀 수 있는지와 검토 결과가 늦어졌을 때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범위를 같이 물어보게. 일정이 늦어지는 것 자체보다, 늦어진 뒤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더 위험하니까.”
준호는 수첩에 내용을 적었다.
“네. 두 가지를 같이 확인하겠습니다.”
민호는 일정표를 돌려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직접 담당자에게 연락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일이 빨리 끝났고, 실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준호가 담당자로서 판단하고 책임질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손을 떼는 것과 방치하는 것은 달랐다. 준호가 놓치는 부분을 살피되, 모든 일을 대신 처리하지는 않는 것. 그 경계가 아직은 조금 어색했다.
준호가 자리로 돌아간 뒤 민호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려 준 방법을 준호가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뻤다. 동시에 그 방법을 활용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민호는 그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았다.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었다. 다만 그 감정 때문에 준호의 일을 방해하거나,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화면을 바라보았다.
수요일까지 이틀이었다.
***
수요일 오후 세 시, 민호는 팀장 앞에 앉았다.
팀장은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 놓고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민호는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현재 제가 맡은 업무의 범위와 앞으로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준호 씨가 맡는 업무가 늘어나고 있고, 저도 일정 검토나 위험 요소 확인 같은 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역할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정해지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아서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민호 씨가 경험이 많고, 업무의 허점을 잘 찾아내는 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다만 앞으로는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도 중요해질 겁니다.”
민호는 그 말을 들으며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해 온 일을 떠올렸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찾아내고, 일이 틀어지기 전에 바로잡고, 일정이 밀리면 다른 부서와 협의해 마감일을 맞췄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식만으로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제가 앞으로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팀장은 잠시 생각했다.
“업무를 맡기는 범위를 넓히고, 후배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겁니다. 그리고 민호 씨가 가진 경험을 팀 전체의 성과로 연결하는 거죠.”
“그 방향은 이해했습니다. 다만 제가 실제로 어떤 업무를 책임지고, 어떤 결과를 보여 드려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도 그에 맞춰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팀장은 민호를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직접적인 질문이어서인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는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좋습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가운데 일정과 위험 관리가 중요한 업무가 하나 있습니다. 다음 단계부터는 민호 씨가 전체 진행 상황을 점검하고, 담당자들이 놓친 문제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준호 씨는 실무 진행을 맡고요.”
민호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업무 전체를 살피고, 각 단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하는 일이라면 경험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 업무를 맡게 되면, 제 역할에 대한 평가도 그 결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팀장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인사평가에는 여러 요소가 반영됩니다. 프로젝트 성과만으로 승진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어요.”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씁쓸했다.
민호는 한때 승진만 하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승진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평가 기준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여러 요소와 종합적인 판단이라는 말이었다.
“그럼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와 평가 기준을 미리 정해 둘 수 있을까요? 결과가 나온 뒤에 서로 다르게 해석하지 않도록요.”
팀장은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필요하겠네요. 프로젝트 목표와 중간 점검 항목을 정리해서 다음 주까지 공유합시다. 민호 씨가 초안을 만들어 주시면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회의실에서 나온 민호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승진을 약속받은 것도 아니고, 앞으로의 인사 방향을 확답받은 것도 아니었다. 팀장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전부 알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전과 달라진 점은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맡을 업무의 방향을 확인했고, 무엇을 기준으로 성과를 살펴볼지 문서로 정리해 보자는 합의도 얻었다.
막연하게 기다릴 때는 무엇이 부족한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상대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조금은 구분되었다.
민호는 자리로 돌아와 새 문서를 열었다.
프로젝트 목표, 주요 일정, 위험 요소, 중간 점검 시점, 담당자별 책임 범위.
항목을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준호가 맡은 실무와 자신이 점검해야 할 부분이 나뉘었다. 단순히 준호의 실수를 찾아내는 문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기기 전에 어느 단계에서 확인할 것인지 정하는 문서가 되어야 했다.
민호는 마지막 항목에 이렇게 적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묻기 전에, 문제가 드러날 수 있는 점검 절차가 마련되어 있었는지 확인한다.
문장을 읽고 나니 조금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실수를 찾아내는 것과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 차이를 자신이 먼저 보여 줄 수 있다면, 적어도 이번 업무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퇴근 후 민호는 태성당구장에 들렀다.
재식은 이미 당구대 앞에서 공의 배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민호가 인사하자 재식은 큐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표정이 좀 복잡하네요.”
“그런가요?”
“좋은 일이 있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남았거나, 나쁜 일이 있었는데 그냥 넘기기에는 아쉽거나. 둘 중 하나 같은데요.”
민호는 웃었다.
“둘 다 비슷합니다. 회사에서 면담을 했거든요.”
“원하던 답을 들었습니까?”
“일부는요. 앞으로 맡을 일은 조금 구체적으로 정해졌는데, 평가 기준까지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닙니다.”
재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 끝난 이야기는 아니네요.”
“그렇죠. 그래도 전에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답을 만들어 놓았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승진이 안 됐는지,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확인하지 않은 부분까지 혼자 판단했어요.”
재식은 잠시 민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구도 그렇습니다. 상대가 왜 저쪽으로 쳤는지, 다음에 어떤 공을 노리는지 예상은 할 수 있죠. 하지만 내가 예상한 것과 실제 의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상대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니 공의 위치를 보고 판단해야 하고요.”
“회사에서는 직접 물어볼 수 있지만, 당구에서는 공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다만 공을 보고 판단할 때도,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면 안 됩니다.”
민호는 그 말을 곱씹었다.
“오늘 한 게임 하시겠습니까?”
재식이 물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시작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당구대 양쪽에 섰다.
“열심히 치겠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뱅킹을 했다. 민호가 먼저 초구를 치게 되었다.
수구와 제1적구, 제2적구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앞돌리기를 생각했지만, 공의 각도를 다시 확인하자 자신이 예상한 경로로 보내기에는 두께 조절이 까다로워 보였다.
민호는 잠시 자세를 잡았다가 일어섰다.
재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호는 당구대 옆으로 이동해 다른 각도에서 공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안정적으로 득점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화려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수구가 지나갈 경로를 예측하기에는 나았다.
다시 자세를 잡고 부드럽게 스트로크했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힌 뒤 쿠션을 돌아 제2적구로 향했다. 그러나 마지막 각도가 예상보다 조금 길었다. 공은 목적구의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득점에는 실패했다.
민호는 큐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려다가 멈췄다. 방금 선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인지, 두께와 속도를 조금 다르게 조절했어야 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공의 최종 위치를 살펴보았다.
“길게 나갔네요. 경로 선택은 괜찮았는데 속도를 조금 더 줄였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재식이 다가와 공의 배치를 바라보았다.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처음 생각한 길보다 안정적이긴 했어요. 다만 수구가 쿠션을 맞고 나오는 속도를 조금 더 고려했으면 좋았겠네요.”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았으면 또 쉬운 공을 놓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놓친 건 맞죠.”
재식이 담담하게 말했다.
민호가 그를 바라보자 재식은 덧붙였다.
“그렇다고 놓친 이유까지 전부 같은 건 아니니까요. 각도를 잘못 봤을 수도 있고, 두께가 틀렸을 수도 있고, 속도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똑같은 공이 왔을 때 무엇을 바꿀지 알면 됩니다.”
민호는 웃었다.
“오늘 회사에서 들은 이야기와 비슷하네요. 결과만 보지 말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회사 일은 잘 모르지만, 당구에서는 그렇습니다.”
재식은 큐를 들었다.
“자, 제 차례네요.”
재식은 공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민호는 그가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 예상해 보았다. 자신이라면 옆돌리기를 시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재식은 잠시 뒤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공은 재식이 의도한 경로를 따라 움직였지만, 마지막에 수구가 예상보다 조금 멀리 빠졌다. 재식은 다음 공을 바라보다가 짧게 입술을 다물었다.
“속도를 조금 많이 줬네요.”
민호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재식 씨도 그런 실수를 하는군요.”
“제가 안 하는 줄 알았습니까?”
“솔직히 조금은요.”
재식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 치는 사람도 실수합니다. 차이는 실수를 하느냐 안 하느냐보다, 실수한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있을 때가 많죠.”
민호는 재식이 놓친 공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신은 잘하는 사람은 늘 정확한 판단을 하고, 못하는 사람은 자주 틀린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재식도 잘못 판단할 때가 있었고, 자신도 때로는 괜찮은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결과로 자신이나 상대를 규정하지 않는 일이었다.
게임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민호는 몇 차례 득점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어려운 공 앞에서는 망설였다. 재식은 연속 득점을 이어 가다가도 한 번씩 실수했고, 그때마다 서둘러 만회하려 하지 않고 다음 배치를 살폈다.
마지막에 민호가 득점할 기회를 얻었다.
점수 차는 크지 않았다. 이번 공을 성공시키면 다시 따라붙을 수 있었다. 민호는 공을 바라보며 경로를 정했다. 그러나 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그는 자세를 풀었다.
다시 당구대 옆으로 이동했다. 점수판을 보지 않고 공의 위치만 살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점수 차를 한꺼번에 줄이는 일이 아니라, 눈앞의 공을 정확하게 보내는 일이었다.
민호는 숨을 내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스트로크가 한결 부드러웠다.
수구가 제1적구를 맞히고 쿠션을 돌아 제2적구에 닿았다. 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득점이었다.
민호는 과장되게 기뻐하지 않았다. 큐를 세워 들고 다음 배치를 확인했다. 점수는 아직 뒤지고 있었고, 한 번의 득점으로 승부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그 뒤에도 게임은 이어졌다. 민호는 끝내 재식을 따라잡지 못했다. 재식이 마지막 득점을 성공시키면서 승부가 마무리되었다.
“잘 쳤습니다.”
민호가 먼저 인사했다.
재식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점수 차를 많이 줄이셨네요.”
“운이 좋았던 공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까처럼 서둘러 치지는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차이는 느껴졌습니다.”
민호는 당구대 위의 공을 정리하는 태성을 도왔다. 공을 하나씩 모으면서 오늘의 게임을 떠올렸다. 이긴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공이 몇 개 있었다. 반대로 실패한 공도 왜 실패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구장 문을 나서기 전, 민호는 휴대전화의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 회사에서 배운 것은 답을 기다리는 대신 질문을 구체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당구장에서 배운 것은 상대의 의도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눈앞의 상황을 차분히 살피는 일이었다.
두 가지는 서로 달라 보였지만, 자신이 짐작한 것을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었다.
민호는 수첩에 문장을 적었다.
묻지 않은 답을 혼자 만들어 놓지 말 것.
그리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판단은 분명하게 하되, 틀렸을 가능성까지 열어 둘 것.
그는 수첩을 덮었다.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당구 실력이 언제쯤 눈에 띄게 좋아질지도 알 수 없었다. 아들과의 관계 역시 한두 번의 대화로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답을 미리 알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확인하고, 직접 해 볼 수 있는 것은 해 보고, 결과가 예상과 다르면 그 이유를 다시 살피면 되었다.
민호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내일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적어도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몇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지난주와는 조금 다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