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지은이 허균
한편.
함경감사는 능소의 불을 겨우 진압하고 감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창고를 지키던 군사들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달려와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도적들이 창고를 열고 군기와 곡식을 모조리 털어 갔습니다!”
순간 감사 얼굴이 굳어 버렸다.
“뭐라?”
그는 곧바로 사방으로 군사를 풀어 수색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적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뒤였다.
감사는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이 사건 역시 급히 조정에 장계로 보고되었다.
그날 밤.
산채로 돌아온 길동은 크게 잔치를 열었다.
도적들은 술을 마시며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길동은 술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순간 산채 안이 조용해졌다.
길동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엄숙했다.
“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재물을 털지 않는다.”
도적들 얼굴이 굳었다.
길동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탐관오리와 수령들.”
“그리고 백성을 괴롭혀 모은 재물만 빼앗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또한 그 재물로 굶주린 백성과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길동이 낮게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이름은 활빈당이다.”
순간 산채 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 명분을 가진 집단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길동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경감영 일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 종적을 잡지 못해 애먼 백성들이 많이 다칠 것이다.”
도적들이 조용히 길동을 바라보았다.
“내 죄 때문에 죄 없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한다면…”
길동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람은 몰라도 하늘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날 밤.
길동은 직접 감영 북문에 글을 써 붙이게 했다.
〈창고와 군기를 턴 자는 활빈당 장수 홍길동이다.〉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다.
며칠 뒤.
길동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팔자가 기구하여 집을 떠나 녹림에 몸을 담게 되었으나…’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본래 내 뜻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입신양명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구하고.
부모께 영화까지 안겨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천대받고 밀려난 끝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길동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큰 이름이라도 남기리라.’
그 후 길동은 초인 일곱을 만들어 냈다.
모두 길동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각각 오십 명씩 군사를 나누어 팔도로 흩어 보냈다.
조화술로 만든 분신들이었기에 진짜 길동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활빈당 군사들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그날 이후—
팔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활빈당은 곳곳에서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백성들을 괴롭히던 수령들의 뇌물을 탈취했고.
관아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몰래 환호했다.
하지만 관군들은 공포에 떨었다.
창고를 지키는 군사들은 밤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왜냐하면—
홍길동이 움직일 때마다 괴이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짙은 안개와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눈앞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혼란 속에서—
활빈당은 창고를 털고 사라졌다.
군사들이 손발을 묶인 채 발견되는 일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더 기이한 건—
활빈당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반드시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
〈활빈당 장수 홍길동〉
그 이름은 점점 전설처럼 퍼져 갔다.
결국 팔도 감사들이 동시에 장계를 올렸다.
조정 전체가 술렁였다.
왕은 장계를 읽고 크게 놀랐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각 도에서 보고된 사건 날짜가 모두 같았다는 것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전라도와 경상도, 함경도와 충청도에서 동시에 홍길동이 나타났다는 보고였다.
왕 얼굴이 굳었다.
“이럴 수가…”
조정 대신들 역시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왕은 전국에 교서를 내렸다.
“신분을 막론하고 홍길동을 잡는 자에게 천금을 내리겠다.”
그리고 암행어사들을 팔도로 보내 민심을 안정시키고 활빈당을 추포하게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직 홍길동 그림자조차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