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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언

by Heo Gyun · 2026-10-03

한편 홍 승상은 나이 아흔에 이르러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

가을 구월 보름, 병세가 더욱 깊어지자 승상은 부인과 맏아들 길현을 불러 말했다.

“내 나이 아흔이니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길동은 비록 천한 첩에게서 났으나 내 피붙이다.”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임종에 얼굴조차 보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가 죽은 뒤에도 길동의 어미를 잘 대접해 편히 지내게 하라. 부디 뒷일을 생각해, 만일 길동이 돌아오거든 천한 종의 자식으로 여기지 말라. 한배에서 난 형제처럼 대하여 부모의 유언을 저버리지 말라.”

그러고는 길동의 어미를 불러 가까이 앉히고,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잊지 못하는 것은, 길동이 나간 뒤로 소식이 끊겨 생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도 이토록 간절한데 네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

“길동은 녹록한 인물이 아니다. 살아 있다면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부디 몸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보전하여라. 내 저승에 가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

말을 마치자 승상은 곧 숨을 거두었다.

부인은 기절하고 집안사람들도 망극하여 곡소리가 온 집 안을 울렸다. 길현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비 오듯 쏟았다.

그러면서도 부인을 붙들어 위로하고 진정시킨 뒤, 예법에 따라 초상을 극진히 치렀다.

길동의 어미는 더욱 애통해하니, 그 모습이 애처로워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졸곡을 마친 뒤 명당을 구해 장사를 지내려 했다. 곳곳에 사람을 보내고 여러 지관을 데리고 사방으로 산자리를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근심이 깊었다.

그때 길동이 서강에 닿아 배에서 내린 뒤 승상 댁으로 향했다. 그는 곧장 승상의 영위 앞으로 들어가 엎드려 통곡했다.

상주가 자세히 보니 바로 길동이었다. 길현은 한바탕 통곡한 뒤 길동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부인께 아뢰었다.

부인은 놀랍고도 반가워 길동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네가 어려서 집을 떠나 이제야 돌아오니, 지난 일을 생각하면 도리어 부끄럽구나. 그런데 그 삼사 년 동안은 종적을 아주 끊고 어디에 있었느냐?”

“대감께서 임종하실 때 이러저러한 말씀을 남기시며 끝내 너를 잊지 못하고 가셨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길동의 어미를 불렀다. 길동이 왔다는 말에 어미가 급히 들어와 모자가 마주하니, 둘 다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길동은 부인과 어머니를 위로한 뒤 형에게 말했다.

“제가 그동안 산중에 숨어 지내며 지리를 깊이 공부했습니다. 대감의 산소로 정해 둔 자리가 있는데, 혹시 이미 정하신 곳이 있으신지요?”

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반가워하며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식구들이 모여 밤새도록 회포를 풀었다.

이튿날 길동은 형을 모시고 한곳에 이르러 손으로 가리켰다. “이곳이 제가 정한 자리입니다.”

길현이 사방을 둘러보니 겹겹의 바위가 험하고, 오래된 무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말했다.

“아우의 높은 소견은 모르겠으나, 나는 이곳에 모실 생각이 없다. 다른 땅을 골라 보아라.”

길동이 짐짓 탄식했다. “이 땅이 비록 이러해도 대대로 정승과 장군이 날 자리입니다. 형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니 안타깝습니다.”

그러고는 도끼를 들어 땅을 몇 자 파냈다. 그러자 오색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푸른 학 한 쌍이 날아올랐다.

형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뉘우쳐 길동의 손을 잡았다.

“못난 형의 소견 탓에 저런 큰 땅을 잃었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느냐. 혹시 다른 땅은 없겠느냐?”

길동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