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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지은이 한용운

순영은 숙자에게 더욱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은 기한 값을 돈으로만 계산해 준다 해도 평생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숙자는 아예 돈까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건 순영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순영은 숙자의 지나칠 만큼 너그러운 마음에 진심으로 감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숙자가 했던 대철 이야기도 자꾸 떠올랐다.

〈코가 조금 비뚤어져 간사해 보인다〉

〈나는 사람 얼굴 한번 보면 대강 안다〉

그 말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숙자 같은 여자라면 정말 사람을 잘못 볼 리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자기를 배려해 주는 사람이 괜히 결혼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험담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철에게 그런 흠이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코가 아주 조금 비뚤어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설령 코가 조금 비뚤어졌다 해서 마음까지 비뚤어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순영은 문득 자기 서모 생각이 났다.

서모는 코는 반듯했지만 속은 개차반이었다.

반대로 자기 이모는 코가 조금 비뚤어졌어도 마음은 무척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숙자 말은 더 설득력을 잃었다.

그리고 대철 얼굴이 간사해 보인다는 말 역시—

순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철은 언제나 사람을 부드럽게 대했다.

그 상냥한 태도를 잘못 보면 약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순영 눈에는 오히려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정말 속이 비뚤어진 사람이었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순영은 그날 원산 바다를 떠올렸다.

차가운 파도.

숨 막히던 공포.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오던 대철의 얼굴.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순영은 대철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장충단에서 점 보던 날까지 떠올랐다.

그 점쟁이가 했던 말.

〈가는 곳은 생문방이라… 자연히 붙들어 주는 사람이 생겨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

〈청실홍실은 열여덟이 제격이다〉

그 말들이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지금—

정말로 자기는 열여덟 살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대철도 만났다.

돈도 생겼다.

송씨까지 죽으면서 가장 큰 근심도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점쟁이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순영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숙자 말을 듣고 잠시 생겼던 의심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밝은 하늘을 가리던 옅은 구름 한 점이 완전히 걷혀 버린 것처럼.

순영의 마음은 다시 맑아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순영은 조용한 틈을 타 대철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로 했다.

순영은 종이를 여러 장 꺼내 놓았다.

쓸 말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먹도 벼루 가득 진하게 갈아 두었다.

하지만 막상 붓을 들자—

어떤 말부터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났다.

숙자가 허락해 준 일.

이제 정말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대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보고 싶은지.

그 모든 말이 다 급했고, 다 중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첫 문장을 쓰지 못했다.

순영은 한참 붓끝만 바라보다가 겨우 한 줄을 적었다.

하지만 곧 종이를 구겨 버렸다.

“아니야…”

이번에는 다시 다른 말을 써 보았다.

그런데 또 이상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괜히 안 해도 될 말을 쓴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찢었다.

또 쓰고.

또 찢고.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느 순간 방 안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순영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편지 쓰는 거네…”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피식 웃었다.

“아니지…”

순영은 붓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 쓰는 게 제일 어렵지…”

정말 그랬다.

아무리 써도 마음이 다 담기지 않았다.

조금만 담담하게 쓰면 냉정해 보이는 것 같았고, 마음을 솔직하게 쓰면 너무 부끄러웠다.

‘보고 싶어요.’

그 말 하나 쓰는 것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결국 순영은 여러 장 찢어 버린 끝에 아주 짧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안부를 묻고.

반드시 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꼭 와 달라는 말.

그리고—

만약 올 수 없는 사정이면 자기가 직접 가겠다는 말.

그 정도였다.

순영은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접어 예전에 손님에게 부탁해 만들어 둔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붙이는 순간에도 심장이 뛰었다.

마치 자기 마음 전체를 그 안에 넣어 보내는 기분이었다.

순영은 직접 우체통까지 갔다.

편지를 넣고 돌아오는 길.

그녀 머릿속은 이미 편지를 따라 함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금쯤 우체부가 가져갔을까…’

‘벌써 기차에 실렸을까…’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녀는 걷는 내내 그런 생각만 했다.

기차가 중간 역에 오래 서 있지는 않을까.

우편물이 늦게 전달되지는 않을까.

함흥에 도착하면 바로 분전해 줄까.

혹시 대철이 숙소를 옮긴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 드물게 있다는 것처럼 편지가 중간에 없어져 버리면 어떡하지?

생각은 끝이 없었다.

그러다가 순영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

중요한 걸 뒤늦게 깨달은 얼굴이었다.

차비.

대철이 그렇게 어렵게 지내고 있다면—

혹시 내려올 차비조차 부족한 건 아닐까.

순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차비도 같이 보낼 걸…’

지금이라도 다시 보내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다시 보내려면 날짜만 더 늦어진다.

순영은 그 생각이 너무 후회됐다.

“혹시 돈 없어서 못 오면 어떡하지…”

그녀는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철이 차비가 없다고 말 못 하는 성격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순영은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순영은 답장을 기다리기 시작했다.