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멍청이
지은이 외인 · 2026-08-21
절벽까지 하루 반이 걸렸다.
가는 동안 기훈은 계속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론: 보기만 하는 거다.
아론: ......
아론: 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오는 거다.
아론: ......
아론: 애초에 갈 것도 없어. 가다가 아니면 중간에 돌아와도 돼.
기훈은 그 말을 여섯 번 했다.
여섯 번 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멈췄다.
첫날 밤에 기훈은 남쪽 하늘을 봤다.
붉었다.
해가 진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 남쪽 아래가 붉었다.
불이었다.
성 앞에서 뭔가가 타고 있었다.
기훈은 그것을 한참 봤다.
그리고 땅에 나뭇가지로 일정을 적었다.
'1일. 친해진다.'
'2일. 탄다.'
'3일. 간다.'
기훈은 그 세 줄을 읽고 만족했다.
이 일정표는 다음 날 저녁에 지워진다.
절벽은 컸다.
산의 북쪽 면이 통째로 잘려 있었다. 아래는 안개였고 안개 밑에 뭐가 있는지는 안 보였다.
기훈은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봤다.
'.......'
그리고 세 걸음 물러났다.
다시 봤다.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둥지는 절벽 중턱에 있었다.
절벽이 안으로 파인 자리였다. 나뭇가지와 뼈가 쌓여 있었다.
뼈가 많았다.
기훈은 그중 몇 개가 좀 길다고 생각했다.
'.......'
'짐승 뼈겠지.'
기훈은 그렇게 정리했다.
정리하고 나서 그 뼈를 한 번 더 봤다.
새끼가 세 마리 있었다.
크기는 개만 했다. 큰 개였다.
셋 다 목이 길고 계속 서로를 물었다. 물다가 하나가 밀려서 둥지 가장자리까지 갔다가 다시 기어 올라왔다.
기훈은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귀엽네.'
그때 그늘이 왔다.
기훈은 위를 봤다.
기훈이 그다음에 한 일은 바위 틈으로 몸을 접어 넣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한 게 아니었다.
몸이 먼저 했다.
어미가 내려왔다.
날개 폭이 십 미터쯤이었다. 그게 절벽 앞을 지나갈 때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쳤다. 기훈이 엎드린 자리의 흙이 날렸다.
부리가 창처럼 뾰족했고 그 안이 붉었다.
발톱에 사슴이 물려 있었다.
정확히는 사슴이었던 것이 물려 있었다.
어미가 둥지에 앉았다.
앉는 순간 절벽이 조금 울렸다.
새끼 셋이 달려들었다.
어미가 목을 세우고 울었다.
소리가 높았다. 너무 높아서 귀가 아팠다.
기훈은 바위 틈에서 안 나왔다.
한 시간을 안 나왔다.
그 한 시간 동안 아론의 기억이 뭔가를 내놓았다.
'와이번은 시력이 매우 좋다.'
'.......'
'특히 움직이는 것을.'
기훈은 숨도 안 쉬었다.
한 시간 뒤에 기훈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확인한 것은 자기 바지였다.
'.......'
젖지 않았다.
기훈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일정표를 봤다.
'1일. 친해진다.'
기훈은 그것을 발로 지웠다.
새 일정표를 적었다.
'1일. 안 죽는다.'
기훈은 그날 오후에 어미가 나가는 것을 봤다.
해가 절벽 위로 올라온 다음이었다.
돌아온 것은 반나절 뒤였다.
기훈은 그 두 번을 세었다.
두 번밖에 못 셌다.
세 번째를 볼 시간이 없었다.
밤에 다시 남쪽을 봤다.
또 붉었다.
어제보다 조금 밝았다.
기훈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2일째 아침에 기훈은 절벽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있었다. 좋은 길은 아니었다. 발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턱이 이어져 있었고 그게 중간에 두 번 끊겼다.
기훈은 첫 번째 끊긴 데 앞에서 십 분을 서 있었다.
아론: 할 수 있어.
아론: ......
아론: 이 정도는 뛰었어. 늑대 피할 때 더 뛰었어.
아론: ......
아론: 그때는 밑에 땅이 있었지.
기훈은 그 말을 자기가 왜 했는지 후회했다.
뛰었다.
넘어갔다.
넘어가서 기훈은 바위를 두 팔로 껴안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두 번째는 안 무서웠다.
거짓말이었다.
둥지 가장자리에 올라섰을 때 새끼 셋이 동시에 그를 봤다.
기훈이 손을 들었다.
아론: 안녕.
셋이 동시에 울었다.
기훈은 그날 다섯 군데를 물렸다.
올라와서 팔뚝을 봤다.
이빨 자국이 반원으로 나 있었다. 피가 났다.
'.......'
기훈은 그것을 천으로 묶으면서 생각했다.
'고기.'
고기를 구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오우거를 잡은 자리 근처에 오크 시체가 아직 있었다.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기훈은 그것을 잘라서 자루에 넣었다. 넣으면서 냄새를 맡았고, 맡고 나서 나무에 손을 짚고 잠깐 서 있었다.
'.......'
기훈은 자기 인생에 대해 아주 짧게 생각했다.
돌아와서 다시 내려갔다.
둥지에 던졌다.
작은 놈 둘이 먼저 달려들었다.
제일 큰 놈은 안 왔다.
기훈이 하나를 더 던졌다.
큰 놈이 목을 폈다.
기훈이 세 번째를 던졌다.
큰 놈이 왔다.
기훈은 그놈이 먹는 것을 봤다.
셋 중에 제일 컸고 제일 굼떴다.
'너다.'
밤에 또 남쪽을 봤다.
붉었다.
기훈은 일정표를 지웠다.
새로 적었다.
'2일. 탄다.'
3일째에 기훈은 여덟 번 시도했다.
첫 번째는 등이었다.
기훈이 큰 놈의 등에 손을 얹었다.
큰 놈이 가만있었다.
기훈이 다리를 넘겼다.
큰 놈이 가만있었다.
기훈이 앉았다.
기훈은 그다음 삼 초를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둥지 반대편에 처박혀 있었고 뼈 무더기가 등에 배기고 있었다.
큰 놈이 그를 보고 있었다.
와이번은 표정이 없다.
그런데 기훈은 그게 어이없어하는 얼굴이라고 확신했다.
두 번째는 목이었다. 물렸다.
세 번째는 옆에서 뛰어올랐다. 옆으로 굴렀다.
네 번째는 먹고 있을 때였다. 먹던 걸 놓고 그를 밀었다.
먹던 걸 놓았다는 게 기훈은 좀 서운했다.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세부적으로 다를 뿐 결과가 같았다.
여덟 번째가 끝나고 기훈은 둥지에 앉았다.
큰 놈도 앉아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론: 야.
기훈이 말했다.
아론: 내가 너 밥을 얼마나 줬냐.
큰 놈이 앞을 봤다.
아론: 저 밑에서 저걸 잘라서 여기까지 들고 왔어. 냄새 나지? 내 손에서 아직도 나.
아론: ......
아론: 근데 한 번 태워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큰 놈이 목을 긁었다.
기훈은 아론의 기억에 물었다.
'와이번 타는 법.'
'없음.'
'길들이는 법.'
'없음.'
'뭐라도.'
'와이번의 위액은 뼈를 녹인다.'
'.......'
'섭취 후 두 시간 내에.'
아론: 됐어.
그날 밤에 기훈은 남쪽을 안 봤다.
안 보려고 했는데 결국 봤다.
붉었다.
기훈은 일정표 앞에 앉았다.
'2일. 탄다.'
지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적었다.
한참 있다가 한 줄 적었다.
'4일 남음.'
4일째 새벽에 기훈은 아주 나쁜 생각을 했다.
'같이 자면 되지 않나.'
논리는 이랬다.
짐승은 같이 자면 무리로 친다. 개도 그렇다. 개는 아론의 기억이 아니라 기훈이 알았다. 옆집 개가 그랬다.
그러니까 둥지에서 자면 된다.
기훈은 그 계획의 문제점을 하나 찾아냈다.
어미가 온다.
기훈은 그 문제점을 한참 봤다.
'.......'
'시간이 없다.'
기훈은 그것을 문제점의 해결로 쳤다.
그날 밤 기훈은 둥지 구석에서 뼈를 베고 누워 있었다.
옆에 큰 놈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감고 나서 삼 초 뒤에 떴다.
'.......'
'미쳤나.'
기훈은 그때 아주 정확하게 자기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지금 절벽 중턱 와이번 둥지에 누워 있었다.
주위에 뼈가 쌓여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좀 길었다.
그런데 안 일어났다.
일어나면 4일 남은 게 3일이 되기 때문이다.
기훈은 그 밤을 거기서 잤다.
정확히는 자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일곱 번쯤 떴다.
새벽에 큰 놈이 몸을 뒤척이면서 기훈 쪽으로 목을 뻗었다.
기훈이 굳었다.
큰 놈이 기훈의 머리 옆에 목을 얹었다.
그리고 다시 잤다.
기훈은 그 상태로 해가 뜰 때까지 있었다.
해가 뜨고 나서 기훈은 아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빠져나와서 절벽을 올라갔다.
올라가서 앉았다.
그리고 웃었다.
아론: 됐다.
되긴 뭐가 됐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5일째에 기훈은 줄을 만들었다.
칡을 걷고 나무껍질을 벗겨서 꼬았다.
'밧줄은 세 가닥이다.'
오 중사가 그랬다.
'두 가닥은 풀려.'
기훈은 세 가닥으로 꼬았다.
오 중사는 이걸 삼십 분 만에 했다.
기훈은 꼬면서 아론의 기억을 한 번 뒤졌다.
'.......'
아무것도 없었다.
'너는 밧줄도 안 배웠냐.'
첫 번째 것이 끊어졌다.
두 번째 것도 끊어졌다.
세 번째를 꼬는 중에 해가 졌다.
기훈은 그것을 손으로 당겨봤다.
당겨지긴 했다.
끊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표면이 매끄러웠다. 급하게 꼬아서 결이 안 물렸다.
'.......'
기훈은 그것을 한참 봤다.
'하루 더 꼬면 제대로 나온다.'
기훈은 남쪽을 봤다.
'.......'
기훈은 그 줄을 그냥 썼다.
이 결정이 다음 날 아침에 그를 죽일 뻔한다.
6일째 아침.
어미가 나갔다.
기훈이 내려갔다.
계획은 있었다.
아주 작았다.
'목에 걸어만 놓자.'
걸어놓고 오늘 하루 익숙해지게 하고, 내일 아침에 당겨본다.
기훈은 그 순서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기훈이 합리적일 때는 대개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기훈이 줄을 던졌다.
큰 놈의 목에 걸렸다.
큰 놈이 몸을 한 번 털었다.
안 벗겨졌다.
아론: 오.
기훈이 말했다.
기훈은 그때 줄 끝을 자기 손목에 두 번 감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놓치면 또 하루였다.
큰 놈이 날개를 폈다.
요 며칠 계속 하던 짓이었다. 폈다 접었다 폈다 접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접지 않았다.
목을 앞으로 빼고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기훈이 그것을 봤다.
'.......'
'왜 저러지.'
기훈은 아론의 기억을 뒤졌다.
'이소기.'
'그게 뭔데.'
'둥지를 떠날 시기.'
큰 놈이 뛰었다.
기훈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맞다.'
손목이었다.
두 번 감았다.
세상이 뒤집혔다.
기훈은 소리를 질렀다.
아주 크게 질렀는데 그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귀를 막았다.
발밑이 없었다.
발밑에 천 미터가 있었다.
'미안해.'
기훈이 생각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누구한테 미안한지는 몰랐다.
'.......'
'아니 내가 왜 미안해.'
그때 줄이 미끄러졌다.
결이 안 물린 줄이었다.
목에서 위로 미끄러져서 머리 뒤에 걸렸다.
기훈의 몸이 앞으로 딸려 올라갔다.
그리고 기훈은 거꾸로 매달렸다.
와이번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기훈의 얼굴도 바로 앞에 있었다.
둘 다 거꾸로였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기훈은 그 상태에서 아침에 먹은 것을 게웠다.
게운 것이 아래로 안 갔다.
바람이 정면에서 왔기 때문이다.
기훈은 그때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 중 몇 개를 새로 냈다.
발버둥을 쳤다.
발이 뭔가를 찼다.
그게 와이번의 머리였다.
머리가 왼쪽으로 밀렸다.
몸이 왼쪽으로 돌았다.
'.......'
기훈이 멈췄다.
거꾸로 매달린 채로 멈췄다.
기훈이 다시 밀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을 밀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돌았다.
'머리네.'
기훈은 그 순간 자기가 발견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무가 오고 있었다.
착륙은 없었다.
착륙이라는 개념이 그 와이번에게 없었다.
와이번은 숲으로 갔고, 나무 꼭대기를 몇 개 부러뜨렸고, 그다음에 땅에 닿았고, 닿고 나서도 이십 미터쯤 갔다.
기훈은 그 이십 미터 중간에 떨어져 나갔다.
기훈은 흙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한참 그러고 있었다.
목소리가 하나 났다.
'떨어질 때는 턱 당기고 옆으로.'
김 관장이었다.
'등으로 받고 팔로 쳐. 얼굴부터 가면 안 돼.'
기훈은 흙에 얼굴을 박은 채로 말했다.
아론: ......지금요?
기훈은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움직였다.
발가락도 움직였다.
'.......'
기훈은 일어나 앉았다.
와이번이 십 미터쯤 앞에 있었다.
날개 하나가 몸 밑에 깔려 있었고, 목이 위로 올라와 있었고, 기훈을 보고 있었다.
기훈이 그를 봤다.
아론: ......야.
기훈이 말했다.
아론: 너 나는 거 처음이지.
와이번이 목을 옆으로 기울였다.
아론: 나도 처음이야.
기훈은 그 자리에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해가 두 개였다.
기훈은 방금 자기가 뭘 했는지 순서대로 짚어봤다.
절벽에서 떨어졌다.
손목이 감겨 있었다.
줄이 미끄러졌다.
거꾸로 매달렸다.
토했다.
발로 머리를 찼다.
'.......'
계획의 어느 부분에도 없었다.
기훈은 웃었다.
한참 웃었다.
웃다가 갈비뼈가 아파서 멈췄다.
멈추고 나서 해를 봤다.
아직 아침이었다.
6일째 아침이었다.
기훈은 벌떡 일어났다.
이름을 붙이는 데 삼십 초를 썼다.
기훈은 아론의 기억에서 용의 이름을 뒤졌다.
'파르티엔.'
'로벨리아드.'
'세르노비스.'
기훈이 그 이름들을 소리 내어 불러봤다.
그동안 와이번은 깔린 날개를 빼내려고 하고 있었다.
빼내다가 자기 꼬리를 밟았다.
밟고 놀라서 뛰었다.
뛰다가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기훈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아론: 멍청아.
와이번이 그를 봤다.
아론: ......
기훈이 잠깐 조용했다.
아론: 멍청이.
시간이 없어서 무르지도 못했다.
훈련은 하루 반이었다.
6일째 낮에 다섯 번 날았다.
다섯 번 다 처박혔다.
기훈은 그 다섯 번 사이에 멍청이를 두 번 굶겼다.
굶긴 게 아니라 밥 줄 시간이 없었다.
멍청이는 그것을 훈련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조종은 두 가지였다.
머리를 미는 것과 눈을 가리는 것.
왼쪽 눈을 가리면 오른쪽으로 돌았다.
양쪽을 다 가리면 멍청이가 미쳐서 아무 데로나 갔다.
기훈은 그걸 딱 한 번 해봤다.
그 한 번에 둘은 호수에 빠졌다.
기훈은 물속에서 멍청이의 다리를 붙잡고 올라왔고, 올라와서 둘 다 물가에 엎어져 있었다.
멍청이가 물을 토했다.
기훈도 물을 토했다.
아론: ......
기훈이 멍청이를 봤다.
아론: 내가 잘못했다.
6일째 저녁에 어미가 왔다.
기훈은 소리를 먼저 들었다.
높은 소리였다. 귀가 아픈 소리였다.
기훈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멍청이 쪽으로 뛰었다.
멍청이가 목을 폈다.
목을 펴고 입을 벌리려고 했다.
기훈이 두 손으로 그 부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