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의 계략
by Heo Gyun · 2026-10-03
‘의병장 홍길동은 삼가 율도왕 좌하에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란 한 사람이 오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탕은 하나라 걸왕을 치고,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내쳤습니다. 모두 백성을 위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은 일입니다.’
‘이제 의병 이십만을 거느리고 칠십여 성의 항복을 받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왕께서 이 큰 형세를 감당할 수 있거든 자웅을 겨루시고, 형세가 다하였거든 일찍 항복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십시오.’
그러고는 달래는 말을 덧붙였다.
‘백성을 위하여 속히 항복 문서를 올리시면, 한 지방의 벼슬을 내려 종묘사직이 끊기지 않게 하겠습니다.’
한편 율도왕은 난데없이 이름 없는 도적이 일흔 남짓한 고을의 항복을 받았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가는 곳마다 맞설 자가 없어 끝내 도성까지 위협하니, 지혜로운 신하들도 계책을 내지 못했다.
그런 판에 격문까지 들이닥치자 조정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성 전체가 술렁였다.
신하들이 의논했다.
“지금 도적의 큰 형세는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싸우지 말고 도성을 굳게 지키면서, 기병을 보내 저들의 군량 나르는 길을 끊으십시오.”
“그러면 적병은 나아가 싸우지도, 물러갈 길도 없게 됩니다. 몇 달이 못 되어 적장의 머리가 성문에 걸릴 것입니다.”
의논이 분분하던 차에 수문장이 급히 아뢰었다. “적병이 벌써 도성 십 리 밖에 진을 쳤나이다!”
율도왕은 크게 노하여 정예병 십만을 일으키고 친히 대장이 되었다. 삼군을 재촉해 호수를 막고 진을 쳤다.
이때 길동은 지형을 살핀 뒤 여러 장수와 의논했다. “내일 정오면 율도왕을 사로잡을 것이니, 군령을 어기지 말라.”
그러고는 장수들에게 차례로 명을 내렸다. 먼저 삼호걸을 불렀다.
“그대는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양관 남쪽에 매복했다가, 호령이 떨어지면 이러이러하게 하라.”
다음으로 후군장 김인수를 불렀다. “그대는 군사 이만을 거느리고 양관 오른쪽에 매복했다가, 호령이 떨어지면 이러이러하게 하라.”
또 좌선봉 맹충을 불렀다.
“그대는 철기 오천을 거느리고 율도왕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한 척하라. 왕을 꾀어 양관으로 달아나다가, 뒤쫓는 군사가 양관 어귀에 들어서거든 이러이러하게 하라.”
그러고는 대장기와 흰 깃털 장식 도끼를 내주었다.
이튿날 동틀 무렵, 맹충이 진문을 활짝 열고 대장기를 진 앞에 세운 뒤 외쳤다.
“무도한 율도왕이 감히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구나! 나를 당할 재주가 있거든 어서 나와 자웅을 겨루자!”
그러면서 진문 앞으로 내달아 솜씨를 뽐냈다.
적진의 선봉 한석이 말을 몰아 우렁차게 나섰다.
“너희는 어떤 도적이기에 하늘의 위엄도 모르고 태평한 시절을 어지럽히느냐? 오늘 너희를 사로잡아 민심을 가라앉히겠다!”
말이 끝나자 두 장수가 맞붙었다. 몇 합이 지나기도 전에 맹충의 칼이 번뜩이더니 한석의 머리를 베어 들었다.
맹충은 좌충우돌하며 외쳤다. “율도왕은 죄 없는 장졸을 상하게 하지 말고 어서 나와 항복해 남은 목숨을 보전하라!”
선봉이 패하는 것을 본 율도왕은 분을 이기지 못했다. 녹색 전포에 구름무늬 갑옷을 걸치고 자줏빛 금투구를 썼다. 왼손에 방천극을 들고 천리마를 몰아 진 앞에 나섰다.
“적장은 잔말 말고 내 창을 받아라!”
율도왕은 곧장 맹충에게 달려들었다. 십여 합이 지나자 맹충이 밀리듯 말 머리를 돌려 양관으로 달아났다.
율도왕이 꾸짖었다. “적장은 달아나지 말고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러고는 말을 재촉해 맹충을 쫓아 양관으로 향했다.
골짜기 어귀에 들어서자 적장은 무기를 버리고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율도왕은 무슨 계략이 있나 의심하다가 말했다.
“네게 아무리 간사한 꾀가 있다 한들 내 어찌 겁내겠느냐.”
그러고는 군사를 호령하여 급히 뒤쫓았다.
이때 길동은 장대에 올라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율도왕이 양관 어귀에 들어선 것을 알자, 신병 오천을 호령해 대군과 합세하고 양관 어귀에 팔진을 쳐 돌아갈 길을 막았다.
율도왕이 적장을 쫓아 골짜기에 들어서자 대포 소리가 울렸다. 사방에서 복병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비바람 같았다.
율도왕은 꾐에 빠져 포위된 것을 깨닫고, 형세가 다하자 군사를 돌려 빠져나왔다. 그러나 양관 어귀에 이르니 길동의 대군이 진을 치고 길을 막았고, 항복하라는 외침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율도왕은 힘을 다해 진문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문득 비바람이 크게 일고 천둥과 벼락이 진동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어 군사들은 크게 어지러워 갈 바를 몰랐다.
길동은 신병을 호령해 적장과 군졸을 한꺼번에 결박했다.
율도왕은 크게 놀라 급히 헤쳐 나가려 했지만, 팔진을 어찌 벗어나겠는가. 필마단창으로 동서를 분간하지 못한 채 헤맸다.
여러 장수에게 결박하라 호령하는 길동의 목소리가 서릿발 같았다.
율도왕이 사방을 둘러보니 따르는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