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개구멍
지은이 외인 · 2026-08-26
계곡은 숲 안쪽에 있었다.
좌우로 둔덕이 있고 사방이 나무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는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계곡 바닥에는 짚이 깔려 있었다.
전에 사냥왔을때 야영했던 자리였다.
기훈은 축 처진 어깨로 말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베드런이 그의 뺨을 쳤다.
"짝!"
어찌나 세개 첬는지 아론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기훈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으악!"
놀란 에라리온이 소리를 냈다.
그레온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베드런: 일어나.
기훈은 일어나지 않았다.
땅만 보고 있었다.
베드런: 정신 차려.
베드런이 말했다.
베드런: 여기가 왕궁인 줄 아냐.
아론: ......
베드런: 너를 죽이려는 놈이 있으면 그 놈을 먼저 죽여야 하는 거야.
아론: ......
베드런: 안 그러면 네가 죽어.
기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드런: 아론.
아론: ......
베드런: 아까 너는 주춤거리느라 삼 초를 늦었다.
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베드런이 그를 보고 있었다.
베드런: 삼 초였어.
아론: ......
베드런: 헤레이드가 그 삼 초에 죽었다.
그리고 베드런이 돌아섰다.
돌아서서 나무 쪽으로 갔다.
거기서 한참 서 있었다.
기훈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말은 자기한테 한 게 아니었다.
베드런도 우측을 못 봤다.
베드런이 말한 삼초는 기훈의 삼초일 수도 자기 자신의 삼초 일 수도 있었다.
그레온이 정찰을 갔다 왔다.
그레온: 따돌린 것 같습니다.
베드런: 확실한가.
그레온: 이 숲은 제가 압니다.
베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드런: 그레온.
그레온: 예.
베드런: 나하고 야산 언덕에 갔다 오자.
그레온: 예.
베드런: 성을 봐야겠다.
기훈이 일어섰다.
아론: 저도 가겠습니다.
베드런: 너는 여기 있어.
아론: 형님.
베드런: 에라리온 봐라.
베드런이 말을 끊었다.
베드런: 그건 명령이다.
둘이 갔다.
기훈과 에라리온이 남았다.
에라리온은 조용했다.
앉아서 무릎을 안고 있었다.
한 시간쯤 그러고 있다가 말했다.
에라리온: 형.
아론: 응.
에라리온: 헤레이드 아저씨요.
아론: ......
에라리온: 저 그 아저씨한테 활 배웠거든요.
아론: ......
에라리온: 근데 제가 재능이 없어서 세 번 하고 그만뒀어요.
기훈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에라리온: 그때 아저씨가 그랬어요.
아론: ......
에라리온: 너는 마법이 있으니까 됐다고.
에라리온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에라리온: 저 마법 못 쓰는데.
기훈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손을 뻗었다.
뻗어서 그 애의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한 번 쓸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할 말은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 *** ***
둘이 돌아온 것은 밤이었다.
베드런이 먼저 앉았다.
앉아서 물을 마셨다.
한참 마셨다.
에라리온: 대장님.
에라리온이 물었다.
에라리온: 성은요?
베드런이 물통을 내려놨다.
베드런: 모두 죽은 것 같다.
에라리온이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에라리온: ......예?
베드런: 모두 죽었다고.
에라리온: 모두라니요.
베드런: 모두.
베드런이 말했다.
베드런: 광장에 시체를 모아놓고 태우고 있었다.
아론: ......
베드런: 온종일 봤는데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에라리온이 일어섰다.
일어서서 성 쪽으로 갔다.
그레온이 그를 잡았다.
에라리온: 놔요.
그레온: 안 돼.
에라리온: 놓으라고요!
그레온: 에라리온.
에라리온: 스승님이!
그레온: 에라리온.
에라리온: 스승님이 거기 계신단 말이에요!
그레온이 그 애를 안았다.
에라리온이 그 팔 안에서 소리를 냈다.
소리가 아주 오래 갔다.
기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앉아 있었다.
'.......'
이름을 세고 있었다.
예순 두 개였다.
베드런이 그 옆에 앉았다.
베드런: 아론.
아론: 예.
베드런: 놈들은 정규군 복장으로 왔다.
아론: ......
베드런: 누가 그걸 의심하겠냐.
아론: ......
베드런: 성문을 열어줬을 거다.
기훈은 그 장면을 상상했다.
상상이 잘 됐다.
25일을 기다렸으니까.
성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왔을 것이다.
카린이 활을 등에 걸었을 것이다.
영주가 갑옷을 안 입고 나왔을 것이다.
에다가 의무실 문을 열어놨을 것이다.
'.......'
기훈은 상상을 멈췄다.
아론: 왜 태웁니까.
기훈이 물었다.
베드런: 뭘.
아론: 시체요.
베드런이 잠깐 조용했다.
베드런: 여기는 얼마 전에 오크가 왔던 데다.
아론: ......
베드런: 피 냄새가 나면 몬스터가 온다.
아론: ......
베드런: 태우면 안 온다.
기훈은 그 대답을 이해했다.
이해하고 나서 더 나빠졌다.
저들은 뒷정리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베드런: 그레온.
베드런이 불렀다.
그레온: 예.
베드런: 자네 생각은 뭔가.
그레온이 불을 봤다.
그레온: 공자님이 살아 계신 걸 알리면 안 되는 자들 같습니다.
베드런: ......
그레온: 그래서 아는 사람을 다 없앤 겁니다.
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론: 저 때문입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베드런이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베드런: 전서구가 문제였어.
아론: ......
베드런: 25일이면 왔어야 한다. 안 왔다.
아론: ......
베드런: 오크 때도 안 왔다.
베드런이 불에 나뭇가지를 넣었다.
베드런: 누군가 중간에서 뜯어봤다.
그날 밤에 아무도 제대로 못 잤다.
새벽에 베드런이 먼저 일어났다.
베드런: 일어나라. 출발한다.
셋이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깊이 잠든 사람이 없었다.
그레온: 어디로 갑니까.
그레온이 물었다.
베드런: 왕궁으로 간다.
기훈이 짐을 챙기다가 멈췄다.
아론: 이대로는 못 갑니다.
셋이 그를 봤다.
아론: 핏값을 받아야겠습니다.
베드런이 즉시 말했다.
베드런: 안 돼.
기훈이 그를 봤다.
아론: 형님.
베드런: 안 된다.
아론: ......
베드런: 적이 너무 많아. 우리는 넷이다.
베드런이 말했다.
베드런: 그중에 싸울 수 있는 건 셋이야.
아론: 셋이면.
베드런: 셋으로 오십을 어떻게 하냐.
기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그레온이 말했다.
그레온: 저는 떠돌이 용병이었습니다.
셋이 그를 봤다.
그레온은 불을 보고 있었다.
그레온: 아무도 못 믿었고 주위에 적 밖에 없었습니다.
아론: ......
그레온: 그런 저를 수비대에 넣어주고 집까지 구해준 게 헤레이드입니다.
그레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베드런을 봤다.
그레온: 헤레이드의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베드런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도 하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쎄톤성은 그가 자란 곳이었다.
일개 평민인 그를 믿음직스럽다며 수비대장으로 올려준 사람이 그 성의 영주였다.
성 안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람이었고 성 안의 모든 건물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베드런이 고개를 저었다.
젓고 나서 말했다.
베드런: 좋다.
아론: ......
베드런: 오늘 저녁에 들어간다.
베드런이 일어섰다.
베드런: 그전에 성을 살펴서 인원을 센다.
그리고 셋을 둘러봤다.
베드런: 제일 큰 문제는.
그레온: ......
베드런: 조용히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쎄톤성은 작았다.
작은 대신 견고했다.
몬스터가 자주 오는 곳이라 그렇게 지었다.
견고하다는게 이번에는 문제였다.
그레온: 성곽 오른쪽 아래에 개구멍이 있습니다.
그레온이 말했다.
베드런이 그를 봤다. 눈이 커져 있었다.
베드런: 뭐?
그레온: 사람 하나는 충분히 지나갑니다.
베드런: ......
그레온: 제가 압니다.
베드런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베드런: 내가 그걸 왜 모르지.
그레온: ......
베드런: 내가 이 성 수비대장이다.
그레온: ......
베드런: 십사 년째다.
그레온이 헛기침을 했다.
그레온: 험험.
베드런: 그레온.
그레온: 땡땡이치려고 뚫은 걸 상관한테 보고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베드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쁜넘들 이렇게 날 속여먹고 있었구나.
기훈이 웃었다.
웃고 나서 자기가 웃었다는게 왠지 미안했다.
죽은사람들에게도 미안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바로 웃음을 멈췄다.
그때였다.
에라리온: 저도 갑니다.
에라리온이었다.
베드런: 너는 안 된다.
베드런이 말했다.
베드런: 싸울 줄 모르잖아.
에라리온: 스크롤 있습니다.
아론: 뭐?
에라리온: 스승님 서재에요.
에라리온이 말했다.
에라리온: 거기 한 장 있습니다.
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론: ......한 장?
에라리온: 예.
에라리온: 공자님 드리려고 만드신 거요.
아론: ......
에라리온: 안 받으셨잖아요.
기훈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에라리온: 그거 화이어볼입니다.
에라리온이 말했다.
에라리온: 제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베드런: 서재가 어딘지 아나.
에라리온: 자기 집 서재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 예요.
베드런이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직 열일곱이었다.
아버지 같이 모시던 스승을 잃은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눈이 부어 있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던 수다도 뚝 그쳤다.
베드런: ......그래, 같이 가자.
에라리온: 예!
베드런: 대신 뒤에 있어.
에라리온: 예!
베드런: 에라리온.
에라리온: 예!
베드런: 숨 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