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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은빛과 험험

지은이 외인 · 2026-08-21

45일째에 기훈은 계곡을 찾았다.

물이 맑았고 소리가 좋았다. 위쪽에 작은 폭포가 있어서 그 아래가 웅덩이처럼 파여 있었다.

기훈은 옷을 벗어 바위에 널고 물에 들어갔다.

차가웠다.

'.......하.'

거미에서 나온 것이 아직도 냄새가 났다. 3일 전 일인데 안 빠졌다.

기훈은 한참을 물에 있었다.

이제 이 산이 조금은 읽혔다.

물소리 사이로 새소리가 섞이면 근처에 큰 것이 없다는 뜻이다. 새가 조용하면 뭔가 있는 것이다. 바람이 한 방향으로만 불면 그쪽에 트인 곳이 있고, 나무 아래가 유독 어두우면 뭔가 살고 있다.

기훈의 귀는 이제 백 미터 밖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못 들었다.

물에서 나와 바위 쪽으로 갔을 때 거기 둘이 앉아 있었다.

기훈은 그 자리에 섰다.

정확히는 굳었다.

옷은 저쪽 바위 위에 있었다.

'.......'

둘 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에서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목소리가 나긋했다.

키가 컸다.

기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런데 마른 게 아니라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은색 머리가 등까지 내려왔고 귀가 길고 뾰족했다. 등에 활을 메고 있었는데 그게 사람 키만 했다.

여자였다.

'.......'

기훈은 그 사실을 확인하는 데 이 초쯤 썼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아무것도 안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일 초를 더 썼다.

옆에 있는 것은 반대였다.

기훈의 가슴께밖에 안 왔다. 대신 옆으로 넓었다.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고 그 수염을 세 가닥으로 땋았다. 팔뚝이 기훈의 허벅지만 했다.

아론의 기억이 터졌다.

엘프.

드워프.

그리고 그 뒤에 정보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엘프는 대륙 서쪽 깊은 숲에 산다. 도시에서 간혹 보이지만 야생 엘프는 다르다. 훨씬 크고 강하다. 인간 마법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드워프는 지하에 산다. 손재주가 대륙 최고다. 드워프가 만든 무구는 성 한 채와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둘은 원수지간이다.

같이 다니는 일은 없다.

절대로 없다.

'.......'

기훈은 그 정보를 다 읽고 나서 한 가지만 생각했다.

'옷 좀 입자.'

기훈이 바위 쪽으로 갔다.

가면서 몸을 옆으로 틀었다.

틀고 나서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캔젤트: 험.

드워프가 말했다.

캔젤트: 험. 험.

아론: ......

캔젤트: 자네 뒤에 있네.

옷은 반대쪽 바위에 있었다.

기훈은 그쪽으로 갔다.

가는 동안 엘프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주 성실하게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훈은 그게 더 부끄러웠다.

옷을 입고 나서 기훈은 바위에 앉았다.

셋이 나란히 앉은 모양새가 됐다.

에서스: 이 산에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엘프가 말했다.

에서스: 에서스라고 합니다.

캔젤트: 험.

드워프가 그렇게 말했다.

기훈이 그쪽을 봤다.

캔젤트: 험.

또 그랬다.

캔젤트: 켄젤트요.

'.......'

기훈은 잠깐 그 이름을 곱씹었다.

아론: 아론입니다.

말하고 나서 기훈은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한 달 반 만에 처음으로 남에게 한 말이었다.

에서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에서스가 물었다.

아론: 동쪽이요.

에서스: 동쪽에는 쎄톤이 있습니다.

아론: 거기 갑니다.

캔젤트: 험.

켄젤트가 말했다.

캔젤트: 거기까지 걸어서 갈 생각인가.

아론: 네.

캔젤트: 험. 험.

켄젤트가 수염을 쓸었다.

캔젤트: 이 산을 걸어서 넘겠다고?

아론: 이미 절반은 왔는데요.

에서스와 켄젤트가 서로를 봤다.

그리고 다시 기훈을 봤다.

캔젤트: 험. 참으로 놀랍구만.

기훈은 물었다.

아론: 두 분은 왜 같이 다니세요?

물어놓고 기훈은 그게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론의 기억이 그렇다고 했다. 엘프와 드워프 사이의 일은 인간이 물을 것이 아니다.

에서스가 잠깐 침묵했다.

에서스: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론: 누구한테요?

에서스: 로드께서.

'.......'

기훈은 그 단어를 아론의 기억에서 찾았다.

로드.

드래곤로드.

골드드래곤 화이온메스.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것. 콘티넨탈 프로텍터라고 불린다. 어둠의 대륙과 몬스터로부터 빛의 대륙을 지킨다.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기훈은 그 이상 관심이 없었다.

아론: 아.

기훈이 말했다.

아론: 그렇군요.

에서스가 그를 봤다.

에서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아론: 놀라야 하나요?

에서스: 보통은 놀랍니다.

에서스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조금 웃었다. 웃는 것도 나긋했다.

에서스: 드래곤로드는 잠을 자지도, 여행을 하지도 않습니다.

아론: 네.

에서스: 천 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아론: 네.

에서스: 그런데 부르셨습니다.

기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물었다.

아론: 그게 왜 이상한 건데요?

에서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켄젤트가 말했다.

켄젤트: 험. 자네 드래곤이 뭔지는 아나.

아론: 압니다.

기훈에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켄젤트가 조금 무안해졌다.

켄젤트: 험. 그럼 됐네.

'.......'

기훈은 그게 대답인가 싶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다.

에서스가 손을 들었다.

에서스: 실례하겠습니다.

아론: 뭘요?

에서스: 냄새가 좀.

'.......'

기훈은 잠깐 부끄러웠다.

에서스가 손짓을 하며 짧게 뭐라고 했다. 한 마디였다. 아론의 기억에도 없는 말이었다.

기훈은 그것을 봤다.

빛 같은 것이 손끝에서 흘렀다. 그리고 공기가 잠깐 흔들렸다.

'.......'

마법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론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인즈에서 마법학 개론을 배웠지만 실물은 궁정에서 한두 번 멀리서 봤을 뿐이다.

기훈은 자기 옷을 봤다.

여전히 더러웠다.

에서스도 그것을 봤다.

에서스: ......?

에서스가 다시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했다.

빛이 다시 흘렀다.

기훈의 옷은 여전히 더러웠다.

에서스가 자기 손을 봤다.

그리고 옆에 있는 바위에 손짓을 했다.

바위에 붙어 있던 이끼가 사라졌다.

캔젤트: ......험?

켄젤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에서스가 다시 기훈에게 손짓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훈은 그 광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뭐지.'

에서스: 팔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에서스가 말했다.

기훈은 왼팔을 내밀었다. 3일 전에 거미 다리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이미 딱지가 앉았다.

에서스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뭐라고 했다.

기훈은 아무것도 못 느꼈다.

정확히는 손이 따뜻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느꼈다.

에서스가 손을 뗐다.

상처는 그대로였다.

에서스: ......

에서스가 이번에는 자기 손등을 조금 긁었다. 피가 났다. 그리고 거기에 손을 얹고 뭐라고 했다.

피가 멈추고 자국이 사라졌다.

에서스는 그것을 한참 봤다.

그리고 기훈을 봤다.

에서스: 다른 인간분들도 이런가요.

아론: 아니요.

기훈이 대답했다.

아론: 그럴 리가요.

기훈은 아론의 기억을 뒤졌다.

마법이 안 통하는 인간에 관한 기록.

없었다.

마법 저항이라는 개념은 있었다. 특정 마법에 대해 저항력을 가진 몬스터가 있고, 특수한 아티팩트로 방어할 수도 있다. 그건 있었다.

그런데 마법이 그냥 지나가는 인간은 없었다.

'.......'

기훈은 그것을 잠깐 생각하다가 접었다.

이유를 모르는 일이 이번 달에만 다섯 개쯤 생겼다. 하나 더 늘어난 것뿐이다.

'좋은 거니까.'

기훈은 그렇게 정리했다.

에서스는 그렇게 정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캔젤트: 험.

켄젤트가 화제를 돌렸다.

캔젤트: 자네 그건 뭔가.

아론: 뭐가요?

캔젤트: 어제 말일세. 험. 나무 위에서 그 큰 거미를 발로 찼지 않은가.

'.......'

기훈은 잠깐 멈췄다.

아론: 보셨어요?

캔젤트: 험. 봤네.

아론: 어제부터 보셨어요?

캔젤트: 험. 험.

켄젤트가 수염을 쓸었다. 대답은 안 했다.

기훈은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캔젤트: 어찌 발을 손보다 잘 쓰는가.

켄젤트가 물었다.

캔젤트: 인간의 격투술 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네. 험. 검을 쓰는 자들은 발을 쓰지 않지. 발은 땅을 딛는 데 쓰는 것이니까.

아론: 저쪽에서는 다들 그렇게 합니다.

캔젤트: 저쪽?

'.......'

기훈은 말을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아론: 멀리서요.

캔젤트: 험. 어디.

아론: 아주 멀리서요.

켄젤트가 그를 봤다.

에서스도 그를 봤다.

기훈은 물을 봤다.

캔젤트: 험.

한참 뒤에 켄젤트가 말했다.

캔젤트: 자네, 손을 좀 보여주게.

기훈이 손을 내밀었다.

켄젤트가 그것을 잡았다. 손이 두껍고 딱딱했다. 사람 손 같지 않았다.

캔젤트: 험. 험.

켄젤트가 기훈의 손가락을 하나씩 눌러봤다. 그리고 손목을 돌려봤다. 팔꿈치까지 만졌다.

캔젤트: 뼈가 곱군.

아론: 네.

캔젤트: 근육도 얇고.

아론: 네.

캔젤트: 험. 그런데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지?

아론: 모릅니다.

캔젤트: 모른다고?

아론: 네.

켄젤트가 기훈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기 자루를 뒤졌다.

켄젤트가 꺼낸 것은 장갑이었다.

정확히는 장갑이 아니었다.

손등부터 팔뚝 중간까지 덮는 것이었고, 금속판이 겹쳐서 붙어 있었다. 검은색인데 빛을 받으면 안쪽이 푸르게 보였다.

건틀릿이었다.

캔젤트: 껴보게.

기훈이 그것을 꼈다.

가벼웠다.

아론: 어.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는데 걸리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캔젤트: 험. 맞는군.

아론: 이거 좋네요.

캔젤트: 험. 험.

켄젤트가 수염을 쓸었다. 조금 웃는 것 같았다.

캔젤트: 주겠네.

아론: 네?

캔젤트: 갖게.

기훈은 그것을 봤다.

아론: 이거 비싼 거 아니에요?

캔젤트: 험.

켄젤트가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에서스가 조용히 말했다.

에서스: 성 한 채와 바꾸기도 합니다.

'.......'

기훈은 손을 들어 건틀릿을 다시 봤다.

아론: 어, 그럼.

기훈이 그것을 벗으려 했다.

켄젤트가 손을 저었다.

캔젤트: 험. 이 사람이.

아론: 아니, 이런 걸.

캔젤트: 드워프가 준 걸 물리면 어찌 되는지 아나.

아론: 모릅니다.

캔젤트: 험. 나도 모르네.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

기훈은 잠깐 켄젤트를 봤다.

그리고 손을 내렸다.

아론: 고맙습니다.

캔젤트: 험.

켄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캔젤트: 자네 손이 곱길래.

해가 기울었다.

에서스가 일어섰다.

에서스: 가야 합니다.

아론: 어디로요?

에서스: 북쪽으로.

아론: 거기 뭐 있는데요?

에서스가 잠깐 그를 봤다.

에서스: 모릅니다.

아론: 모르는데 가요?

에서스: 부름을 받았으니까요.

기훈은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남의 사정이었다.

켄젤트도 일어섰다. 일어서니 더 작아 보였다.

캔젤트: 험. 인간.

아론: 네.

캔젤트: 동쪽으로 3일을 더 가면 봉우리가 하나 있네. 거기서는 산 아래가 보일 걸세.

아론: 고맙습니다.

캔젤트: 험. 험.

켄젤트가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말했다.

캔젤트: 내 우리 드워프가 아닌 것이 자네처럼 강한 것은 처음 보네.

'.......'

기훈은 그 말을 곱씹었다.

'꼭 그렇게 붙여야 하나.'

둘이 걸어갔다.

기훈은 바위에 앉아서 그것을 봤다.

에서스가 걷는 소리가 안 났다. 켄젤트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작았다.

숲 어귀에서 에서스가 멈췄다.

그리고 돌아봤다.

기훈이 손을 들었다.

에서스는 손을 들지 않았다.

한참 그를 보고 있었다.

기훈은 그 눈길이 뭘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기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자기 뒤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에서스: 아론님.

에서스가 말했다.

거리가 멀었는데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처럼 들렸다.

아론: 네.

에서스: 살아 계십시오.

기훈은 그게 인사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론: 네.

에서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기훈은 그날 밤 불을 피우고 건틀릿을 봤다.

가까이서 보니 판마다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아주 작았다. 눈을 가까이 대야 보이는 정도였다.

기훈은 그것을 한참 봤다.

'성 한 채라.'

성을 본 적은 없었다.

'.......'

기훈은 건틀릿을 낀 손으로 옆에 있는 돌을 쳐봤다.

돌이 깨졌다.

건틀릿은 멀쩡했다.

'오.'

기훈은 그날 밤 그것을 낀 채로 잤다.

에서스는 그날 밤 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켄젤트가 참다가 물었다.

캔젤트: 험. 왜 그러나.

에서스: 저 아이 말입니다.

캔젤트: 험. 강하더군. 인간치고는.

에서스: 그게 아닙니다.

에서스가 걸음을 멈췄다.

에서스: 제 마법이 닿지 않았습니다.

캔젤트: 험. 봤네.

에서스: 막힌 것이 아닙니다.

캔젤트: 험?

에서스: 막히면 부딪히는 느낌이 옵니다. 아티팩트로 막아도 그렇고 결계로 막아도 그렇습니다.

에서스가 자기 손바닥을 봤다.

에서스: 그런데 부딪히지 않았습니다.

캔젤트: 험. 그럼.

에서스: 비켜 갔습니다.

켄젤트가 걸음을 멈췄다.

에서스가 말을 이었다.

에서스: 마나가 그 아이를 피해 갔습니다.

캔젤트: ......험.

에서스: 저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둘은 한참 서 있었다.

캔젤트: 험. 로드께 여쭤보면 되지 않겠나.

에서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

에서스: 그러면 되겠지요.

그리고 다시 걸었다.

기훈은 그런 대화가 오간 줄 몰랐다.

그날 밤 그는 잘 잤다.

한 달 반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말을 했기 때문에 기분이 조금 좋았다.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랬다.

새벽에 잠깐 깼을 때 기훈은 건틀릿을 낀 손을 들어 달빛에 비춰봤다.

달이 두 개 떠 있었다.

'.......3일 뒤에 봉우리라고 했지.'

기훈은 다시 잠들었다.

3일 뒤에 그가 그 봉우리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지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