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부인전
지은이 장지연 · 2026-08-25
연설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약 원수는 군사를 불러 연설장으로 나아가 자리를 가지런히 잡고 식장을 꾸미게 했다.
연설장은 몹시 넓어 수십만 명은 넉넉히 들어설 만했다.
그 한가운데에 연단이 있었는데, 자연히 솟아오른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언덕 위에는 나무숲이 있어 푸른 가지가 하늘을 덮고, 짙은 그늘이 햇빛을 가렸다.
사방 어디에서나 바라보기 좋았다.
때는 오월이라 날씨가 마침 사람들이 나다니기에 알맞았다.
방청하러 온 남녀노소가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들판 가장자리까지 사람으로 성벽을 두른 듯했다.
이날 오전 열 시가 되자 원수가 연단에 올랐다.
사람들이 뒤엉켜 웅성거리는 소리로 사방이 시끄러울 때였다.
갑자기 대포 한 발이 터져 모든 귀를 깨웠고,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국기가 높이 걸리고,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계화관을 쓰고 몸에는 흰 금빛 겉옷을 걸쳤다.
손에는 깃발을 들었고, 붉은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며 비단 허리띠는 남풍에 나부꼈다.
보름달 빛과 구슬 광채처럼 찬란하게 연설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장내 수십만 사람의 눈빛이 모두 한 사람의 몸 위로 물 대듯 쏟아졌다.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저 여장군이 참으로 소문대로 신기하고 남다른 여자로구나.”
“평소에 꽃다운 이름을 여러 번 들으며 한번 보기를 소원했는데, 오늘에야 저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구나.”
“참으로 하늘 위의 사람이다. 세상에 어찌 저러한 인물이 또 있으랴.”
“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윽고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모두 귀를 기울여 연설 듣기를 서둘렀다.
원수가 깃발을 두르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옥을 깨뜨리는 듯 두 줄기로 뻗어 나가, 창자에 가득 찬 뜨거운 피를 공중에 토해 내는 듯했다.
“우리 프랑스의 동포 국민이 되신 뜻있는 여러분, 잠시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가 얼마나 위태롭고 쇠약한 지경입니까.”
“오늘날 어느 땅을 두고 프랑스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까.”
“북쪽의 모든 고을은 이미 영국에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남쪽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아리안 성 하나에 기대고 있을 뿐입니다.”
“그 한 성마저 머지않아 무너질 지경이니, 이 성을 잃으면 프랑스의 종사가 송두리째 멸망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우리 국민이 모두 남의 종과 소와 말이 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천하 만고에 가장 천하고 부끄럽고 욕된 것이 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한번 망하면 백성은 모두 종이 되고, 한번 종이 되면 평생 남의 구박과 억압을 받아 하늘을 볼 날이 없습니다.”
“재물과 살림도 끝내 남에게 빼앗기고, 조상의 무덤도 남의 손에 파헤쳐질 것입니다.”
“내 아내와 자식도 남에게 욕을 당할 것입니다.”
“이집트를 보십시오. 옛날에 유대 사람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다루었습니까.”
“이것이 모두 우리의 거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비록 이 지경이 되었으나, 여러 동포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떨쳐 일어나면 아직 한 가닥 살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다 종이 되고 땅을 다 빼앗긴 뒤에야 되찾기를 꾀한다면, 그때는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여러분께 묻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독립하고 자유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천하고 염치없는 남의 종이 되고자 합니까?”
이 말에 이르자 장내가 온통 고요해졌다.
그러다 사람들의 머리털이 하늘로 곤두서고 눈빛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결단코 아니 되겠소! 결단코 아니 되겠소!”
“우리가 어찌 남의 종이 되겠소!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종은 되지 않겠소!”
그 소리가 온 장내를 한목소리로 뒤흔들었다.
약 원수는 인심이 그렇듯 움직이고 열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상을 크게 치며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여러분이 이미 종이 되는 것을 부끄럽고 욕된 일로 아시니,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줄만 알고 씻어 낼 생각이 없다면, 모르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릇 세상 어느 나라 사람이든, 백성 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라에 원수와 부끄러움이 있으면, 그것이 곧 온 나라 백성의 원수요 부끄러움입니다.”
“또한 온 나라 사람이 함께 갚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름난 정치가가 말하기를, ‘모든 국민은 저마다 군사가 될 의무가 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으로 태어나 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면, 저마다 주권에 따르고 저마다 군사가 되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제 몸과 제 힘으로 제 목숨과 제 재산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부끄러움과 욕을 씻는 것은 곧 제 한 몸의 부끄러움과 욕을 씻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국민 된 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알아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하여 어떤 영웅호걸에게만 그 책임을 떠맡기고,”
“우리는 제 한 몸 편할 궁리만 하며 마음이 재가 되고 뜻이 식어, 그저 슬퍼하며 나라가 망하는 것을 한탄한들 무엇이 이롭겠습니까.”
“무슨 난리를 구하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또 어떤 사람은 염치를 잃고 욕을 참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적국에 항복하여,”
“남의 개돼지가 되기를 달갑게 여기니, 이보다 원통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무릇 나라의 흥망은 형세의 성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백성의 기운이 강한가 약한가에 달렸습니다.”
“고금의 역사를 보십시오.”
“한번 멸망한 나라 가운데, 천 년 백 년이 지나도록 그 백성이 다시 일어나 부끄러움을 씻은 일이 있습니까.”
“이런 증거가 뚜렷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한마음 한 힘으로 떨쳐 일어난다면, 어찌 부끄러움을 씻을 날이 없겠습니까.”
“나라의 위엄을 떨치고 나라의 원수를 갚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뜨거운 마음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여! 이미 남의 밑에 굽히지 않을 뜻이 있다면, 반드시 그 일을 해 보아야 참으로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어 위태로움이 아침저녁에 걸려 있습니다.”
“아리안 성을 한번 잃으면 우리나라는 결단코 보전하지 못합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의 부모와 처자가 반드시 남의 능욕을 당할 것이요,”
“여러분의 재산과 조상의 무덤이 반드시 남의 손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때에 이르러 남의 소와 말과 종이 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눈 없는 사람이 눈 없는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못가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한번 발을 헛디디면 목숨이 간 곳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까.”
“지금 당장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적국에 맞서지 않는다면, 이 부끄러움을 어느 때에 씻겠습니까.”
“어서, 어서 천 사람이 한마음이 되고 만 사람이 한목소리를 내십시오.”
“사람마다 죽을 뜻을 품고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히듯 한번 떨쳐 일어난다면,”
“영국이 아무리 하늘 같은 지략을 가졌다 한들, 우리나라가 어찌 적국에 눌리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여! 만약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다가 나라가 망할 때에 이르면,”
“남의 학대가 날로 심하여 사는 것이 도리어 죽어 모르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나는 본디 궁벽한 시골의 외롭고 잔약한 여자로, 재주도 학식도 없습니다.”
“다만 나라가 위태로움을 원통히 여겨 국민 된 한 사람의 의무를 다하려 할 뿐입니다.”
“차마 우리 국민이 남의 소와 말과 종이 되는 것을 볼 수 없어 이렇게 군중에 몸을 던졌습니다.”
“다행히 장군의 은덕으로 저의 뜻을 살펴 주시어 군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 자리에서 마주하며, 나는 결단코 맹세합니다.”
“이 몸으로 나랏일에 죽어 우리 국민을 지키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여! 이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과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기묘한 방책으로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약 원수는 연설을 미처 마치지 못하고 두 눈에서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한바탕 목 놓아 울었다.
방청하던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함께 슬퍼하며,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원수는 한낱 연약한 여자로서 저러한 애국의 열정이 있는데,”
“우리는 남자로 태어나 대장부라 하면서 도리어 여자만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꾸짖는 자, 한탄하는 자, 통곡하는 자가 있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손바닥을 비비며 살 뜻을 잃은 자들도 있었다.
이윽고 모두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오늘 맹세코 나라와 함께 죽겠다!”
“만약 나라가 망하면 우리도 단연코 살지 않겠다!”
그 순간 수많은 남녀가 술렁이며, 밀물이 밀려오듯 샘물이 솟아오르듯 애국의 열정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원수의 아래에서 군사가 되기를 자원하니, 그 형세가 몹시 컸다.
한 여자가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두드리자,
백만의 무리가 적국을 물리칠 기운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